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할머니,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올해 아흔여섯 맞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나비’의 소망
등록 2016-02-23 08:18 수정 2020-05-02 19:28



소녀야,  내 손을  잡아


① 수원 평화의 소녀상
② 오키나와섬 미야코지마 아리랑비
③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나비
*각 항목을 누르면 해당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공점엽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작은 소녀상’을 보며 “이것 해남에 만들어지면 만날 찾아가고 기억하고 좋겠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에는 지난해 12월12일 소녀상이 세워졌다. 해남나비 제공

지난해 여름, 공점엽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작은 소녀상’을 보며 “이것 해남에 만들어지면 만날 찾아가고 기억하고 좋겠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에는 지난해 12월12일 소녀상이 세워졌다. 해남나비 제공

“할머니, 세배하러 왔어요.”

2월10일 수요일 오전 11시. 설 연휴 마지막날, 전남 해남 가나안 요양병원 6인실에 공점엽 할머니(96)를 만나러 해남나비 회원 7명이 날아갔다. 이명숙 해남나비 대표를 비롯해 회원 여은영(41)씨와 여씨의 두 아이 여울(7)·여민(6), 그리고 장윤수(15), 김혜리(15), 이수은(15) 등 여중생이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 손주들 왔어요. 둘째딸, 막내딸도 왔어요.” 할머니의 두 눈은 무겁게 닫혀 있기만 했다. 할머니를 폭 덮고 있는 분홍색 담요가 버거워 보일 만큼 할머니의 몸은 작고 얼굴빛은 창백했다.

“홀딱 속아 그 징한 디를 고생한 걸”

잠시 뒤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지난 이틀 동안 기력이 너무 없으셔서 잠을 못 이기세요. 식사도 못하시다가 어제 겨우 아침·저녁에 미음 조금 드셨어요.” 간호사는 주의를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연하장애(음식물을 삼키기 곤란한 상태)가 있으시니 알갱이 있는 음식 드리면 안 돼요.” 할머니에게 드리려고 회원들이 가져간 초콜릿, 빵, 식혜가 모두 주인을 찾지 못하게 됐다.

공점엽 할머니는 1935년, 열여섯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 생존자 할머니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평양을 거쳐 중국 하이청(海城)에 가 8년여간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하얼빈에서 해방을 맞아 해남으로 다시 돌아왔다.

끌려갈 때의 일을 말할 때 할머니의 입에서는 ‘워메, 워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집에 찾아온 잘 차려입은 일본 사람과 마을 이장이 ‘평양 비단 공장에 가 비단 짜고 앉았으면 돈을 많이 벌고, 고생도 하나도 없다’고 할머니의 부모님께 말했다.

“못할 것 같은디라우”라고 말하는 할머니에게 가난했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까이것 눈으로 보믄 알제. 보믄 배와서 하제 뭔 뱃속에서 배와갖고 나오냐? 그런 디라도 들어가서 그런 것이라도 배와갖고 돈벌이도 하고 그라제. 집구석에만 자빠졌을라냐고.” 아버지 말에 “나 죽어도 갈라우, 갈라우” 하고서 떠밀리듯 간 곳에서 할머니는 ‘꿈에도 몰랐던’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 그렇게 생고생을 원없이 해놓응게, 거짓말하고 홀딱 속아놓고 가갖고 그 징한 디를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말을 항가 뭣을 항가.” 위안부 생활이 괴로워 쥐약까지 먹었지만, 금세 발견돼 죽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2013년 광복절을 기념해 이 1면에 다루면서 지역에서 ‘공식화’됐다. “그 전에도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요. 교회는 교회대로, 여성단체는 여성단체대로 간간이 할머니를 찾았어요. 하지만 할머니의 사진과 할머니의 위안부 경험, 그리고 지금의 생활까지 지역 언론에 나오면서 할머니의 존재가 지역에서 ‘공식화’되는 어떤 계기가 됐어요.”(이명숙 해남나비 대표)

할머니를 ‘공식적으로’ 만나고 함께하는 모임도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이명숙 당시 한울남도iCOOP생협 이사장, 박승규 목사, 장경도 원불교 교무, 여은영, 이나미씨 등 5명이 의견을 모았다. 지역 이곳저곳에 소식을 돌렸다. ‘해남에도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가 계시니 할머니를 지지한다는 걸 보여드리자. 그리고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 누구나 함께할 수 있도록 하자’라는 뜻이 모아졌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를 초청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간담회도 열었다. 그렇게 2013년 8월23일 땅끝마을 해남에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나비’(해남나비)가 만들어졌다.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처음으로 존재를 당당히 밝히며 ‘위안부’ 피해 경험을 증언한 때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정대협이라는 단체가 아닌, 지자체 담당 부서도 아닌 지역 주민이 자발적으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를 돌보겠다는 마음을 모은 것이다. 회원은 매년 늘어 현재는 80여 명이다.

해남나비 회원들이 2월10일 공점엽 할머니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소녀상을 찾았다. 박수진 기자

해남나비 회원들이 2월10일 공점엽 할머니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소녀상을 찾았다. 박수진 기자

아들, 딸 자처한 ‘독수리 오남매’

단체의 결합이 아니라 지역 개인들의 할머니 지지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원년 회원 5명은 이러저러한 직함은 다 떼고 ‘독수리 오남매’로 불린다. 할머니의 큰아들, 작은아들, 큰딸, 둘째딸, 막내딸이 되어 공식적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 실제로는 짬짬이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할머니가 황산면 댁에 계시면 할머니 댁으로, 건강이 안 좋아져 목포 병원에 입원하시면 목포로 날아들었다.

