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안 읽을 거예요.”
대법원 판결문을 반으로 꾹꾹 접어 가방에 욱여넣으며 그가 말했다. “1심, 2심 판결문도 안 읽었어요.” 대법원 판결문을 건넨 기자의 민망함을 느꼈는지, 그가 설명을 붙였다. “보기 힘들어요. 어차피 내 이야기잖아요.”
대법원 판결 닷새 만인 5월4일 제주에서 만난 허자연씨에게선 10년의 긴 싸움을 끝낸 후련함도, 끝내 이긴 기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잊고 지내던 현실이 다시 떠올라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4월29일 대법원(주심 대법관 김상환) 판결이 났을 때만 해도, 그는 “좋은 결과가 나와 다행”이라 여겼다. 10년 동안 듣고 싶던 한마디였다. “여성 근로자의 업무에 기인하여 태아에 선천성 심장질환이 생겼다면, 이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 10살 아들이 가진 장애(진단명 ‘폐동맥판막폐쇄’와 ‘심방중격결손’)가 자신의 산업재해 피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태아의 건강 손상 또는 출산아의 선천성 질환을 여성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대법원의 첫 판단이었다.
자연씨는 원래 간호사였다. 공공병원인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던 2010년 아들을 낳았다. 여닫혀야 할 판막은 아예 막혔고, 막혀야 할 벽에는 구멍이 뚫린 채 태어난 아들은 산소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같은 해 자연씨 동료 3명도 심장질환이 있는 아이를 출산했다. 비슷한 시기 임신한 동료 5명은 유산했고, 6명만 선천성 질환이 없는 아이를 낳았다. 업무과 관련이 깊었다. 2012년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연구책임자 백도명)의 역학조사로, 임신한 간호사들이 마스크나 장갑 같은 보호장구 없이 환자들이 먹는 알약을 직접 절구에 빻아 가루로 만드는 과정에서, 태아에게 기형을 일으킬 수 있는 독성 물질을 들이마셨을 가능성이 제기됐다.(제1206호 표지이야기 ‘아이가 죽어야 인정되는 산재’ 참조)
역학조사 보고서가 나온 뒤 근로복지공단은 유산한 간호사의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그러나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한 간호사의 산재 인정은 거부했다. 노동자의 질병이 아닌 아이의 질병을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없고, 엄마와 아이는 별도의 인격체이므로 아이에겐 산재보험급여 수급권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1심(2014년 엄마 승소)과 2심(2016년 근로복지공단 승소)의 판단은 엇갈렸으나, 대법원은 엄마들 편에 섰다. 대법원은 “여성 근로자와 태아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업무상 유해 요소로부터 충분한 보호를 받아야 하고, 출산으로 모체와 단일체를 이뤘던 태아가 분리됐다 하더라도 이미 성립한 요양급여 수급 관계가 소멸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여성 근로자의 업무에 기인하여…”
자연씨는 다른 엄마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대법원의 첫 판결 이후 더 많은 사람이 좀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됐고 혹시 아픈 아이들도 산재 인정을 받게 됐으니” 분명 좋은 일이었다. 혼자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자연씨가 아픈 아들을 포함해 세 아이를 돌보느라, 업무가 과중한 제주의료원을 그만둔 뒤에도 함께 싸워준 동료들 덕분이었다. “제주의료원 선생님들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분들이 있어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고 여기(승소)까지 올 수 있었어요. 같이 고생해준 분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해요.” 담담하던 자연씨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판결이 가슴을 찔렀다. “여성 근로자의 업무에 기인하여 태아에 선천성 심장질환이 생겼다면, 이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 되뇔수록 아픈 문구였다. ‘내가 병원을 다녀서 아이를 아프게 태어나게 했구나.’ ‘내가 한 아이 인생을 망쳤구나.’ 아이의 고통이 오롯이 일하는 엄마의 책임이라고 법원이 “낙인찍는 것”만 같았다. “아기가 선천적으로 아픈 게 유전적 결함일 수도 있고 태교를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엄마는 (원인과 상관없이) 아이를 평생 관리하며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막상 산재를 인정받으니까 확실하게 제 책임이 된 거예요. 개인적으로 더 괴로워졌어요.”
근로복지공단과의 싸움을 후회하진 않지만 “허무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언론과 법조계는 산재 인정 기준을 넓히는 최초의 판례가 만들어졌다고 높게 평가하지만, 아들과 자연씨의 삶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는다. 아들은 비교적 잘 지내지만 1년에 한 번은 검진받아야 하고, 면역력이 약해 감기에 자주 걸리며, 몸에 흉터와 멍을 안고 살아야 한다. 언젠가는 가슴을 열어 인공판막 수술도 해야 한다. 몇 년 전 “허벅지를 통해 시술받으며 고통받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이가 수술받는 것을 상상만 해도 자연씨는 몸이 덜덜 떨린다.
물론 “보상받으려 시작한 싸움은 아니지만” 대법원 판결로 치료비 등을 받을 가능성도 생겼다. 그러나 올해 안에 파기환송심이 열린다 해도, 서울고법이 근로복지공단에 최종적으로 내릴 수 있는 명령이라고는 ‘요양급여 신청을 승인하라’는 것까지다. 요양급여를 어디까지, 어느 수준까지 지급할지는 여전히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에 달렸다.
현재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라 산재를 당한 노동자는 치료비와 함께 요양기간에 매일 평균임금의 70%를 받고 장애가 남으면 장애보상금도 받을 수 있지만, 선천성 질환아에 대한 급여 지급 기준은 없다. 만약 공단의 급여 지급 수준이 너무 낮다고 판단하면 다시 소송해야 할 수도 있다.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동료들도 “많이 지치고 (직장인 제주의료원에서) 힘든 상황이라” 자연씨는 막막하다. 소송 없이 제대로 급여를 받으려면, 곧 열리는 21대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 구체적인 산재 인정 기준, 보험급여 종류, 지급 수준 등을 만든 뒤 이를 과거 사례에 ‘소급 적용’하면 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종착역인 줄 알았던 대법원 판결
제주의료원을 상대로 ‘보호 조치 없이 일을 시켜 피해를 보았다’며 민사소송을 낼 수도 있지만, 자연씨는 아직 마음을 굳히지 못했다. 2018년에도 다른 간호사와 민사소송을 제기하려다가 “정신이 피폐해지고 일상이 무너질 것 같아” 그만뒀다. “민사소송을 하려면 엄마가 아이의 10년을 대하소설처럼 써야 한대요. 10년치 병원기록과 영수증을 다 뽑고,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도 수시로 걸리고,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피해 상황을) 돈으로 낱낱이 계산하고…. 지금도 도저히 엄두가 안 나요.” “종착역인 줄 알았던” 대법원 판결은 엄마에게 또 다른 출발점이었다. 그 앞에 엄마가 혼자 서 있다.
제주=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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