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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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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내세운 통치, 내 이웃을 적으로 만든다

한국 정치세력, 민주주의 확장 대신 개인 간 ‘적대’ 부추겨 권력 강화
대권리의 시대… 시민들의 불화를 당연시하는 ‘공화’ 의미 찾아야
등록 2023-02-24 14:59 수정 2023-03-02 05:16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대권리의 시대다. 개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대의를 지닌 가치가 아니라 각각의 권리다. 세상에서 가장 부정의한 건 내 권리를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일이며 그것보다 더 큰 ‘악’은 없다. 개인의 권리 앞에 어떤 공익이나 대의를 갖다놓더라도 먹히지 않는다. 이런 대의를 주장하는 사람이야말로 ‘악당’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질수록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사회의 핵심적 구성 원리가 된다. 시민이 자신의 권리와 자유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다. 동시에 그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큰 악당은 동료 시민이 아니라 바로 국가이며, 국가의 권력을 통제하고 시민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해 정치에 시민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행복하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하는 관계인 것이 근대사회인 셈이다.

자유주의·민주주의의 갈등적 공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동인이던 권리의식의 심화는 ‘통치’를 지극히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통치는 시민을 국민으로 보고 그저 통제와 동원의 대상으로 여겼다. 권력기관을 통해 협박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게 통치라고 생각했다. 그런 통치에선 사안에 대한 의견이 다른 사람이 정당을 구성하고 경쟁하는 ‘정치’가 불가능했다. 정적이 없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들의 의견 제안이 없다는 의미에서도 ‘정치가 없는 통치’가 바로 권위주의다.

아무리 권력기관을 동원해도 정치 없는 권위주의적 통치는 한국에서 재등장하기 어렵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며 동원되는 ‘국민’이 아니라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무엇보다 자기 ‘권리’가 중요한 ‘개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개인’이 절대 못 참는 게 자기 권리가 침해되는 일이고 ‘계약’을 넘어 부당한 것을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런 침해와 요구가 ‘권력’이라고 인식해 저항한다. ‘우리 모두’는 국민으로 돌아가기엔 ‘지나치게’ 권리의 주체가 됐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개인주의가 심화하면서 구성원 사이에 권리를 둘러싼 엄청난 갈등이 나타난다. 권리 간 부딪침이 격화할수록 개인들은 한편에선 뚜렷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로 인식하지만 동시에 자기 권리가 침해당하는 부당한 피해자로 인식한다. 대권리의 시대에 피해자 정체성이 강해지고 피해자로서 발언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많아지고 강해지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못 견디는 것이 ‘남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된다.

통치권력이 이 갈등을 제대로 조정해내지 못하면 사회는 권리 주체 간의 전쟁, 내전 상태에 돌입한다. 따라서 통치권력은 권위주의 때와 달리 정적을 제거해 정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활성화를 통해서만 내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정치가 사회 불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화를 불온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불화가 ‘적대’로 격화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민주주의를 활성화해야 한다. 서구에서 ‘사회국가’가 등장한 이유다.

권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으로서는 명확해 보이지만 실제 권리와 권리의 경계는 모호하며 동시에 갈등 요소가 상당한 영역이다. 계약을 아무리 상세하게 해도 권리의 경계가 명확히 식별되지 않는 영역은 항상 생길 수밖에 없다. 갈등이 벌어지게 된다. 갈등이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된다.

나에게 명확한 것이 상대에겐 모호

일상에서 권리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에 대한 좋은 사례가 있다. 한 친구가 얼마 전 세탁기를 바꾸면서 세탁실 수전도 바꿔야 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블로그를 운영하며 홍보하는 기술자를 불렀다. 아주 ‘젊은’ 기술자가 왔는데 수전을 다 교체했다고 해서 세탁실을 봤더니 딱 수전만 교체하고 세탁기 호스는 연결돼 있지 않더란다. 그래서 호스를 원래대로 다시 수전에 꽂아달라고 했는데 그 ‘젊은’ 기술자의 안색이 확 바뀌더니 난폭하게 세탁기를 돌려서 그 아래에 떨어진 호스를 찾아 꽂아두고 세탁기는 비뚤어진 채 그냥 두고 돌아가버렸단다.

그 친구는 삐딱하게 놓인 세탁기의 수평을 다시 맞춰 제 위치로 돌려놓으며 그 기술자가 왜 그랬는지 생각하며 당황했다고 한다. 친구의 추측으로는 기술자가 돈을 받고 부탁받은 임무는 수전 교체이기에 정확히 필요한 일(세탁기에서 원래 꽂혀 있던 호스를 빼고 수전을 교체하는 것)만 하지 그 외의 일(다시 호스를 세탁기에 꽂아두는 것)은 계약에 없는 ‘부당한 일’로 여기는 듯했다고 한다.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세탁기에 호스까지 꽂아두는 것이 원위치로 돌리는 일이기에 말할 필요도 없이 기술자가 해야 하는 일로 “명확하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수전을 고치러 온 사람이니 그런 요구가 “명확하게 부당하다”고 말할 것이다. 문제는 자신에게 ‘명확한 것’이 상대에게는 ‘모호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대화와 소통은 근본적으로 부정된다. 문제는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대다수 사람이 바로 이 점에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살아가지 않는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가 찬반투표로 파업철회결정을 내린 9일 오후 경기도 의왕ICD 제1터미널 인근 사무실 앞에서 노조원들이 해산결정을 들은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가 찬반투표로 파업철회결정을 내린 9일 오후 경기도 의왕ICD 제1터미널 인근 사무실 앞에서 노조원들이 해산결정을 들은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민주주의 후퇴로 인한 위기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심화로 인한 위기. 이것이 통치권력을 문제 삼을 때 더욱 직시해야 하는 사회 변화의 현실이다. 민주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대권리의 시대는 개인이 국가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영역에서 개인과 개인이 서로 적대하는 전쟁 상태를 만든다. 근대 초창기와 달리, 자유의 적이 국가가 아니라 동료 시민이 된다. 누구보다 밉고 위협적인 악당은 내 이웃이며 지하철 같은 칸에 앉은 ‘동료’ 시민이다.

