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기억하겠다는 시민의 약속

수원 지역 시민 모금만으로 2014년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건립 뒤 지역 피해자 할머니와의 연대 본격화
등록 2016-01-19 14:48 수정 2020-05-03 04:28



소녀야,  내  손을  잡아


① 수원 평화의 소녀상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의 소녀상’은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소녀는 70여 년 전,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하루 수십 명의 일본군을 매맞으며 상대했습니다. 인도네시아·홍콩·싱가포르 등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아시아 전역으로 끌려다녔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져 불태워졌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습니다. 1965년 한-일 협정에 이어 2015년 한-일 합의, 두 차례 정부 간 ‘밀약’은 전시 국가의 성폭력 범죄를 땅에 묻으려 하고 있습니다. 피해국 한국 정부 역시 이 ‘망각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국가폭력에 저항하려는 평화적 몸짓의 중심에 ‘소녀상’이 있습니다. 12·28 합의 무효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의 중심에 소녀상이 있습니다. 이 소녀상은 종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국 40여 곳에 있습니다. 해외에도 3곳 있습니다. 소녀상이 없는 부산에서는 사람이 직접 소녀가 되어 ‘굴욕적 협정 무효’ 피켓을 들고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은 ‘소녀상’과 함께 싸우는 사람들, ‘소녀상’을 통해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려 합니다. 전국 소녀상의 의미, 소녀상과 함께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지역과 해외에 소녀상을 세우고 평화운동과 협정 반대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조만간 시작하는 카카오 스토리펀딩을 통해 모금한 금액을 ‘평화비 전국연대’ 등에 전달하여 더 많은 소녀상을 건립하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_편집자
경기도 수원시청 길 건너 올림픽공원에 있는 ‘수원 평화의 소녀상’은 목과 어깨를 칭칭 둘러맨 세 겹의 목도리로 추울 겨를이 없다. 소녀상과 함께하겠다는 시민의 마음이다. 박수진 기자

경기도 수원시청 길 건너 올림픽공원에 있는 ‘수원 평화의 소녀상’은 목과 어깨를 칭칭 둘러맨 세 겹의 목도리로 추울 겨를이 없다. 소녀상과 함께하겠다는 시민의 마음이다. 박수진 기자

소녀의 목에는 회색 목도리가 꽉 매어져 있다. 어깨에는 연두색, 검정색 숄이 둘러져 있고 머리에는 털모자 두 개가 씌워져 있다. 겨울이 온 것은 소녀를 보면 안다. 꼭 쥔 두 주먹 위에는 등산용 장갑, 털장갑 한 켤레씩이 놓여 있다. 발꿈치를 땅에 딛지 못하는 소녀의 맨발에도 두 개의 털목도리가 감겨 있다. 바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추운 겨울, 오가는 시민들이 소녀에게 전한 마음이다.

소녀는 경기도 수원시청 건너편 올림픽공원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다. 1월12일 오후 2시, 수원에 사는 주부 안재명(52·가명)씨가 소녀상 옆 벤치에 가방을 놓고 소녀상을 5분여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측면에서 휴대전화로 소녀상을 가만히 찍었다. 안씨는 정말 ‘가만히’ 움직였다.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 “이 동네 살아요. 마트에 가다가 종종 소녀상에 들러요. 소녀상이 집 앞 공원에 생기면서 당시에 끌려갔던 소녀들을 생각하게 됐어요.” 안씨는 이전에는 그저 ‘위안부’‘정신대’를 과거에 있었던 일, 책에서 본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한-일 정부 합의가 있고 나서는 여기를 지나다니면서 소녀상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참 미안해요.” 그가 소녀상을 옆에서만 바라보는 이유를 말했다. 안씨에게 소녀상은 아직 살아 있는 피해자 할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석 달 만에 시민 4천여 명 9천만원 기부

수원 소녀상은 2014년 5월3일 세워졌다. 시민들의 모금만으로 이뤄졌다. 2014년 2월,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서울에서 열리는 정기 수요집회에 참석하는 이주현 매원교회 목사의 제안이 있었다. 수원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다. 피해자 할머니를 기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뜻으로 수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수원여성회 등을 중심으로 4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그해 3월1일 ‘수원평화비 건립위원회’가 꾸려졌다. 건립 자금은 시민 모금으로 마련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시민 4046명, 134개 단체가 기부한 9071만5860원이 모였다. 소녀상 건립을 위해 계획한 7천만원을 훨씬 웃도는 금액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도움 없이 시민 모금만으로 세워진 첫 번째 평화의 소녀상이었다.

