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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기무사가 성폭행” 북한이탈여성 #미투

군무원에게 ‘성폭행 피해’ 북한이탈여성… “가해자에게 엄벌을, 기무사는 사과를”
등록 2021-06-29 15:37 수정 2021-07-03 08:44
2009년 7월 경기도 안성에 있는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통칭 하나원) 개소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교육생이 한 탈북자의 수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09년 7월 경기도 안성에 있는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통칭 하나원) 개소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교육생이 한 탈북자의 수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재판에) 증인을 세우려다가 제가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어요.”

북한이탈여성 이주영(40대·가명)씨는 성폭행 피해자로 재판에 적극 참여하는 데 처음에 망설였다. 북한이탈주민 사회에서 성폭행 피해가 알려지는 게 몹시 겁났다. 재판을 처음 받아보는 그로서는 재판에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 사회가 매우 좁아요. 남한에 오면 모두 하나원(남한 정착을 지원하는 통일부 소속 기관)에서 3개월을 함께 생활하니까 ‘하나원 몇 기냐’ 이런 식으로 두세 사람 정도만 건너면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전국에 사는 탈북민이 파악돼요.”

피해자가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 군무원(군에서 근무하는 특정직 공무원)인 가해자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북한이탈주민 증인들을 확보해나갔다. 이에 따라 이씨의 성폭행 피해 사실이 북한이탈주민 사회 내로 퍼지고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서 법정 싸움이 더 복잡해졌다.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돼버렸다.

국가가 손 놓은 사이 가해자 범위 늘어

<한겨레21>은 제1318호(2020년 6월29일 발행) 표지이야기에서 국군정보사령부 현역 간부 2명에게서 성폭행당하고, 피해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군검찰의 2차 가해를 당한 북한이탈여성 한서은(30대·가명)씨의 ‘미투’ 사건을 보도했다. 그 뒤로도 성폭력 피해를 당한 북한이탈여성이 잇따라 나타났지만 정부와 군 당국은 손 놓고만 있다. 그사이 성폭력 혐의를 받는 가해자는 국군정보사령부 현역 군인, 신변보호담당관 직무를 맡은 경찰, 탈북민 단체 대표 등에서 이제 군무원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경제적 어려움 탓에 북한을 떠난 이주영씨는 중국과 제3국 등을 거쳐 2000년대 후반 남한 땅을 밟았다. 북한에서 공무원으로 일한 그는 낯선 세상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자존감이 무너져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도 받았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학 학사를 취득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취업한 뒤 장관 특별상까지 받았다. ‘북한이탈주민으로 사회 적응과 생활에 어려움이 많음에도 평생교육을 통한 자기계발로 자격 취득과 취업에 성공했다.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역경을 이겨내고 학업에 매진하는 모습이 타 학습자의 모범이 된다.’ 이씨는 남한의 격려와 응원에 힘을 얻었다고 했다. 어린 아들과 함께 순조롭게 정착하는 듯했다.

2016년 4월 북한이탈 군인인 지인에게서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소속 군무원인 정훈경(59·가명)을 소개받았다. 정씨는 당시 ‘북한군 관련 정보분석과 정책수립을 돕고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등을 통해 한반도 평화 통일에 기여할 목적’으로 비영리단체 설립을 준비한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 말했고 그 정부의 기조에 맞춰 기무사가 중심이 돼 비영리단체 설립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영리단체는 2017년 4월 국방부 북한정책과에 정식 등록돼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정씨는 이씨에게 비영리단체에서 함께 일할 것을 요청했다.

군과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가 덫이 될 줄이야

“북한 사람들은 군과 국가기관이 하는 일은 거의 무조건 신뢰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도 적극적으로 협조했어요. 고향에 부모 버리고 온 배신자란 말을 듣곤 했는데, 통일을 위한 일을 하면서 언젠가 고향에 멋있게 돌아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정씨가 ‘지금은 단체로 시작하지만 향후에 재단법인으로 전환될 것이고, 그러면 정규직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도 했어요. 여러 가지로 동기부여가 돼서 열심히 일했어요.” 당시 이씨는 직장을 다녔지만 “퇴근 뒤와 주말은 물론 근무 중에도 정씨가 업무를 지시하면 바로 처리했다”고 했다. 월급은 없었고 활동비 30만원 정도를 두세 차례 받았다.

