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을 주세요.”
윤지영(29)씨는 2010년 대학을 갓 졸업한 뒤 부모에게 ‘폭탄 선언’을 했다. 김치공장을 차리겠다는 것이었다. 고향인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서 김치사업을 하겠다는 둘째딸의 말에 부모는 기가 막혔다. ‘4년 동안 비싼 등록금 내서 대학 다니더니, 얼마나 못났으면 직장생활도 못하고 고향에 내려왔으려나.’ 이웃의 수군거림이 수런수런 들리는 듯했다.
윤씨는 부모에게 공약했다. “5년 안에 성과 없으면 그때 가서 취업할게요.” 부모는 타일렀다. “직장생활을 먼저 해보는 게….” 윤씨는 다짐했다. “안정적인 생활에 익숙해지면 도전하지 못할 거 같아요.” 부모는 더 막지 못했다. 윤씨는 다음날부터 부모의 뒤를 따라다녔다. 방앗간을 하면서 고추농사를 짓던 부모에게 농사를 배웠다. 3년 내내 그리했다. 대학생 ‘먹물’이 빠지고 소매춤마다 ‘흙물’이 스몄다.
윤씨가 김치사업을 꿈꾼 건 대학 3학년 무렵. 부모는 다달이 서울 서초구청·영등포구청에서 열리는 직거래장터에 김치를 팔러 상경했다. 어머니가 버무린 김치를 사람들은 줄을 서서 샀다. 언젠가 김치사업을 크게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전공인 관광경영학 교수님의 한마디가 윤씨의 마음에 용기를 새겼다. ‘취업하는 것보다 창업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삶이 더 보람될 수 있다, 실패해도 젊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한 기업의 최종 면접을 통과했지만 출근길이 아닌 고향길을 선택했다.
농업은 만만치 않았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윤씨는 충남도청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도에서 시행하는 각종 농업교육을 닥치는 대로 들었다. 비아냥거림도 들었다. 미니스커트 입고 찾아와서는 무턱대고 농업을 배우겠다는 아가씨에게 누구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부모의 농사를 도우며 한국벤처농업대학을 다니고 청양군 농업인대학 농산물 가공 과정 1년도 마쳤다.
반전이 찾아왔다. 2012년 9월 한 공무원이 서류 한 장을 윤씨에게 건넸다. 제조업인 2차산업을 중심으로 1차산업(농업)과 3차산업(서비스업)을 이끄는 ‘6차산업’ 기업 설명회였다. 농가 20곳 이상이 참여하는 6차산업 기업을 충남도에서 ‘두레기업’으로 지정해 창업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김치사업을 꿈꾸던 윤씨에게 맞춤한 기회였다.
시간이 문제였다. 농가 20곳에서 2억원 넘게 출자를 받아야 했다. 서류 심사도 채 한 달이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윤씨를 봐온 이웃 할머니·할아버지들을 찾아 사업계획을 설명했다. “수확한 고추를 팔러 청양 읍내 장까지 나가야 하는데 너무 멀다.” “누군가 대신 팔아주면 좋겠다.” “값이 너무 내려가 걱정이다.” 알찬 농산물을 수확하고도 판매하는 일에서 농촌 어르신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똑순이’처럼 설득하기 시작했다. 김치공장을 만들어 고추·배추 등속을 납품해주면 고정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투자금을 허공에 날리지 않도록 수익을 내어 어르신들 손에 배당금을 쥐어드리겠다고도 했다. 처음엔 탐탁지 않아 하던 어르신들도 조금씩 귀를 기울였다. 윤씨가 출자한 3천만원에 주민 23명이 보탠 돈을 합치니 모두 2억400만원에 이르렀다.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꾸리는 기업창업을 준비하면서 생각도 바뀌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마음보다,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재료 삼아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기업을 꾸리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사업계획서를 만들면서 조사해보니, 정산면 백곡리 주민들의 가구당 연평균 소득이 1400만원가량이었다. 칠순·팔순 넘는 노인들이 새벽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품앗이를 해서 4만원 안팎을 벌고 있었다. 겨울철에는 그나마 벌이가 끊겼다. 중노동을 해도 한 달 벌이가 100만원을 조금 넘는 농촌 현실에서 두레기업이 새로운 활력을 만들고 성장동력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됐다.
