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가 물질적 조건에 관한 이야기라면, 2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신적·심리적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빌려 확인해보고자 했다. 사회학의 연결망 분석, 심리학의 자유연상검사 모형 등을 차용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심리는 막연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안, 분노, 소외 등 부정적 감정에 쏠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_편집자
“우리 막둥이랑 이름이 같네요.”
박영봉(52)씨가 휴대전화 바탕화면을 내밀었다. 얼굴이 해말간 소녀가 웃고 있다. 소녀의 이름은 기자와 똑같이 예랑. ‘예수 사랑’의 준말이다. 박씨는 벌이를 위해 휴대전화를 2대 들고 다닌다. 다른 휴대전화 속에는 대여섯 살 됨직한 여자아이가 웃고 있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딸 한솔이다. 아빠는 ‘딸 바보’다.
남다른 딸 사랑에는 이유가 있다. 예랑이는 14살이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어, 어, 어….’ 외마디 탄성이 예랑이가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소리의 전부다. 염색체 결함으로 나타나는 ‘안젤만증후군’. 돌이 갓 지난 아이의 정신세계에 머물고 있는 예랑이는 항상 천사처럼 웃는다. 아빠는 특수학교에서 돌아온 막둥이 예랑과 함께 저녁을 먹고서야 출근한다. 대리운전 기사인 아빠는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운다.
8년 전, 대리운전 일을 시작한 계기도 따지고 보면 딸 사랑 때문이다. 딸 한솔이에게 휠체어와 보조기는 몸의 일부나 다름없다. 1994년 돌이 지나도 걷질 못해 병원에 갔더니 근육병이라고 했다. 1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던 아빠는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보험, 중고차 매매 영업 등 투잡, 스리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근육병에 좋다는 약과 치료를 쫓아다니느라 매달 수백만원이 깨졌다. 아빠는 음향기기 제조업체를 차리는 모험까지 감행했다. 하지만 사업이 망하면서 박씨는 파산했다. 집에는 빨간 압류 딱지가 붙었다. 그리고 딸 한솔은 10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그 모든 시련이 잇따라 닥쳤다. 아빠는 사망보험금 10억원이라도 남겨주겠단 마음으로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살아난 아빠는 대리운전 기사로 나섰다. 신용불량자인 40대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다.
아빠는 대리운전 일이 고맙다. 사업 실패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 운동회 때 구두를 신고 뛰었어요. 운동화 한 켤레 사줄 형편이 안 돼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의 생채기는 그대로다. 이자율 25~30%짜리 대출로 돌려막기를 하는 삶도 그대로다. 그래도 대리운전으로 번 돈은 압류가 안 들어온다. 딸에게 운동화도 사줄 수 있었다.
대리운전은 불안정 노동의 대명사다. 지난 3월11일 저녁,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만난 박씨는 거리를 서성였다. 영하 5℃의 꽃샘추위는 어둠이 짙어질수록 살을 에었다. 그러나 웬만해선 건물 안이나 지하에서 바람을 피하지 않는다.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편이 낫다. 하늘 지붕을 내려놓는 순간, 휴대전화 2대에 깔아놓은 대리운전 업체 ‘배차 프로그램’의 위성항법장치(GPS)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탓이다. 그러면 주변에서 대리운전 기사를 찾는 손님의 배차 콜도 제때 잡을 수 없다. 손님이 뜸해지는 새벽 1시까지는 한시도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박씨는 스스로 비정규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그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리운전 기사는 대부분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된다. 대리운전 업체에서 건당 수수료를 받는 개인사업자라고 보는 것이다. 손님이 대리운전비로 2만원을 지급하면, 기사가 실제 손에 쥐는 돈은 1만~1만2천원 정도다. 대리운전 업체는 20~25%의 수수료를 떼어간다. 10%는 오가는 교통비로 쓴다. 박씨는 교통비를 아끼려 첫차가 다닐 때까지 길에서 밤을 지새운다. 프로그램 사용비도 다달이 낸다. 사고 발생시 보험 적용 명목으로 각 업체에 연 90만원씩 보험료도 내야 한다. 4대 보험은 물론 없다. 박씨는 “몸이 아픈 날이 쉬는 날”이다. 주 7일 동안, 어떤 날은 하루 18시간씩 독하게 일한다. 그래야 월 200만~250만원을 번다. 대리운전 기사의 평균 월소득은 150만원 안팎이다. 전국 7천여 곳으로 추정되는 대리운전 업체가 난립하면서 건당 대리운전비는 5천~1만원가량 인하됐다.
