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범죄 재판에서) 미성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라 할 것이나, 심판 대상 조항이 영상물에 수록된 미성년 피해자 진술에 있어 원진술자(아동·청소년 피해자)에 대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실질적으로 배제하여 피고인의 방어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은 과잉금지 원칙에 반한다고 보아, 재판관 6 대 3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하였다.”
2021년 12월23일 헌법재판소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30조 6항에 대해 단순 위헌 결정을 내렸다. 2010~2011년 8살 아동을 성추행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19살 미만 미성년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이 조항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위헌 결정으로 이 조항의 효력은 즉각 상실됐다. 아동·청소년 성폭력 및 학대 피해자들은 안전장치 없이 가해자 쪽의 모멸적이고 가학적인 반대신문에 노출되는 추가 가해로 내몰리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피해자의 헌법상 권리를 짓밟았다.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받을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낸 성명에 따르면, 헌재는 이번 결정과 관련해 공개변론이나 의견조회 등도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헌재는 피고인의 방어권과 피해자 보호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조화로운 방법’으로 “증거보전 절차나 가해자 대면을 최소화하는 각종 증인지원 절차” 등을 예로 들었지만, 현실은 법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법관들의 판단과 거리가 멀다. 성인 또는 비장애 성폭력 피해자조차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해를 시도할 정도로 엉망으로 운용되고 있다. 10살 미만 아동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가해자 쪽은 ‘피해자가 유혹했다’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신문을 진행한다. 성폭력 가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 로펌 중에는 이렇게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기는 방식의 반대신문을 홍보전략으로 삼는 곳도 있다. 헌재의 위헌 결정 뒤에 일반적인 피해자 증인신문 방식과 차이가 없는 이런 증거보전 절차를 피해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피해자를 위한 별도 진술 공간이 있고 가해자 쪽 참여권과 신문권 행사 방식을 조율하는 등의 기본적인 준비는 돼 있는가?
판사에 따라 달라지는 ‘증인지원 절차’2011년 증인신문을 끝낸 성폭력 피해자가 재판부의 신문이 모멸적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피해자는 성인이었다. 법원은 뒤늦게 2012년부터 여러 증인지원 절차를 마련했다. 증언 전후의 동행과 보호(증인지원관 제도), 비공개심리(방청객 퇴정), 증언 도중 피고인 접촉 차단, 피해자의 신뢰관계인 동석 등이다. 그런데 이 절차도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적용 범위와 효과가 달라진다. 아직 어떤 법원에는 증인지원실도 없고,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추가 가해를 막는다며 진행한 비공개심리 과정에서 재판부가 오히려 피해자에게 2차 가해성 질문을 남발하거나 피고인 쪽의 무분별한 반대신문을 전혀 제지하지 않기도 했다. 피해자는 피고인의 법정 퇴정, 즉 공간 분리를 원하지만 차폐막(가림막) 설치만을 강요하는 법관(판사)도 여전히 존재한다. 중계 장치를 이용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성폭력 사건에서 영상재판 프로그램을 활용해 피해자 증인신문을 진행한 것도 2021년 9월에야 시작됐을 정도다.
법관과 피해자의 인식 차이는 크다. 2019년 젠더법연구회에서 진행한 법조인 대상의 설문조사(성범죄 재판 증인신문의 현실 및 피해자 보호 규정 도입에 관한 법조인의 인식)에서 참여 법관 72% 정도가 현재 피해자 증인신문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가 충분하거나 대체로 그렇다고 답변했고, 85% 정도는 피고인 쪽의 부적절한 신문을 제지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2019~2020년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익명 피해자 33명, 법정 기록하며 직접 연대한 피해자 30명을 대상으로 함) 결과를 보면, 피해자의 약 22%만 지금의 피해자 증인신문 과정에서 ‘피해자가 대체로 보호된다’고 답했을 뿐 나머지는 ‘(보호가)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다. 가해자 쪽의 부적절한 신문에 법관이 즉각 제지했다는 응답은 22%, 피해자가 항의해서야 제지한 경우가 33%, 그리고 나머지는 아예 피고인 방어권을 내세워 제지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전국 법원을 돌아다니면서 피해자의 신뢰관계인으로 재판에 동석했을 때도, 검사나 피고인 쪽 변호인이 제출한 증인신문 사항을 검토하고 부적절한 질문을 제외해달라고 요청하는 재판부를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어떤 신문이 부적절한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재판부도 있었고, 일단 피해자 신문을 다 하게 한 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다면 이후 양형에 반영하겠다며 신문에 적극 응하라는 재판부도 있었다.
피고인 쪽이 피해자를 상대로 진행하는 반대신문은 피해자에게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안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 증인신문 과정을 거친 피해자들은 법정 밖에서 통곡하거나 자해·자살 사고에 시달렸다. 피고인 쪽 변호인이 피해자가 아동·청소년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 신문을 진행할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오히려 질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 피해자에게 적극 유도신문 등을 하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흠집 내려는 사례가 많다. 이런 추가적인 고통을 감내해야만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
나는 11년 전에는 성폭력 피해자로 증인석에 앉았고, 이제는 피해자의 신뢰관계인으로 그 뒤에 앉는다. 그 낮고 을씨년스러운 자리에서 법대 위 판사들을 올려다보며, 그들을 증인석에 앉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들에게 증인석에 앉아 신문을 견딘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다. 모멸감, 무책임한 사회와 가해자에 대한 분노,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도 경험했던, 성인이자 비장애 성폭력 피해자였던 나도 증인신문 과정이 고통스러웠는데 훨씬 취약한 아동·청소년 피해자는 어떻게 그 과정을 견딜 수 있겠는가. 나는 요즘도 응급실과 장례식장을 다닌다. 형사사법 절차가 피해자를 배제하고, 그렇게 보호받지 못한 피해자는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위헌 결정 이후 상황에 대한 실무적, 입법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법관들은 2016년 나온 성폭력 피해자 증인신문 관련 매뉴얼이라도 준수해야 한다.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을 최대한 존중하는 증인지원 절차가 이뤄져야 한다. 판사들은 소송 지휘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증인신문에 앞서 신문 내용을 검토해 부적절한 부분에 대해서는 피고인 쪽에 주의를 줘야 하며, 부당한 신문은 피해자의 문제제기 등이 없어도 적극 제지해야 한다. 피해자이지만 형사사법 절차에서는 당사자 지위를 갖지 못하고 소외된 채, 오히려 피해 입증 책임을 강요받는 피해자에게도 그에 걸맞은 보호·지원을 해줘야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강조하는 ‘공정’과 ‘조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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