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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포 조준 정확도 높이려다가 발견한…

인공지능 관련 연구 증폭시킨 제2차 세계대전 끝난 뒤 ‘사이버네틱스’ 개척한 노버트 위너
등록 2024-09-14 09:24 수정 2024-09-20 11:17
‘사이버네틱스’를 쓴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 노버트 위너.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이버네틱스’를 쓴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 노버트 위너.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금까지 인공지능(AI)의 오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 이제 인공지능의 어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인공지능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은 분명 어제의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인공지능은 어제의 인공지능이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의 어제는 생각보다 밝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에 없던 총력전의 한가운데서 인공지능의 오늘을 있게 만든 계획들이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그렇다.

포 사격 계산용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면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떠올리겠지만, 두 분야가 처음부터 이렇게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찰스 배비지의 차분기 이후 여성 계산원을 기계로 대체한 이 “계산 기계”는 과학적 계산을 위한 필요에서 별도의 경로를 따라 발전했다.(제1524호 ‘여성 계산 노동자들이 컴퓨터의 어원?’ 참조) 인공지능 이론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앨런 튜링이 구상한 기계를 오늘날 컴퓨터의 기원으로 보는 주장도 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대적인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고 컴퓨터 공학이 발달하는 시점은 1950년대 이후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학 무어스쿨에서 1945년 군용으로 개발한 에니악(ENIAC)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에니악은 전시에 포 사격을 계산하기 위해 고안됐다. 이때는 반도체 등장 이전이었기 때문에 컴퓨터는 공룡과 같은 거대한 몸집을 자랑했다. 반도체 이전에 컴퓨터를 작동시킨 핵심 부품은 진공관이었다. 초기 컴퓨터를 만든다는 것은 공장의 기계를 만드는 것과 같았기에 기계공학적인 기술이 곧 컴퓨터 관련 기술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컴퓨터 하면 떠올리는 “프로그래머”나 “코딩”은 당시의 컴퓨터에서 부차적인 작업이었다.

1945년 군용으로 개발된 최초의 대형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인 에니악. 위키미디어

1945년 군용으로 개발된 최초의 대형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인 에니악. 위키미디어


여기에서 요점은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별개라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컴퓨터라는 기계를 위해 고안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소프트웨어 개발과 맞물리고 프로그래밍의 필요성이 점점 증가하면서 컴퓨터 공학과 인공지능 이론이 결합하게 됐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론이 필연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구현으로 이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인공지능의 원리에 대한 구상은 이미 고대부터 있었다.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진행된 논의는 주로 수학과 심리학의 주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최첨단 통신장비를 이용한 정보전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사용하는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학자들이 동원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들 과학자의 네트워크가 미국의 전후 정책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튜링도 전쟁을 위해 차출된 수학자였다. 튜링 머신은 배비지의 차분기처럼 실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936년 컴퓨터의 일반 이론을 수립하기 위한 가상의 자동기계로 구상 단계에 있었다. 에니악이 이런 튜링 머신의 이론을 구현한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로 불리지만, 튜링이 이런 컴퓨터를 설계한 것은 아니었다.

신조어 ‘사이버네틱스’를 만들다

인공지능 연구의 갈래는 다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총력전의 목적이 이런 연구를 증폭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전폭적 지원을 받고 집약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과학기술은 전례 없는 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처럼 대량 살상과 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제조도 이런 사례 중 하나다.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양자역학의 원리를 현실화해 인류 자체를 절멸시킬 수단을 만들어낸 이 과학의 역설은 숱한 과학자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충격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노버트 위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위너는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수학 교수이자 컴퓨터 과학자였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린 그는 괴팍한 성격으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그의 구상은 컴퓨터 공학과 정보이론 분야에서 후대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위너의 영향력은 비단 컴퓨터 공학과 정보이론 분야에 그치지 않고 인류학과 철학까지 포괄했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제각각 흩어져 있던 과학적 실험의 결과를 종합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개구리의 시신경을 연구함으로써 시각과 뉴런의 상관관계를 해명했던 1940년 실험이 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월터 피츠라는 인물은 위너의 박사과정 지도학생이었다. 나중에 좀더 설명하겠지만, 피츠의 실험은 공학과 생물학이 어떻게 융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준 선구적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에서 모인 과학자들은 ‘개구리의 눈이 개구리의 뇌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후일 인공지능의 컴퓨터 비전 개발에 획기적으로 기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이 없었다면 이미지가 곧 뇌의 사유 방식이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었고, 이미지를 머신러닝을 위한 데이터 자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여러 계기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동료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이버네틱스는 처음에 대공방어 시스템으로 고안됐으나 위너는 이 시스템을 일반 이론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래서 사이버네틱스와 관련한 수학적 모델을 구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군은 최대 9명의 운용자가 필요한 기본적인 방공 레이더와 사격 통제 장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대전 기간에 미군은 영국 전투를 거치면서 빠르게 비행하는 목표물을 더 정확하게 타격하기 위해 자동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자동화는 운용하는 병사 수를 줄일 수는 있었지만, 예측한 좌표를 벗어난 비행기가 나타나면 속수무책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위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했다.

