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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녀상’ 5천만개를!

전국적 연대의 주역 김서경·김운성 작가 인터뷰 “사회에서 건강한 영향 주고받지 않는 미술은 사기”
등록 2016-03-22 06:32 수정 2020-05-02 19:28



소녀야,  내  손을  잡아


① 수원 평화의 소녀상
② 오키나와섬 미야코지마 아리랑비
③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나비
④ 성북구 한·중 평화의 소녀상
⑤ 소녀상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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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28일 한-일 정부의 합의는 역설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불가역적이고도 최종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오히려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 합의를 거슬러야만 한다는 의지를 일구게 했다. 이 의지가 구체화되고 사람들이 연대하고 힘을 뭉치는 데는 일본대사관 앞 조형물이 큰 역할을 했다.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대사관을 응시하는 ‘평화의 소녀상’이다.

대학생들은 소녀상을 지키겠다고 지난 3월1일까지 63일 동안 노숙농성을 했다. ‘소녀상 이전을 위해 한국 정부가 노력하기로 했다’는 일본 정부의 발표는 오히려 ‘내 지역에도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지난 3월1일에는 부산과 충남 당진에, 3월8일에는 아산에서 소녀상이 세워졌다. 서울 구로·동작구, 경기 안산·오산, 강원 춘천, 전남 목포 등에서 소녀상을 세우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올해가 끝나갈 무렵이면 일본대사관 앞을 중심으로 땅끝마을까지 더욱 촘촘해진 ‘소녀상 지도’가 그려질 것이다.

“기억 지우려는 시도가 움직임 일으켜”
김서경(왼쪽)·김운성 작가가 지난 3월15일 ‘소녀상 전시회’ 마지막 날 대표 작품인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했다. 소녀상을 통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제에 모두가 공감하도록 하는 게 두 작가의 소망이다. 정용일 기자

김서경(왼쪽)·김운성 작가가 지난 3월15일 ‘소녀상 전시회’ 마지막 날 대표 작품인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했다. 소녀상을 통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제에 모두가 공감하도록 하는 게 두 작가의 소망이다. 정용일 기자

‘소녀상 연대’의 산파인 김서경·김운성 작가는 “지난해 12월28일 일본과 한국 정부의 말도 안 되는 합의가 모든 연대와 공감과 싸움의 동력이 됐다”며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가 오히려 기억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도 이에 동참해 지난 1월27일부터 3월6일까지 40일 동안 다음카카오와 함께 각 지역에 소녀상이 세워진 과정과 의미를 소개하는 연재를 했다. 474명이 827만2230원을 후원했다. 이 후원금을 바다 건너 세워질 소녀상 건립 후원금으로 ‘정의와 기억재단 추진위원회’에 전달할 예정이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부부 작가를 3월15일 서울 수송동 갤러리 고도에서 만났다. 이날은 두 작가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힘이 센 상징물’ 소녀상을 거리에서 갤러리 안으로 들여온 소녀상 초대전 마지막 날이었다.

이날 마침 두 작가의 후배인 중앙대 조소과 학생 20여 명이 전시를 관람했다. 김운성 작가는 미술계 후배들에게 “미술을 위한 미술은 가짜라고 생각한다. 사회 속에 미술이 있으면서 건강하게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면 그 미술은 사기다”라고 말했다.

소녀상이 많은 사람을 움직였다. 소녀상의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김운성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조각이 있기 전 할머니들의 시간이 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라고 증언하기 전까지 침묵해야 했던 고통의 46년이 있었다. 증언 이후에도 그림자 취급받고 여전히 손가락질당하며 치열하게 싸워온 25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소녀상은 그 시간을 상징하는 매개로서 작용하는 것 같다. 둘째, 피해자를 대하는 가해자와 한국 정부의 태도다. 그 태도들이 분노를 일으킨다. 치유되지 않은 역사적 상처를 조각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사람들이 구체화하면서 움직이는 것 같다.

소녀상 작업 전 고사 지내소녀상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무엇인가.

김서경   ‘소녀’를 만들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2011년 6월부터 9월까지 석 달 동안 소녀상을 빚는 흙작업을 하면서, 이 조각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공감하기를 바랐다. 개인적 작업을 넘어 할머니의 20년 세월(2011년 기준), 1천 번의 수요집회를 했던 할머니의 고통과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좌대를 없앰으로써 권위를 없앤 것 등은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김운성   얼마나 간절했느냐면, 소녀상 작업 전에 심봉(조각하기 전 각목으로 세우는 뼈대)을 세우고서 고사를 지냈다. 그 전후로 작업하면서 고사를 지낸 적은 없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고통에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를 갖춘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 30곳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지금 준비 중인 곳도 10여 곳이 된다. 소녀상이 지역마다 들어서는 일이 왜 중요한가.

김서경   소녀상을 세우는 과정, 또 세운 이후 주민들과 지역의 변화를 많이 느꼈다. 소녀상 설립 자금을 모금하면서 더 잘 알리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이 문제를 ‘내 것’으로 느끼고 정확하게 알게 된다. 소녀상이 세워진 뒤에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유엔 대사들에게 ‘작은 소녀상’을공적인 공간에 세우는 ‘공공조형물’로서의 소녀상이 아니라 10cm, 20cm, 30cm짜리 작은 소녀상을 보급하는 프로젝트도 크라우드펀딩(https://tumblbug.com/peace)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김운성   1년 전부터 작은 소녀상의 보급을 고민했다. 개인이 이 상징물을 ‘소유’하면 이 상징물이 갖는 의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역사와 정부의 대응에 대해 더욱더 내 문제로 느낄 수밖에 없다. 소녀상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적어도 10명에게는 전파하게 된다.

1년 전에는 돈도 없고 방법도 없었다. 작은 소녀상이라도 금형을 만드는 데만 몇천만원이 든다. 그런데 지난해 12월28일 말도 안 되는 한-일 양국의 합의가 오히려 동력이 됐다. 합의 이후 8개 단체의 20여 분이 모였는데, 거기에는 ‘그레이포인트’라는 피규어 회사,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관계자 등도 함께했다. 우리까지 모여서, 작은 소녀상을 개당 2만원이라는 현실적 가격으로 보급할 수 있게 됐다. 일일이 금형을 뜬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피규어 회사가 결합하면서 일종의 공장 시스템으로 소녀상을 만들 수 있게 된 거다. 수익금은 물론 정의와 기억재단 추진위원회에 모두 환원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46시간 만에 1억원이 모였고 지금까지 2억4천여만원이 모였다.

앞으로 할 작업들은 무엇인가.

김운성  작은 소녀상을 유엔 대표부 각국 대사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전범국가 일본이 점령지로 삼았던 모든 국가의 여성들이 겪은 국제적인 문제다. 작은 소녀상이라는 예술품이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가해의 역사를 지우려는 일본의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우고 싶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는 ‘베트남 피에타’를 세우는 작업도 중요하다. 우리는 피해 국가로서 사과받아야 하지만, 가해 국가로서의 한국은 또 사과해야 한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소녀야, 내 손을 잡아’ 연재를 마칩니다. ‘소녀상’의 의미에 공감하고 후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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