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군 댓글 공작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11월22일 밤 승용차로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겨울이면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사이의 법원로(서울 서초구)에 매서운 칼바람이 내리친다. 언덕에서 부는 바람이 도로 양쪽 건물에 막혀 아래로 내려오면서 바람 세기가 더 강해지며 발생하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법조 출입 기자들은 이를 법원과 검찰 사이 냉기류 탓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영장 발부부터 재판 선고에 이르기까지 법원과 검찰 사이에 벌어지는 첨예한 갈등을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에 빗댄 것이다.
법조타운에 부는 칼바람요즘 법원로에 부는 칼바람은 더 매섭게 느껴진다. 때이른 강추위 탓이겠지만, 법원과 검찰 주변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이 ‘심리적 한파’를 더한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이끄는 ‘적폐 수사’가 최근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생긴 긴장감이다. 더욱이 일선 법원의 요직 중 요직인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이 제동에 앞장선 모양새라 예사롭지 않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은 일선 법원장을 거쳐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으로 ‘영전’하는 자리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그의 판단이 법원 안팎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2016년 2월부터 이 자리를 맡은 신광렬 고법 부장판사는 지난 11월22일 국군 사이버사령부 여론조작 활동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을 구속적부심에서 풀어줬다. 김 전 장관이 구속된 지 11일 만이었다. 신 부장판사는 이틀 뒤인 24일엔 김 전 장관과 함께 구속된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을 석방했다. 둘 다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한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엿새 뒤인 30일에는 역시 구속적부심에서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측근 조아무개씨를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풀어줬다. 신 부장판사는 조씨가 스스로 검찰에 출석했는데도 긴급체포한 것을 문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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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권력형 비리 사건에서 구속된 피의자들이 구속적부심에서 한꺼번에 줄줄이 풀려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당연히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인 검찰은 강하게 반발했다. 검찰은 ‘적폐 수사’ 실무 책임자인 박찬호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 명의로 공식 견해를 밝혔다. 박 2차장은 김 전 장관과 관련자 진술 등으로 혐의가 충분히 소명됐다며, 그의 지시로 활동한 하급자가 이미 실형을 선고받아 군 조직의 특성상 최고위 명령권자인 김 전 장관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형평성 문제와 구속 결정이 이뤄진 뒤 피의자가 석방될 만한 별다른 사정 변경이 없다는 점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전병헌 전 수석의 측근 조아무개씨가 풀려난 것에 대해서는 서울중앙지검 한동훈 3차장 검사가 “긴급체포 적법하게 했고, 그래서 영장전담판사도 영장을 발부한 게 아닌가. 사정 변경이 없는데도 그런 이유로 적부심을 인용하고 석방한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자메시지를 기자들에게 돌렸다.
검찰이 진행하는 적폐 수사의 칼끝은 김관진 전 장관을 넘어 이명박 전 대통령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피의자들에 대한 잇따른 석방 결정으로 검찰이 생각하고 있던 수사 일정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검찰은 그동안에도 법원의 결정으로 수사에 타격을 입었을 때 법원 결정을 조목조목 반박해왔고, 법원은 그것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왔다. 이는 과거에도 있었던 익숙한 모습이지만, 이번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전례와 큰 차이가 있다.
법원 내부조차 비판적 시각‘적폐 수사’ 피의자들을 구속적부심에서 풀어준 신광렬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은 영장전담판사와 법원행정처 심의관 등 법원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겨레
먼저 법원 안에서 신 부장판사의 결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적잖이 있다. 이런 견해는 신 부장판사가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한 다툼’을 이유로 구속적부심을 인용한 것에서 비롯된다. 구속적부심은 그동안 구속 뒤 중요한 사정 변경(폭행·사기 사건 등에서 피의자가 피해자와 합의하는 경우 등)이 없으면 좀처럼 인용되지 않았다. 범죄 성립에 대한 판단은 영장 심사 단계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해당 판사의 판단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되도록 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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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결정은 이 관행을 과감하게 깼다. 형사수석부장이 구속 사유를 따지면서 직제상 아래에 있는 영장전담판사의 판단에 근본적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영장전담판사는 ‘상급자’인 형사수석부장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칫 법관의 독립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을 지낸 한 법조인은 “영장전담판사와 형사수석부장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서로 얘기를 하지 않는다. 재판에 간섭한다는 오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사수석부장이 구속적부심을 인용하면 영장전담판사가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할 때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12월2일 페이스북에서 ‘법조인들조차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을 특정 고위 법관이 반복해서 하고 있다. 그의 권한 행사가 서울시 전체의 구속 실무를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대로 바꾸어놓고 있다’고 언급한 것도 이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사건이 정치권에서 연일 공방을 부른 것도 과거와 다른 점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송영길·박범계 의원 등은 신 부장판사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동향(경북 봉화)이고 같은 대학(서울대 법대), 사법연수원 동기(19기)로서 친분이 있는 점을 들어 ‘정치적 편향성’을 문제 삼았다.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의 구속적부심 재판장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주장은 휘발성이 컸다.