분과 과학의 경계 허문 메이시 콘퍼런스

실제로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피드백, 커뮤니케이션, 제어 과정에 바탕을 둔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만들어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진부한 격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런 위너의 이론적 구상은 조사이아 메이시 주니어 재단의 후원을 받아 분과 과학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목표로 삼은 메이시 콘퍼런스로 결실을 얻었다. 메이시 콘퍼런스는 수학자, 엔지니어, 생물학자, 사회과학자, 인간학자가 함께 모여서 전쟁 중에 활발하게 연구했던 커뮤니케이션과 제어 엔지니어링 이론을 인간과 기계에 적용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에 미디어는 디지털 컴퓨터를 가리켜 “전자두뇌”라고 불렀는데, 처음 메이시 콘퍼런스가 열렸을 때 이들은 이런 미디어 친화적인 용어 이외에 마땅한 개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위너가 ‘사이버네틱스’를 출간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게 됐고,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거리낌 없이 이 용어를 자신들의 연구 주제를 지칭하기 위해 차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국가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은 참혹한 전쟁의 참화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메이시 콘퍼런스는 이런 명분을 실현할 수 있는 창구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고뇌하는 참된 과학자의 이미지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946년에서 1953년까지 매년 개최했던 이 메이시 콘퍼런스가 마지막 모임 뒤 찍은 사진을 보면, 오늘날 인공지능의 역사를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메이시 콘퍼런스는 인류학자나 생물학자에게 자신의 학문을 새롭게 정립하게 했다. 이들은 모든 유기체가 정보-피드백 순환고리라는 사이버네틱스의 원리에 따라 존속한다고 봤다. 공학자가 아닌 사회과학자들은 사이버네틱스 모델을 인간의 지식 활동 전반에 적용하려 했다. 한마디로 사이버네틱스는 모든 학문의 토대를 자연과학의 기준으로 재구성하는 전환의 사고를 제공했다.

오늘날 학제 간 또는 융합 연구라고 불리는 통합 학문의 효시를 메이시 콘퍼런스라 봐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특히 1950년대에 이르면, 위너는 엔트로피 이론으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서 순환하는 정보의 양을 계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학의 주요 개념으로 정보 측정 방식을 확정함으로써 이제 사이버네틱스와 정보이론은 모든 학문 분야에 적용 가능한 모델인 것처럼 보였다. 사실상 이때 사이버네틱스 모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연구 방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대학 학제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대학 학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인지심리학, 분자생물학, 정보경제학, 양자물리학과 같은 명칭에서 사이버네틱스의 유산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보량을 계측하는 것이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도출해줄 수 있다는 믿음은 인류의 지식 생산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의 재건을 목표로 했던 미국의 계획과 이런 의미는 상당 부분 공명했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클로드 섀넌의 정보이론은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섀넌의 정보이론과는 긴장 관계

위너는 섀넌을 라이벌로 생각했다. 학교에 몸담고 있던 위너와 달리 섀넌은 당시 벨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다. 섀넌은 분명 사이버네틱스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정보에 대해 위너와 다소 다른 개념을 갖고 있었다. 물론 섀넌은 공개적으로 자신과 위너의 이론이 다르다고 공표하진 않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처럼 이제는 그냥 일상용어가 돼버린 정보라는 용어는 은근한 경쟁 관계에서 탄생했다. 정보량과 커뮤니케이션의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에서 둘은 서로 의견이 갈렸다. 이 차이가 무슨 의미인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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