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일 낮이었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 200여 명이 돌연 공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한 라인을 멈춰 세웠다. 이들은 불법 비정규직 고용을 해결하라고 회사에 3년째 요구했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회사는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불법 고용했다는 대법원의 판단을 받았음에도 비정규직 노동조합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사내 하청업체를 폐업시키는 식으로 일관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를 대화 자리로 불러내는 최후 수단으로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이 일은 어떻게 됐을까? 이들이 실제로 라인을 세울 수 있었던 시간은 약 1시간에 불과했다. 회사 관계자들이 뛰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밖으로 쫓아내고 공장을 다시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항의 대가는 컸다. 회사는 비정규직 노조를 상대로 라인이 멈춘 63분 동안 지출된 인건비 등 45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이하 ‘손배소’)을 냈다. 2013년 7월12일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10년 전 이 사건은 2023년 6월15일 대법원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현대차의 파업 손해 계산법을 인정한 2심과 달리 대법원은 손해액이 과도하다며 이를 바로잡으라는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마침 노동자의 합법 쟁의행위를 폭넓게 보장하는 ‘노란봉투법’이 임시국회 표결을 앞둔 상황이어서 반향이 컸다.
대법원의 판결은 기업의 마구잡이식 파업 손해 계산법을 바로잡았다는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거액의 손배소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냈다. 손배소 남발 관행을 끊는 근본 해법은 법 개정임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6월15일 대법원 3부가 선고한 노동조합 쟁의행위 관련 판결은 총 6건이다. 이 중 4건이 위 사건처럼 공장라인의 일시적 중단에 대해 현대차 쪽이 건 손배소다. 이들 사건에서 현대차는 적게는 4500만원, 많게는 5억여원까지 손해를 주장했다.
현대차의 계산법은 단순하다. 기업이 자동차 생산을 위해 1년에 걸쳐 투입하는 ‘고정비용’, 즉 직원 인건비와 공장 유지비, 차량 연구개발비 등을 모두 합쳐 1분, 1시간 단위로 쪼갠다. 그리고 파업으로 못 돌린 시간만큼 고정비가 낭비됐다고 주장한다. 앞서 현대차가 ‘63분 라인 정지’ 사건에서 주장한 4500만원 파업 손해도 해당 라인의 2013년 연간 고정비를 연간 가동시간으로 나눠 1시간 평균 고정비 값을 계산한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이런 계산법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2심 재판부는 인정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고정비 지출 효율을 1분, 1시간 단위로 따지지 않는다. 자동차 공장들은 평상시 장비 고장이나 설비 오작동 등으로 라인이 서면 직원의 잔업·특근으로 부족분을 메우곤 한다. 또 자동차 기업들은 미리 재고를 축적하고 수개월 전부터 고객 판매 예약을 받는다. 일시적 작업 지연이 고스란히 판매 감소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니라는 뜻이다. 현대차는 비정규직 노조의 쟁의행위가 빈번했던 2013년에도 전년보다 약 3조원 많은 87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재판부는 이런 정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현대차의 4건 손배소를 모두 파기환송했다.
애초 현대차 비정규직 노사 갈등의 단초는 현대차 사측이 제공했다. 현대차는 2010년 하청 노동자 최병승씨가 불법파견 노동자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자 최씨만 정규직 전환하기로 하고 같은 일을 하는 다른 하청 노동자들에 대해선 아무 대책을 내지 않았다. 현대차의 비정규직 노조(현대차 비정규직지회)가 수차례 공문을 보내 대화를 요구했으나 응하지도 않았다.
2심 재판부도 현대차의 책임을 인정했다. 현대차가 계산한 고정비 손실 주장을 받아들이되 회사가 갈등을 키운 잘못을 고려해 청구액의 50%만 받아가도록 한 것이다. 이를 ‘책임제한비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차가 애초에 산정한 피해액 자체가 수천만원으로 크게 부풀려진 탓에 이를 절반으로 줄여도 2500만원에 달했다.
“사용자가 단체교섭 요구를 수년째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손해사정을 해도 법원이 받아주니 내가 사용자여도 손배소하겠다.” 쟁의행위 손배소 대응 단체 ‘손잡고’ 소속 윤지선 활동가의 말이다. 실제로 현대차는 이 사건 외에도 2020년까지 10건이 넘는 쟁의행위 손배소 를 냈다. 노동자가 산재 위험을 우려해 작업을 긴급 중지한 사건(2020년 3월, 1억200만원 청구)이나 출입시스템 변경 방식에 항의한 사건(2020년 6월, 6400여만원 청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자 쪽이 항소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면 청구액이 그대로 확정됐다. 비정규직 노조 쪽은 기업들이 노조 활동을 저해할 목적으로 소송을 냈다며 민법이 금지하는 ‘소 권리 남용’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6건 중 4건에 대해선 파업 손해를 만회했다는 법리를 적용했지만, 파업 규모가 컸던 나머지 2건에 대해선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 2010년 11월 현대차 하청 지회가 사내 CTS 타워를 20일 넘게 점거한 파업이나 2009년 5월 금속노조 쌍용차지부가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대해 석 달간 벌인 옥쇄파업은 그 기간 생산이 전면 중단돼 매출 보전이 안 됐다고 봤다. 다만 대법원은 이 두 사건에 대해서도 조합원의 책임에 따라 배상액에 차등을 두라거나 지나치게 부풀려진 배상액을 다시 산정하라고 파기환송했다.
