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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녀의 손을 잡아

‘위안부’ 피해 기억하고 연대 다짐하는 성북구의 ‘한·중 평화의 소녀상’ 이름 모를 성북 주민들 덕에 비가 와도 옷 젖을 일 없어
등록 2016-03-10 08:27 수정 2020-05-02 19:28



소녀야,  내  손을  잡아


① 수원 평화의 소녀상
② 오키나와섬 미야코지마 아리랑비
③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나비
④ 성북구 한·중 평화의 소녀상
*각 항목을 누르면 해당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15년 10월28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성북 가로공원에서 한·중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제막식 뒤 역사어린이합창단원들이 소녀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2015년 10월28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성북 가로공원에서 한·중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제막식 뒤 역사어린이합창단원들이 소녀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소녀는 외롭지 않다. 아니, 이 문장은 적절치 않다. 같은 아픔을 겪은 소녀 둘이 같이 있다는 것은 고통의 감각을 오히려 증폭한다.

서울 성북구 한성대입구 전철역 6번 출구에서 나와 길상사 방향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버스 1번을 기다리는 지역 주민들이 분주하게 줄 서 있다. 떡볶이·순대를 파는 포장마차, 잡화를 파는 노점들로 북적이는 길 한쪽에 헐벗은 발뒤꿈치를 땅에 딛지 못한 채 주먹을 불끈 쥔 소녀 둘이 앉아 있다.

두 소녀는 1930년 초·중반부터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군에 끌려다니며 성적 착취를 당했던 과거를 지니고 있다. 한 소녀는 한국, 한 소녀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이 벌인 전쟁 아래 국적과 무관하게 피해자가 됐다.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국제적 아픔을 상징한다. 더불어 국제적 연대를 염원한다.

글렌데일의 소녀상을 보고

한·중 소녀상은 지난해 10월28일 서울 성북구에 세워졌다. 전국 30여 개 소녀상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 소녀와 중국 소녀가 함께 있다. 마침 소녀상 제막식이 열리기 이틀 전, 박근혜 정부 들어 첫 한·일 정상회담을 알리는 뉴스가 전해졌다.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조처’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어왔기 때문에 정상회담 두 달 뒤 ‘불가역적·최종적 해결’을 천명한 12·28 합의가 뒤따를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 못하던 때였다.

한·중 소녀상은 각각 한국과 중국 작가의 ‘결단’과 ‘헌신’ 아래 세워졌다. 2011년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 뒤부터 한국의 대표 소녀상 작가로 활동해온 김운성·김서경 두 작가에게 중국 판위칭 칭화대학 교수와 영화제작자 레오스융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2014년 말이었다.

“미국 글렌데일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중국도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 함께 연대해서 작업해보면 어떻겠나.” 당시는 미국에 세우려던 여러 소녀상이 일본의 조직적인 외교적 방해로 인해 공공부지가 아니라 한인 동포 땅에 세워지던 때였다. 김운성 작가로선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였다. 한국 외교력에 실망하던 때이기도 했다. 결국 한·중 두 작가가 만났고 한·중 평화의 소녀상을 우선 한국에 세우기로 결의했다. 두 소녀상 모두 재료비를 포함해 모든 비용을 작가들이 직접 부담했다. 유일하게 ‘시민 모금’의 도움을 받지 않은 소녀상이 세워졌다.

문제는 장소였다. 적절한 장소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성북구청 1층에 일제에 끌려가기 전 따뜻한 봄볕을 즐기는 소녀를 형상화한 ‘소녀의 꿈’이라는 작은 소녀상을 설치하면서 성북구에 한·중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작가가 직접 의뢰했다. 성북구는 구가 하는 것보다 지역 시민단체나 주민들이 세우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판단해 지역 시민단체에 의뢰했고, 성북아동청소년네트워크가 중심이 된 성북평화운동위원회가 꾸려져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성북구에 자리잡았다.

탈학교 청소년들을 보듬는 인디학교 교장인 송민기 성북아동청소년네트워크 공동대표는 교육단체들이 중심이 돼 성북구에 소녀상을 세운 데 대해 “‘위안부 문제’의 피해 당사자는 나이로 따지면 우리가 보듬어야 할 청소년 시기였다.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외면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구로구, 도봉구, 강북구, 동작구

작가들의 소녀상 ‘기증’으로 모금의 부담을 던 성북평화운동위원회는 성북구 소녀상과 함께 지역 주민들이 위안부 문제를 좀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문화행사 기획을 맡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이기호 한신대 교수·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등의 특강을 마련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책 를 그린 권윤덕 작가의 평화그림책 전시회, 작가와의 대화 등을 통해 어린이부터 학부모까지 고르게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지난해 12월15일에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강허달림, 김반장 등 뮤지션을 초청해 성북마을극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평화콘서트를 열었다.

오는 4~5월에는 영화 을 비롯한 여성 인권·평화와 관련한 영화들을 공동 상영하는 ‘성북평화인권영화제’도 열 생각이다. 이 영화제 준비 작업은 참여를 원하는 청소년들과 함께할 예정이다. 송민기 교장은 “지역에 소녀상이 생기면서 청소년들이 ‘소녀상 돌봄 활동을 하고 싶다’고 연락 오는 경우가 많다”며 “지역 청소년과 주민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지도와 공감의 정도가 매우 높아졌다”고 말했다.

송민기 교장의 증언에 따르면 성북구 소녀상은 젖은 옷을 입은 일이 없다. “지난해 11월 비가 자주 왔다. 그런데 비가 오고 나면 항상 소녀상이 옷을 갈아입었다. 단체 활동가들이 한 일이 아니었다. 성북 주민들이 소녀들이 젖은 옷을 입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런 지역 사례들에 힘입어 전국에서 새롭게 소녀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서울에서는 구로구, 도봉구, 강북구, 동작구 등에서 소녀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울 구로구에는 지난 1월30일 ‘일본군 위안부 한·일 협상 무효와 구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주민모임 발족식’이 열렸다. 권윤신 구로 평화의 소녀상 주민모임 공동집행위원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구로에서 소녀상을 만들자’라는 제안을 했고, 단체 차원이 아니라 구로 주민 개개인이 참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3월3일 현재까지 1천만원이 주민들의 모금으로 모였다. 3월1일 주민모임이 의뢰한 단체 관람에도 주민 350명이 참여했다.

한·중 소녀 옆에 베트남 소녀도

구로에서는 평화의 소녀상 설치 장소를 결정하기 위한 주민 투표도 최초로 실시했다. 극장 앞 게시대와 ‘구글 독스’를 통한 온라인 투표였지만, 참여를 원하는 주민들의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권윤신 공동집행위원장은 “12·28 한·일 정부 합의가 무효라고 생각하는 주민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정부에 보여주고 싶어 구로구에도 소녀상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서울 외에 경기 안산·양평·군포, 충남 아산, 강원 춘천, 전남 목포 등에서도 평화비를 세우기 위한 지역 주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12·28 합의는 발표됐지만, 시민들의 ‘불복종’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이미 소녀상을 세운 성북구도 한국과 중국 소녀 옆에 또 다른 위안부 피해 국가인 베트남 혹은 필리핀의 소녀를 세우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성북구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국제적 연대를 통한 치유를 꿈꾼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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