군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을 보면, 정씨는 이 단체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다. 북한군 출신 북한이탈주민들을 관리하며 “각종 예산 지원, 회장 같은 주요 보직자 선임 등 모든 업무를 조정·통제·감독”했다. 2017년 1월부터 1년간 이 단체의 실무자로 선임된 이씨는 정씨와 “상하관계”라고 했다. 정씨는 자신의 지위나 권세 등을 이용해 2017년 3월부터 7월까지 이씨를 10여 차례 성폭행이나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은 남한 정착을 지원하는 신변보호담당관(경찰)의 관리를 받는데, 이씨는 정작 도움을 청하지는 못했다. “신변보호담당관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고, (성폭행) 피해가 알려질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씨는 2019년 1월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에 비영리단체 운영상의 문제와 강제추행 피해사실 등을 담아 ‘기무사 군무원을 처벌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이후 군사법경찰과 군검찰의 수사가 이어졌다. 2020년 6월 국방부 검찰단(군검찰)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강제추행 혐의로 정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정씨는 현재 기무사가 아닌 다른 부대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진다. 정씨는 군사법원에서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정씨의 변호인은 “무고함을 다투는 중”이라고 짧게 입장을 밝혔다.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국군기무사령부) 전경. 한겨레 박종식 기자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국군기무사령부) 전경. 한겨레 박종식 기자

“피해사실 알려질까 두려웠다”

이씨처럼 북한이탈여성이 성폭행 피해가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것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관련이 깊다. 북한이탈주민 사회에선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면 가해자인 남성이 아니라, 피해자인 여성에게 비난이 쏟아진다. “‘저 여자가 사람 잡았다’는 말을 들으며 피해자가 죄인이 돼버려요.” 이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선시대나 명예살인이 있는 아랍 사회의 가부장제에서나 있을 법한 일 같지만, 3만3천여 명(2019년 기준) 규모의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 사회에서 현존하는 문화다.

이씨를 포함해 성폭력 피해를 당한 북한이탈여성들을 법률 지원하는 전수미 변호사(굿로이어스 공익제보센터)는 “북한 형법에는 ‘강제추행죄’가 존재하지 않아 대부분의 탈북여성은 자신이 당한 일이 ‘성추행’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 북한에서 강간죄로 실제 처벌되는 사건은 한 해 5건 미만이다. 여성이 성폭행당하면 ‘여자가 행실이 온전하지 못해서 그렇다’ ‘당신은 몸이 더럽혀진 여자다’ ‘왜 치마를 입어서 그런 일을 당했냐’ 등 여성의 잘못으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논문 ‘북한 사회의 국가, 가부장제, 여성의 관계에 대한 시론’(박경숙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12)을 보면 “(북한에서는) 남존여비가 너무 심하다. 폐쇄된 사회라, 봉건적, 옛날부터 조상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나.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집에서… 한국에 와서 여자들의 지위가 높은 데 대해서 깜짝 놀랐다”는 북한이탈여성(‘복이’씨)의 증언이 나온다. 북한의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의 지위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국가기관 이름으로 노동·성착취”

“이 모든 (수사·재판)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미국으로 떠날까 생각도 했어요. 극단적인 선택도 생각했지만 아들 때문에 차마….” 이씨가 말을 잇지 못했다. 북한이탈주민 사회에서는 세력들이 형성돼 있다. 주로 20~30년 먼저 한국 사회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들이 중심 세력을 이룬다. 이씨처럼 세력 관계에서 벗어나거나 그럴 위험에 처한 이들의 생활은 매우 힘겹다. 전수미 변호사는 “배제된 북한이탈주민들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 월북하거나 외국으로 떠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했다.

북한이탈여성들이 남한 내에서 겪는 성폭행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여성가족부가 펴낸 ‘북한이탈여성 폭력피해 실태 및 지원방안 연구’(2017) 용역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북한이탈여성 158명 중 25.2%가 ‘남한 내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북한이탈주민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두려움에 더해 군인, 경찰, 군무원 등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일 엄두를 못 내 고소조차 못하는 (성폭력) 피해자가 많다. 인권 최후의 보루인 (군사)법원이 이들의 인권을 지켜줘야 한다.”(전수미 변호사)

6월11일 <한겨레21>을 만난 이주영씨는 멈추지 않는 눈물로 호소했다. “기무사 소속이던 정씨는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고 있던 저를 데려다가 보수도 없는 곳에서 노동착취에다 성착취까지 했어요. 국가기관의 이름으로 그런 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지 않나요? 기무사를 알기 전 그때의 제가 그리워요.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남한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다면 정씨를 엄벌해주세요. 제가 믿고 일했던 기무사에서 꼭 사과받고 싶어요.” 7월7일 정씨에 대한 결심공판이 예정돼 있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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