먼저 현대차 하청 노조의 CTS 전면 파업 사건을 보면, 재판부는 쟁의행위를 결정한 노조와 그 행위에 참여한 개별 조합원의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고 봤다. 파업 결정을 내린 주체는 노조인데 단순히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들까지 동일한 책임을 갖고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쟁의행위가 다수결로 정해진 이상 (개별 조합원이) 불응하기는 쉽지 않고” “급박한 쟁의행위 상황에서 조합원들에게 정당성 여부를 일일이 판단하게 하는 것도 근로자 단결권을 약화할 여지가 있다”며 파업 손해에 대한 피고들의 책임을 달리 산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까지는 쟁의행위 기여도와 무관하게 회사가 지목한 피고들끼리 다 함께 손해액을 갚는 구조(‘부진정연대책임’)다. 도중에 피고 일부에 대해 소를 취하해도 손해액이 줄지 않는다. 이 때문에 노조 활동이 활발한 조합원들을 피고에 대거 포함한 뒤 노조 탈퇴를 소 취하 조건으로 거는 ‘노조 길들이기’가 만연했다. 현대차도 CTS 파업 당시 노조가 아닌 개인 조합원 29명을 피고로 지목한 뒤 회사의 신규채용에 응한 이들만 소를 취하했다. 현재 남은 피고는 쟁의행위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과 연대한 정규직 노동자와 산별노조 활동가 등 4명이다. 대법원은 이런 현실이 불합리하다며 쟁의행위에 대한 기여도와 현실적 임금 수준, 노조 내 지위와 역할 등을 따져 각각의 책임을 따로 산정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판결도 한계가 뚜렷했다. 조합원의 책임을 개별적으로 따질 필요성을 내세웠으나, 파업 손해액을 뭉뚱그려 갚게끔 하는 구조는 그대로 둔 것이다. 고용노동부(6월18일)와 대법원 공보실(6월19일)은 판결 뒤 잇따라 보도자료를 내어 “판결 취지는 조합원별로 책임제한비율을 개별 산정하자는 취지”라며 “부진정연대책임(발생 원인이 달라도 연대해 책임을 짊) 법리가 깨진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책임제한비율은 최종 손해배상액을 산정하기 전 여러 사정을 재판부가 참작해 설정하는 손해배상의 상한선이다. 그런데 기업이 주장하는 피해액 자체가 워낙 크면 조합원마다 상한선을 달리 둬도 배상액이 줄어드는 효과가 미미하다. 이 법리가 적용된 현대차 CTS 파업 사건도 현대차가 주장한 파업 손해액이 271억원에 달하고 현대차는 ‘이 가운데 극히 일부’인 20억원만 배상 청구하겠다고 했다. 이 경우 재판부가 책임제한비율을 조합원별로 30∼50%로 정해도 배상액이 81억∼135억원에 달해, 현대차가 청구한 20억원을 한참 웃돈다. 결국 이 사건이 파기환송돼도 조합원들은 동일한 청구액을 낼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은 쌍용차 노조의 옥쇄파업 사건도 기업의 고정비 피해 주장을 모두 인용하고 파업과 무관한 일부 항목만 빼주는 수준에 그쳤다. 쌍용차 그룹은 파업이 없었다면 올릴 수 있었던 영업이익과 그 기간 지출된 고정비,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위로금 등을 모두 더해 100억원을 손해액으로 청구했고 이 가운데 회사 잘못 등을 고려해 책임제한비율을 60%로 매긴 33억여원을 2심까지 배상액으로 인정받았다. 대법원은 여기서 파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노동자 위로금만 손해액에서 빼라고 판결했다. 최종적으로 쌍용차 노조가 내야 하는 배상액은 33억여원에서 22억여원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물론 14년간 매년 5%씩 붙는 지연이자는 별도다.
과거 비슷한 사례에서 일본이나 프랑스는 손해배상 청구인인 기업에게 입증 책임을 엄격하게 묻는 방식으로 손배소를 자제시켰다. 1975년 일본국유철도(JNR)의 노조 파업 손배소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가 손해 사정에만 20년을 끌어 1994년 노사 화해로 소송을 마쳤다. 프랑스 파기원(한국의 대법원 격)은 1982년 ‘조합원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만 배상 책임을 진다’는 원칙을 세우고 조합원별로 손해를 개별 입증하도록 했다. 소송의 청구인인 기업이 손해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때만 배상하도록 한 것이다.
반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고정비’ 등 기업의 파업 손해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이되 일부 지나치게 계산된 손해를 바로잡는 수준에 그쳤다. 대법원 공보실은 재계의 반발이 커지자 도리어 6월19일 보도자료를 내어 “(이 판결로) 기업의 입증책임이 강화된 것도, 기업의 손배 청구가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라며 판결의 의미를 스스로 축소했다.
이런 구조에선 불법 파업으로 손배소가 제기된 이상 어떤 계산법으로도 노동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어렵다. 10년 넘게 사건이 계류되는 동안 노동자들은 월급 가압류와 빚의 대물림을 두려워하며 산다. “어떤 재산도 자기 이름으로 할 수 없는”(현대차 해고노동자 엄길정씨) 시간이다. 2022년 쌍용차 노동자 24명은 손배소로 인한 트라우마 진단서를 대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은 재계의 손배소를 원천적으로 막지는 않는다. 대신 손배소가 면책되는 합법 교섭·파업의 범위를 넓힌다. 하청 노조가 점거 농성을 벌이지 않아도 원청과 대화할 수 있게 제도적 틀을 보장한다.
“재계는 ‘불법 파업이니 손해를 배상하는 게 당연하다’고 합니다. 저는 되묻고 싶어요. ‘만약 (노조가 사측과) 교섭이 가능했으면 어땠을까요?’” 윤지선 활동가가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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