이것이 일상 전체를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며 구성원이 적대하는 대권리의 시대에 오히려 ‘공화’가 적극적으로 제기되는 이유이자 조건이 된다. 공화는 말의 인상이 풍기는 것처럼 적당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불화를 당연한 일로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민주화 이후 사회가 여전히 필요하고 작동해야 한다고 여기는 민주주의자가 다시 발견해야 하는 것이 ‘공화’의 가치이며 그 의미의 재구성이다.

대권리 시대에 심각하게 위협받는 ‘평등’

더구나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는 대권리의 시대에 불평등이 심화하는 방식이 민주와 반민주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대권리의 시대는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하고 확장할 수 있는 자원이 많은 사람이 승자가 된다. 과거처럼 초법적 권력으로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권력으로 부당하게 자원을 모았다면 대권리의 시대는 자원이 권력이 되어 정당성까지 확보하면서 사회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인 ‘평등’이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결정적으로 민주주의자가 공화의 의미를 적극화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자유를 전면화하는 통치권력이 빠지기 쉬운 유혹 때문이다. 이런 통치권력은 시민들의 권리의식 심화로 어려워진 통치(권력)를 민주주의 확장으로 확보하지 않고 시민이 서로 적대하는 내전을 심화하는 방식으로 강화한다. 자유의 가장 큰 적이 권력을 무한대로 확장하려는 통치권력 자신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자유를 위협하고 권리를 침해할지도 모르는 네 옆자리 시민이라고 국가가 앞장서서 내전을 부추긴다.

이 길은 확고한 지지층을 끌어모은다. 대권리의 시대에 동료 시민이 바로 내 자유와 권리의 악당이란 점은 시민 각각의 ‘경험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는 내 출근길을 힘들게 하고 나의 이동할 자유를 가로막는다.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교해 차별받는 것을 넘어 바로 그 정규직에게서 모멸적이고 부당한 ‘갑질’을 당하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의 ‘고유한’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외부에서 침입한 파괴자다.

동료 시민을 향한 분노를 강력한 정치적 지지층으로 끌어모으는 일은 통치 지반을 만드는 것이자 동시에 통치권력을 한층 강화하는 길이 된다. 통치권력으로서는 손쉬운 길이겠지만 ‘나라’로서는 이보다 더 큰 불행과 위험이 없다. 국가권력은 강화되겠지만 ‘공화’라는 의미로서의 나라는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 ‘나라’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지구 곳곳에서 확인하고 있다.

지구 곳곳에서 정치 과정은 근본적으로 화해 불가능한 적대를 협상하고 타협하는 역동적인 정치 과정인 불화로 끌어안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협 가능한 불화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적대로 전화되고 있다. 통치권력이 그것을 부추기고 말이다. 그 결과 정치에 난무하는 이야기는 적들을 섬멸하는 복수극밖에 없다. 불행히도 한국의 통치권력을 포함한 정치세력이 착실하게 이 길을 걷고 있다.

말이 힘을 잃을수록 소통 역량 압박은 더 커져

적대를 불화로 바꾸는 것이 정치의 매개체인 ‘말’의 역할이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정치 역량이라면 반대로 불화마저 적대로 전환한다면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효과도 없기 때문이다. 아예 말조차 하지 않거나 아무 말이나 해도 무상관이 되기에 ‘말’만큼 피곤한 것이 없다. (반대로 불화마저 적대로 전환하는 말 같지도 않은 가짜뉴스와 요설 같은 말만 힘을 발휘하며 세상을 어지럽힌다.)

엽기적인 것은 사회적으로 말이 힘을 잃을수록 일상생활에선 소통 역량에 대한 압박을 강하게 받는다는 점이다. 정치 공간과 달리 일상생활은 여전히 말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고 조직을 지속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말이 힘을 잃을수록 일상에선 그에 반비례해 관계나 조직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위기 속에 구성원에게 강하게 소통 역량을 압박한다. 지금 일상의 조직에서 사람들은 유례없을 정도로 소통에 압박감을 느끼며 그 피로감을 호소한다. 권리 주장은 분명하면서 소통 역량은 꽝이라고 비난받으며 말이다.

이것이 정말 개인 소통 역량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대권리의 시대에 그 개인들이 소통 역량의 성장을 도모할 사회적 기반인 말에 힘을 실어주는 정치 과정이 붕괴해 생기는 문제인가? 아니, 이런 현실에서 저 수전 교체 노동자와 같은 개인에게 공화국 시민의 덕성으로서 소통 역량을 기대하고 압박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루하루 소통 역량이 ‘꽝’인 사람들을 상대하며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에게 분노를 퍼붓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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