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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생각이 바뀐 계기, ‘강제징용’ 판결이었다

일본 기자가 일본 사료로 ‘팩트체크’ 한 <한국과 일본, 역사 인식의 간극>
등록 2023-03-31 14:34 수정 2023-04-03 05:41

“한반도가 근대화된 것은 일본 덕분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으로) 비열하게 골대를 옮겼다.”

<한국과 일본, 역사 인식의 간극>(이규수 옮김, 삼인 펴냄)의 저자인 와타나베 노부유키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이런 주장을 철석같이 믿던 수많은 일본인 중 하나다. 한국 쪽의 전쟁 피해 주장을 납득하지 못하던 그는 2019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한국 대법원 승소 판결을 계기로 일본 곳곳의 사료를 꺼내보며 ‘팩트체크’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일본인들은 전혀 몰랐던 큰 희생의 역사”를 마주한다.

책은 양국 갈등의 뜨거운 감자인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로 시작한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된 것이 아니라 ‘(구인 모집에) 자발적으로 응모’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와타나베가 확인한 <일본교통공사 70년사>를 보면 일본은 “조선인 노무자를 대거 수송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과정에서 “반강제로 끌려온 노무자들이 도망가기도 했다”. 전쟁으로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까지 징용령이 내려질 정도였다.

일본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동학농민운동 역시, 손에 든 무기가 죽창과 화승총뿐이던 한국 의병을 일본군 토벌대가 무참히 살해한 기록이 일본군 병사 종군일지와 소좌(소령)의 보고서에 적혔다. 일본이 기록한 일본군 전사자는 136명이었으나 조선인 의병 전사자는 1만7774명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도 일본은 그 사실을 부인하나 당시 일본인 학생들이 쓴 재해 작문집에 학살 당시 상황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일본군의 전쟁범죄가 왜 일본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을까. “오늘날 일본인의 역사 인식은 사실을 개찬(다시 편찬)하고, (범죄) 기록을 처분하고, 기억을 망각함으로써 일본의 입맛에 맞춰 만들어졌다”고 와타나베는 짚는다. “‘믿을 수 없다’는 일본인들의 소박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은 선량하다, 어떤 때라도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심정을 노린 속임수다.”

국가의 자긍심을 위해 전쟁 범죄를 외면하는 습성은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다. 와타나베 기자는 베트남전 참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수많은 증언으로 드러난 후에도 미군이 학살을 부인한 사건을 언급하며 “국외에서 행한 병사들의 비인도적 행위를 국내에서 ‘모두의 기억’으로 남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나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와타나베는 이 대목에서 일본을 보지만, 베트남전 참전국인 한국은 자화상을 본다. 2023년2월17일, 서울중앙지법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낸 지 열흘 만에 국방부 장관은 “학살은 전혀 없었다”고 발표했다. 한국과 일본이 기묘하게 만나는 대목이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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