그러자 야당은 신 부장판사의 과거 판결 내용을 거론하며 여당 쪽의 주장을 반박했다. 바른정당 소속 하태경 의원 등은 그가 200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강정구 교수의 1심 재판을 맡았을 때 강 교수를 보석으로 석방했고, 2010년에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당 일각의 주장과 달리, 신 부장판사가 ‘꼴보수’는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법조계에서 신 부장판사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의 결정이 구속적부심 제도 취지에 맞는 것이었음을 강조한다. 영장 심사 단계에선 검찰이 중요한 수사 기록을 법정에 가서야 내놓기 때문에 사전에 이를 얻지 못한 변호사는 피의자를 제대로 방어할 수 없다. 구속적부심은 이런 영장실질심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에 구속 사유에 대한 판단부터 제대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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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검찰이 전병헌 전 수석의 측근인 조씨를 불필요하게 긴급체포했다는 이유로 풀어준 판단에 대해선 김관진 전 장관 등의 석방을 비판적으로 보는 법조인들도 후한 평가를 준다. 조씨는 스스로 검찰에 출석해 긴 시간 조사를 받은 뒤 긴급체포됐다. 신 부장판사는 자진 출석해 신병이 이미 확보된 피의자를 긴급체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긴급체포 제도는 긴급성이 충족될 때 제한적으로 하도록 돼 있는데 검찰이 수사 편의를 위해 이를 남용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번 결정은 검찰 수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검찰이 전례 없이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법원 안에서는 신 부장판사의 결정을 그동안 흐지부지돼온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일선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지난해 말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부터 올해 적폐 수사까지 법원에 많은 사건이 몰리면서 상대적으로 불구속 수사 원칙이 소홀해진 측면이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등부장판사를 지낸 한 변호사도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이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정착시키기 위해 검찰·정치권과 치열하게 싸웠던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이 전 대법원장 재임 초기인 2006년 11월 법원은 론스타 사건을 두고 검찰과 치열한 갈등을 빚었다. 서울중앙지법이 당시 유회원 론스타코리아 대표 등의 구속·체포 영장을 줄줄이 기각하자 수사를 맡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노골적으로 이에 반발했다. 투기자본 론스타의 ‘먹튀’ 논란으로 여론도 영장 기각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뚝심 있게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와 등 외국 유력 언론들로부터 “한국의 사법 시스템이 정치적 여론이 아닌 법에 의해 작동되고 있음이 입증됐다”는 긍정적 평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당시 법원의 판단에 대해선 국내 학계에서도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이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많았다. 실제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에 따르면 ‘구속 상태로 1심 재판을 받은 인원 비율’은 2002년 41.4%를 시작으로 해마다 줄어들어 2011년에는 10.2%까지 낮아졌다.
현재 법원의 결정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그때와 다르다. 2006년엔 법원의 잇따른 석방 결정이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사법 개혁’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며 높은 여론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적폐 청산’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검찰이 이끌어가고 있다. 여론도 김관진·임관빈 구속적부심 석방에 부정적이다. 리얼미터가 12월7일 전국 19살 이상 성인 남녀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잘못한 결정이다’는 63.0%(매우 잘못한 결정 50.8%·대체로 잘못한 결정 12.2%), ‘잘한 결정이다’는 26.3%(매우 잘한 결정 12.6%·대체로 잘한 결정 13.7%)로 나타났다. ‘잘 모름’은 10.7%였다.
등 돌린 여론은 법원의 ‘자업자득’신 부장판사는 피의자 인권 보호와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불구속 수사·재판에 충실하려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의 생각이 여론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법원의 ‘자업자득’이라는 견해도 있다.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법원이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꾸준히 노력했다면 지금 같은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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