봄이면 꽃놀이를 가고, 야유회도 갔다. 할머니가 병원에 계신 동안 필요한 할머니 이불도 갖다 나르고, 병원에 오래 입원하셨던 때는 할머니가 얼른 건강해져 집으로 돌아오시기를 빌며 꽃분홍 벽지로 집 도배를 깨끗하게 하기도 했다. 매년 돌아오는 할머니 생신은 해남나비의 큰 잔칫날이 됐다.

처음에 할머니는 남자들이 오면 긴장하는 티가 역력했다. 낯도 많이 가렸다. 그러나 큰아들, 작은아들을 자처하는 김경도, 박승규씨가 매주 할머니께 날아들면서 낯선 남성에 대한 낯가림도 덜해졌다. 해남나비를 만나면서 전복죽, 과일 푸딩 같은 처음 맛보는 음식들도 좋아하게 됐다. 할머니 인생 아흔셋에 지역사회와의 접점을 찾고 삶이 조금 더 풍성해졌다.

해남나비는 기록도 충실히 한다. 여성의 삶, 할머니의 삶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이명숙 해남나비 대표는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꼭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는다. 다른 해남나비 회원들도 그 뜻을 함께해 할머니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까지 기록하려 애쓴다.

이명숙 대표는 “할머니의 삶, 할머니의 증언, 그 삶을 지켜보고 할머니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이 모두 역사라고 생각한다”며 “해남나비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할머니의 삶을 더 많이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명숙 대표와 그의 큰딸 장푸른씨는 지난해 해남나비 회원들이 찍은 할머니 영상을 토대로 편집해 만든 짧은 다큐 를 만들었다. 영상에는 “보고 싶었소. 그리웁소. 반갑소. 그런 말밖에 할 말이 없소. 오기만 하면 반갑고 안 오시면 기다려지고 보고프고. 보면은 그렇게 기쁘고 반갑고. 안 오시면 오실 참이 되았는데 어찌 이래 안 오시는고 기다려지고”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환대하는 할머니의 몸에 밴 태도가 잘 기록돼 있다. 할머니가 해남나비 회원들이 오면 해주는 인사말 ‘오메 반갑소’가 제목이 됐다. 이 작품은 해남다큐영화제에 출품돼 상을 받기도 했다.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시는 게 아니구나’

‘해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 손을 한 번씩 잡게 해드리자.’ 해남나비의 소박한 목표는 2013년부터 4년째 매주 수요일 할머니와의 만남을 이어가며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에는 새로운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해남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이다.

지난해 3월, 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몸에 마비가 오면서 해남나비 회원들의 마음에 긴장이 감돌았다. 이명숙 해남나비 대표는 “‘할머니가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시는 게 아니구나’ ‘할머니가 우리 곁을 빨리 떠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 ‘내 생활과 밀접한 일’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일본대사관 앞에서 할머니들을 상징하며 열심히 싸우고 있는 소녀상을 떠올리게 됐다. 역시 해남나비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뜻을 모아 지난해 여름 ‘해남평화비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세계 인권의 날인 12월10일 즈음에 소녀상 제막식을 하자는 목표로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모금이 쉽지 않았다. 생협 국수나눔 행사를 열고 수익금을 평화비 건립에 쓰기 위해 해남영화제도 열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삶을 지역민이 직접 느껴볼 수 있도록 지역민이 배우, 스태프 등으로 참가하는 연극 무대도 마련했다. 넉 달여 동안 행사를 기획하는 건 물론,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는 모두 다니며 모금했다. 82개 단체, 638명의 개인들이 보낸 성금으로 마지막까지 어렵게 어렵게 6156만원이 모아졌다. 이 성금으로 지난해 12월12일 땅끝마을 전남 해남군 해남읍 읍관동길 해남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해남 소녀상은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종로 소녀상과 똑같은 모양이다. “소녀상을 세우기로 했을 당시부터 이미 ‘일본이 소녀상 철거 문제를 한-일 간 정부 협상 테이블 안건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럴수록 소녀상을 지켜야 했다. 일본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 모양 그대로 땅끝이자, 이 땅의 시작이기도 한 해남에 세우는 게 의미가 있겠다는 의견이 모였다.”(이명숙 해남나비 대표)

해남나비 회원들은 이제 세워진 지 석 달 되는 소녀상이 지역사회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가깝게 느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여은영 해남나비 회원은 “소녀상이 세워진 공원에는 엄마들이 아기들을 많이 데리고 온다. 젊은 엄마들과 아이들이 소녀상을 보고, 지역에 살고 계시는 공점엽 할머니도, 또 할머니가 겪은 우리의 역사도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장윤수 학생은 “소녀상이 세워지면서 사람들이 해남나비도, 해남나비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수은 학생은 “소녀상을 계기로, 사람들이 잊지 않고 더 많이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암말은 안 되고 싶어”

공점엽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수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이 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할 때 할머니는 “나는 죽어서 남자로 되거나 여자로 되거나 그런 생각은 없고,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말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말이 돼도 수말이 되고 잡소. 내가 여자가 되아서 고생을 이렇게 원없이 해놓으니, 암말은 안 되고 싶어”라는 할머니의 말에서 그 신산한 구십 평생, 징글징글했던 삶의 자락들이 진하게 배어난다.

공점엽 할머니는 2월11일 요양병원에서 해남종합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다. 2월16일 수요일 해남나비 회원들이 찾아갔을 때는 사람들을 알아보고 쑤어간 미음도 드셨다. 이명숙 대표는 그런 할머니에게 간절히 바란다. “할머니 지금 몸이 많이 힘들고 아프시지만 조금만 버텨주세요. 할머니 살아 계실 때 일본 정부가 할머니에게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좀더 노력할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 참고 문헌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 6), 여성과인권, 2004
해남=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