수원 평화비 건립 기금의 첫 기부자는 김복동·길원옥 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였다. 2014년은 ‘평화의 소녀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이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2014년 5월3일 열린 ‘수원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해 “올해 저 나이는 89세, 이름은 김복동, 할매나비라요”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희망을 상징한다. 전국 27곳 평화의 소녀상 그림자에는 다 이 나비가 새겨져 있다.

“제발 나비들이 많이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면 참 좋겠습니다. 만날 하는 소리지만, 우리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억울하게도 허무하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채 일본군의 노예가 돼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무참하게 끌려다니면서 희생을 당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납니다.” 소녀상 옆에 선 김복동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가 아니라 소녀가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안점순 할머니를 귀찮게 해드리자”

수원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도 이날 제막식에 참석했다. 살던 지역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손가락질 받은 기억 때문에 안 할머니는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다. 제막식에도 오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던 그였다. 그러나 제막식에 김복동·길원옥 할머니가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적처럼’ 참석했다.

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와의 연대가 본격화된 것은 수원에 소녀상이 세워진 뒤부터였다. 수원평화비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은 김향미(43)씨는 “여성운동을 해오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을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다”며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수원평화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후 ‘수원 평화나비’를 결성했다. 소녀상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소녀상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 연대를 하고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돕는 일 등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수원 평화나비에는 다른 평화나비들도 수평적으로 함께하고 있다. 매달 평화의 소녀상 주변 정리를 하고 안점순 할머니에게 손자·손녀가 되어드리는 ‘수원 청소년 평화나비’, 평화비 건립 모금 활동을 하면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공감대를 갖게 된 수원시가족여성회관 직원들로 구성된 ‘가온나래 평화나비’ 등이다. 이들 모두가 안점순 할머니와 친구처럼 지내려 한다.

안점순 할머니는 1928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마포구 복사골에서 살았다. 1941년 13살 되던 해 동네에서 방앗간 앞으로 나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방송을 듣고 엄마와 나갔다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쌀가마 무게 재는 저울 위에 올라간 뒤 무겁다며 그 자리에서 트럭에 태워갔다. 안 할머니는 “13살이라고 말했는데도 덩치가 크다며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끌려간 할머니는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다. 1946년 겨우 귀향해, 노년에 수원에서 조카들과 함께 살고 있다. 평생 홀로 살아 자식은 없다.

세계 전시 피해 여성 돕는 ‘소녀들’

“할머니는 그 시절 이야기를 하시는 걸 싫어하세요. 저희도 잘 묻지 않아요. 가끔 할머니의 상처를 알 수 있는 건 할머니가 바늘을 싫어해 병원 가기를 무서워하실 때예요.” 김향미 사무국장이 전했다. 할머니가 허리가 아프시다고 해 아는 한의사 분을 모셔오려다가 “나는 바늘 같은 거, 찌르는 거 정말 싫다”고 화를 내시기도 했다. 상처가 많은 할머니를 위해 김 사무국장은 “우리가 할머니를 좀 귀찮게 해드리자고 생각하고 할머니를 ‘왕언니’로 모시며 틈날 때마다 찾아뵌다”고 말했다.

1월11일 할머니 생신 때는 수원 지역 초등학생들이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김 사무국장이 방과후 학교에서 진행한 ‘평화의 소녀상 알리기’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쓴 편지다. “아이들이 평화의 소녀상 길 건너편에 있는 홈플러스는 아는데, 소녀상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열심히 설명해줬죠.” 김 사무국장은 “아이들이 수원에도 피해 할머니가 계시다고 말하면 깜짝 놀라면서도 궁금해한다. 평화의 소녀상이 지역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가깝게 만나고 할머니들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법적 배상과 사죄’를 함께 촉구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12·28 합의 뒤 소녀상은 저항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월6일 올해 첫 수요일, 수원 평화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세계행동’이 제안한 세계 13개국 동시 연대 수요집회에 맞춰 수원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졸속 한-일 협의 무효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지역적 연대는 세계적 연대로 이어진다. 수원 평화나비는 지난해 4월부터 필리핀 여성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필리핀 단체 ‘릴라 필리피나’에 매달 100달러씩 후원하고 있다. 필리핀은 ‘일본군 위안부’가 곧 ‘미군 위안부’와도 직결되는 지역이어서 그 용어를 꺼내는 것조차 어렵다. ‘위안부 여성 문제’를 밖으로 꺼내고 피해 여성들이 거리에 나오거나 퍼포먼스를 하는 것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심하다.

