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오덕 선생님이 쓴 를 읽으면서 크게 반성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한자나 영어를 쓰는 것이 대중들에게 책을 읽을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이전의 번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알기 쉬운 우리글로 바꾸어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중략)
더욱이 기존의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은 대체로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소련이 패망한 1990년 전후로 모두 ‘마르크스주의는 죽었다’고 하면서 여러 갈래로 도망갔기 때문에, 나이가 좀 덜 먹은 정의감에 넘치는, 연애도 결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활기찬 젊은 층에게 ‘자본주의체제는 바로 이렇다’고 호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될수록 쉬운 우리글이 되도록 노력했다는 점을 다시 밝힌다.”
고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남긴 의 2015년판(비봉출판사·발행 예정) 역자 서문 가운데 일부다. 어떻게 하면 우리글로 좀더 알기 쉽게 쓸 수 있을까, 그리하여 젊은 층에게 널리 읽히는 책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마지막까지도 고민했다. “모두가 함께 사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과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비는 마음에서다.
일흔이 넘은 노학자는 마지막 정력을 번역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진짜 ‘마지막’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2015년 5월 천안시 입장면에서 김수행 씀’이라고 끝맺은 역자 서문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이 되었다. 그는 완전 개역판이 세상에 출판되는 걸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한국 마르크스 경제학의 ‘큰 별’이 졌다. 김수행 석좌교수가 지난 7월31일(한국시각 8월1일 새벽 1시30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 그는 미국에 사는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장례는 8월3일 미국에서 치러졌고, 국내에는 8월4~7일 성공회대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고 김수행 석좌교수는 국내 대표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자다. 카를 마르크스의 을 1990년 국내 처음으로 완역했고, 등 60종이 넘는 저서와 논문, 번역서 등을 남겼다. 책상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서울대·성공회대 등 대학 강단과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의 ‘벙커 원’ 강연 등을 통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2015년판은 8월 말께 인쇄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1989년 비봉출판사의 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뒤 26년 만에 가장 큰 변신이다. 고 김수행 석좌교수는 1991년 1차 개역, 2001년 2차 개역에 이어 세 번째로 글 전체를 쓰다듬고 매만지는 작업에 나섰다. 26년째 변함없던 ‘주황색’ 표지 디자인도 새롭게 바꾸기로 했다.
“8월 중순에 한국에 돌아오면 마지막으로 쭉 한번 훑어보고 8월 말에 책을 내자. 이게 마지막 전화 통화였다. 우리가 표지 디자인 6개 시안을 보냈더니 그중에서 이 파란 바탕을 골랐는데 그게 마지막 부탁이 될 줄이야.” 지난 8월5일 만난 박기봉 비봉출판사 대표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표지 디자인 시안을 휴대전화로 보여주며 안타까워했다. 박 대표는 고 김수행 석좌교수의 서울대 경제학과 5년 후배로 번역과 출판 작업을 함께 했다.
과 고 김수행 석좌교수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다. 김수행이라는 이름을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린 계기도 번역이었다. “그런데 을 번역한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불만인 것은, 마르크스는 천지를 진동시킬 이론을 발견하는 데 일생을 보냈는데, 나는 왜 마르크스의 책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데 일생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2001년 6월 ‘제2차 개역에 부쳐’) ‘불만’이라고 한탄하면서도, 그는 번역과 해설 등의 연구 작업에 일생을 바쳤다.
왜 정부는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는가그는 어린 시절 가난했다. 육남매의 장남이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고민했다. 장학금으로 대구상업고등학교를 겨우 마쳤으나, 가정 형편상 대학을 포기하고 취직하는 것이 마땅했다. ‘왜 우리는 가난한가’ ‘왜 사회와 정부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교사가 되어 집안을 돕겠다는 큰누나와 학비를 보조해주겠다는 대구상고 덕분에 1961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불온사상’인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첫째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겪었던 가난 때문이었고, 둘째로 영국 유학 시절에 느꼈던 영국 사회의 진보성 때문이었다.”( 1992년 11월26일 ‘나의 삶, 나의 생각’ 참조)
대학 입학 뒤 그는 마르크스를 처음 만났다. “경제학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무슨 소리인지,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일본 책으로 마르크스를 처음 공부했지.”(2013년 ‘국제코뮤니스트 전망’ 인터뷰) 서울대 경제학과 연구서클이던 ‘경우회’에서 만난 신영복, 김근태 등의 선후배도 그에게 학문적인 자극을 주었다.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인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보름간 ‘남산’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평소 집 근처에 살아 가깝게 지내던 신영복 선배에게 레닌의 와 소설책 등을 빌려 읽었다는 이유였다. 다행히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외환은행에 입사하게 된다.