윤씨가 창업한 김치공장 ‘미녀와 김치’는 서류와 발표 심사, 현장 평가 등을 거쳐 충남도 두레기업 1호로 선정됐다. 두레사업 지원비 8억여원을 받게 됐다. 권오성 충남연구원 6차산업화센터장은 “지역 특산물인 맥문동을 이용해 김치를 제조한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고, 김치 판매 수익으로 3차산업에 해당하는 김치 테마파크를 조성하겠다는 비전도 뚜렷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 396m² 크기의 공장을 세우고 기공식을 했다. 그러나 첫 달 매출은 0원이었다. 판매망을 뚫어야 했다. 서울의 구청들 앞에서 열리는 직거래장터, 인터넷 쇼핑몰, 한식당 등을 동분서주하며 ‘미녀와 김치’를 알렸다. 열매가 하나둘 맺기 시작했다. 지난 6월에는 충남 천안의 한 백화점과 판매계약도 맺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김치 5t을 꾸준히 생산한다. 두레기업 지원금도 지난해에 마무리됐으니 올해는 완전한 홀로서기의 해다.
돈보다 귀한 건 깨달음이었다. “고추를 어떻게 심고 잡초를 어떻게 뽑고 이런 것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걸 느꼈어요. 6차산업 기업인 두레기업의 특성상 제조·서비스도 해야 하니까 공장도 짓고, 쇼핑몰도 만들고, 직거래장터에서 영업도 하죠. 또 마을기업이니까 다른 기업보다 직원들과 더 각별한 점이 있어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옆에 계셨던 이웃 분들이 직원인데 많게는 80대 중·후반 할머니, 적어도 50대 후반 아주머니들이세요. 스물세 분이 저를 믿고 출자해주셨으니 최대한 이분들의 뜻을 반영하려고 해요. 비록 사업 경험은 없으시지만 삶의 경험은 저와 비교할 바가 아니잖아요. 김치 재료 손질이나 담그는 법에도 저보다 정통하시고요.”
모든 농촌의 골칫거리인 판매 문제에 6차산업이 돌파구가 된다는 것도 확신하게 됐다. 적은 양일지언정 주민들이 마을기업에 생산물을 납품하게 되면 소득이 안정화된다. 가공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다. ‘미녀와 김치’ 출자자이자 직원인 박평란(71) 할머니는 흐뭇해했다. “덥지 않은 오전에는 내 고추밭에서 일하다가 해가 뜨거워지면 공장으로 가서 시간제로 일한다. 용돈벌이 수준이긴 하지만 혼자 농사만 짓는 것과 비교하면 벌이는 나아진 셈이다”라고 했다. 충남도 또한 힘을 보태고 있다. 지역경제를 이끌고 관광·체험 행사로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농어촌 6차산업에 계속 정책적 지원을 할 참이다.
장년·노년·청년이 농촌에서 힘을 합치면!지난 5년, 고향에서 윤씨가 움켜쥔 것은 농촌이 부흥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젊은이들이 장년·노년과 힘을 합쳐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이 바로 6차산업이라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올해 주요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도 농어촌 6차산업화 추진이다.
지난 8월14일 만난 29살 윤 사장은 또래 젊은이들에게 농촌의 희망을 거듭 말했다. “‘6차산업’이라는 말만 없었지 직접 농사짓고 판매하고 주말농장 체험 행사를 여는 일 모두 예전부터 농촌에서 해오던 거예요. 선배 농민들의 노하우를 이어받아 후배 농민들이 더 많이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윤씨의 ‘미녀와 김치’는 지난해 매출액이 2천만원 정도였다. 올해는 반년 만에 2천만원을 훌쩍 넘겼다.
청양=이지민 교육연수생 aaaa3469@naver.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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