세계 전시 피해 여성 돕는 ‘소녀들’

박은순 수원여성회 상임대표는 “소녀상이 수원 지역에 서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깝게 받아들이고 그다음 단계로 이 문제가 국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여성의 문제라는 인식도 함께 생겼다”고 말했다. 이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김복동·길원옥 두 할머니가 밝힌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고 싶다’는 뜻에 따라 2012년 세계의 전쟁 피해자를 지원하는 나비기금을 만든 바 있다. 나비기금으로 콩고 내전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지원해왔다.

광둥·싱가포르·홍콩·인도네시아 등으로 끌려다니며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김복동 할머니는 2012년 ‘나비기금’ 발족 기자회견에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처럼 당한 여자들이 얼마나 아플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중략) 직접 겪어본 나는 알기에 당신들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소녀의 모습으로 서 있는 ‘소녀상’은 이 땅에 기억되지 못하고 등록되지 못하고 사과받지 못한 채 지워진 ‘역사의 피해자’를 상징한다. 더불어 그들을 기억하겠다는 시민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 약속이 싸움의 시작이 된다.

‘수원  청소년  평화나비’  조수근군


“소녀를  눈으로  보니  이건  ‘내  문제’였다”


수원 평화나비 제공

수원 평화나비 제공

경기도 수원에서는 청소년 10여 명이 매달 ‘평화의 소녀상’(소녀상) 돌봄 활동을 하고 있다. ‘수원 청소년 평화나비’ 회원들이다. 조수근(18·사진 뒷줄 왼쪽 두 번째)군도 수원에 평화비건립추진위원회가 꾸려진 때부터 지금까지 3년째 소녀 옆 ‘빈 의자’를 채우고 있다. 소녀상 옆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옆에 앉아 연대하자는 의미를 담은 ‘빈 의자’가 놓여 있다.
조군은 “‘빈 의자’가 놓여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소녀와 함께 사진도 찍고 소녀의 어깨도 잡고 손도 잡아준다. 의자가 비어 있을 때는 할머니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같이 있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 고3이 되는 조군이 학교에서 돌아온 1월12일 밤 10시30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수원에 평화상을 세우는 활동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역사에 관심이 많다. 수원여성회 회원인 어머님이 ‘수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일을 같이 해보면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셨다. 2014년 4월,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열린 정기 수요집회에 참석했다. 수원평화비건립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정기 수요집회였다. (정기 수요집회는 거의 매회 주관하는 단체가 달라진다.) 그때 말로만 듣던 ‘평화의 소녀상’을 처음 봤다. 일본대사관을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슬퍼 보였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수요집회에 참석해서 발언하시는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들은 늙어가시는데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못 받는 현실을 눈으로 보니 ‘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 청소년 평화나비는 어떤 활동을 하나.
한 달에 한 번 일요일마다 모여서 소녀상 주변 청소를 한다. 먼지가 앉은 소녀상을 닦고, 오래된 꽃을 치운다. 그리고 수원에 살고 계시는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댁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고 말벗도 해드린다.
아직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평화의 소녀상이 수원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걸 알리는 활동을 더 많이 하려고 한다. 지난해 8월14일 위안부 할머니 기림일(김학순 할머니가 처음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고백한 날) 행사에서 노래에 맞춰 춤추는 퍼포먼스 등을 했다.
이제 고3이 되는데 매달 평화나비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나.
한 달에 한 번 2~3시간 정도 걸린다. 그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할머니를 위해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하다. 그 시간 동안 책 좀 안 본다고 점수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거다.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이다. 다들 대학에 가서도 끝까지 하자고 이야기한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