결혼 뒤 외환은행 런던지점으로 발령받은 그는 1972년 영국 런던에서 인생의 2막을 맞이한다. “동일한 자본주의 체제이면서도 이렇게 다른 사회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학문·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돼 있고, 교육과 병원은 완전 무료고, 저소득층을 위해 주택을 싼값으로 공급하고, 실직자에게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사표를 내고, 아내가 대신 밥벌이에 나섰다. 공부에 몰두한 끝에 1982년 런던대학버크벡칼리지에서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1982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한신대학교에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마르크스주의를 학문적으로 재건하는 작업에 나섰지만, 고 정운영 교수 등과 함께 총장 불신임 운동 등을 벌이다가 1987년 학교를 떠나게 된다. 번역을 제안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 번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수행 석좌교수에게 가서) ‘영국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으니 형이 번역해야 한다. 언제 출판될지는 몰라도 일단 번역이라도 끝내놓자’고 설득했다. 원고를 번역해서 갖고 있다가 발각되면 위험했던 시절이라, 간첩 접선하듯이 번역된 원고를 조각조각 받아와서 봉투에는 다른 제목을 써놓고 지인 집에 보관해뒀다.” 박기봉 대표의 회고다.
고 김수행 석좌교수의 기억도 비슷하다. “번역을 시작한 시기가 1984년경인데, 이때는 아직 이 불온서적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번역’이었고, 따라서 과연 번역된 책이 출판될 수 있을까가 미지수였습니다.”(1992년 교육방송, 정운영-김수행 에 관한 대담)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던 ‘선생님’이렇게 해서 1989년 2월 1권(상)이 세상에 등장했다. 앞서 1988년 9월 1권을 번역해 출간했다는 이유로 이론과실천 출판사 대표가 구속된 이후의 일이다. 고 김수행 석좌교수는 이 출판사 대표의 구속적부심에 ‘구속이 부당한 이유’를 써내기도 했다.
“이 책을 번역해야지 하면서도 선뜻 착수하지 못했던 이유는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7년 6월의 시민항쟁 이후 학문과 사상의 공간이 점차로 넓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 위에 이 번역도 가능하게 됐다.”(1989년 2월 ‘번역자의 말’ 중에서)
해방 이후 국내에 출판된 의 한글판은 몇 종류가 있다. 1947년 서울출판사에서 전석담·최영철·허담 옮김으로 이 출판됐으나, 전체 번역은 아니었다. 비봉출판사는 1990년 1(상·하)·2·3권을 모두 완역해 출간했다. 이론과실천도 비슷한 시기에 3권을 모두 펴냈으나, 마지막 3권 출간이 비봉출판사가 조금 일렀다고 한다. 고 김수행 석좌교수를 해방 이후 국내 첫 ‘완역자’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1989년은 그에게 또 다른 기념비적 해였다. 최초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서울대학교 교수에 임용됐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이 강의를 듣는 대신 학교 안을 돌아다니면서 “정치경제학 교수를 즉각 영입하라”고 구호를 외치고 수업을 거부하는 등 학교를 압박한 덕분이었다.
그는 2008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하기까지 꾸준히 글을 쓰고, 세상과 소통했다. 특히 제자들은 소탈하고 인간적인 선생님으로 김수행을 기억한다. 그의 정년퇴임 때는 후임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자를 임용해야 한다는 서울대 안팎의 논란이 일었지만, 그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42년 출생
1961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 외환은행 입사해 영국 런던 지점 파견
1975~82년 런던대학교 정경대학에서 공부 시작, ‘마르크스의 공황 이론’으로 박사 학위
1982~87년 한신대 교수로 재직, 학장 불신임 사태로 사직
1989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임용
1989~90년 (비봉출판사) 1~3권 한국 최초 완역
2008년 서울대 정년퇴임, 성공회대 석좌교수
2015년 8월1일(현지시각 7월31일) 별세. 향년 73
“(1980년대) 마르크스의 은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에 나오는 꼭꼭 감춰진 금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글판이 나옴으로써 을 읽었다는 사실, 심지어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여받았던 권위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금지와 억압으로부터 파생되는 에 대한 욕망은 사라져버렸다. 사회주의 혁명을 기표로 삼았던 수많은 386세대들은 새로운 말들을 찾아 앞다투어 떠나갔다. (중략) 섬광처럼 짧게 빛났던 마르크스 르네상스는 곧 사라졌고 다시금 새로운 기표를 향한 끝없는 여정이 시작되었다.”(류동민 중에서)
1988~89년 서울대 경제학과 석사과정에 있으면서 교수 임용 시위에 관여했던 류동민 충남대 교수는 “한 분(김수행 석좌교수)이 경제학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고전을 책임지고 번역한 뒤에 꾸준히 개정한 작업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신영복 “그의 글이 있어 조금 덜 슬프다”그러나 ‘새로운 기표’를 향한 그의 여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5년판 역자 서문에서 고 김수행 석좌교수는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부자를 위한, 부자에 의한, 부자의 정치”와 “지금 막다른 골목으로 떠밀리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걱정했다.
특히 “ 제1권의 출판 150주년이 되는 2017년에 앞서서 나의 정력이 남아 있는 지금 미리 축하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2017년을 함께 축하할 그는 떠났지만, 그가 정력을 쏟은 책은 남았다. “대한민국의 훌륭한 석학을 잃었지만 그가 번역한 책이나 쓴 글이 세상에 많이 남아 있어 좀 덜 슬프다.”(8월4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추모사)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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