“‘비정규직’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냐”고 박씨에게 물었다. “더럽다, 억울하다.” 수도권 대리운전 프로그램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로지’는 최근 밤 9~12시에 자사의 콜 2건을 수행해야 자정이 넘어서도 차량을 우선 배차해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다른 회사의 콜을 잡았다가는 자정 넘어 공치기 십상이다. 대리운전 기사들이 이를 거부할 권리는 없다. 배차받지 않을 콜 내역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벌금 500~1천원을 내야 한다. 대리운전 업체들의 갑질이다. 하지만 대리운전 기사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해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는 이런 삶이 “너무 불안하다”. 대리운전을 하다가 사고로 죽어도 어떤 보상도 없다. 불안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비정규직 한 개인만의 기구한 사연이 아니다. 의 ‘2015년 비정규직 1070명 심층 실태조사’에서는 비정규직들 가슴속에 길게 드리워진 불안의 그림자가 확인된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자유롭게 적어주세요”라는 주관식에 모두 957명의 비정규직이 응답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러한 심리 상태가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지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였다.
비정규직들이 적어놓은 단어나 문장들은 하나같이 위태로웠다. 이를테면 이런 응답이 나온다. ‘비만, 비굴, 비인간적, 비통, 비극, 비수, 비지땀, 비밀, 비중, 비리, 비판’. ‘아닐 비’(非)로 구분지은,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태생부터 부정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은 비정규직들이 응답한 단어 또는 문장 뒤에 흐르는 감정의 실체를 좀더 과학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했다. 불안과 분노, 좌절과 두려움, 서러움과 억울함, 정규직과 사회 일반에 대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부러움. 단어들 속에 담긴 여러 가지 뒤엉킨 감정들 속에서 비정규직 전반이 느끼는 공통의 정서를 길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통계 분석을 위해 비정규직 957명이 적어준 단어 또는 문장을 1차 분류했다(80쪽 참조). 비슷한 의미의 단어군은 1개의 대표 단어로 묶었다. 그렇게 총 299개의 단어가 걸러졌다. 인식 비교를 위해 정규직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의 도움을 받아 정규직 1634명의 응답 표본을 확보한 뒤 비정규직과 동일한 분류 방식으로 총 312개 단어를 뽑아냈다.
이 1차 데이터를 바탕으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소장 장덕진 사회학과 교수) 연구팀이 단어 언급 빈도를 집계하고, 단어 간에 동시 언급된 비중을 따지는 연결망 분석을 진행했다. 비정규직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 1위와 2위는 저임금(11.2%), 고용불안(9.2%) 등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를 표현한 단어다. 정규직 역시 불안(17.6%), 불안정(8.6%) 등을 가장 많이 떠올리긴 했다. 하지만 언급 빈도 3~5위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인식이 확연하게 갈라진다. 비정규직은 차별(7.2%)·노예(4.1%)·불안(3.1%)을 생각했지만, 정규직은 계약직(7%)·고용불안(4.5%)·아르바이트(4.2%)를 떠올렸다(82~83쪽 참조). 같은 단어라도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배제의 언어로, 다른 누군가에겐 담담한 현실사회의 언어로 수용된다.
광주에 사는 김나라(16·가명)씨는 “휴대전화 녹음 기능을 꼭 메인 화면에 둬야 하는 사람들”로 비정규직을 정의했다.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탓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친구와 자취하는 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다. 시급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4천원. 하루 5시간씩 일해봤자, 이번 달엔 40만원 남짓 손에 쥘 듯하다. 월세 12만원을 내고 나면 생활이 막막하다. 식사는 편의점 음식으로 때운다. 스무 살이라고 속이고 취업했던 식당 일은 시급 6천원을 받았지만, 근로계약서를 써달라고 하자마자 해고됐다. 나라씨는 “항상 불안하다”.
결혼 포기, 자녀 포기, 비정규 국민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한 현실, 불안정한 노동은 감정을 위태롭게 한다. 비정규직들의 응답에는 극단적인 부정의 단어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일회용, 언제든지 갈아끼우는 부품 등을 대표하는 단어 ‘소모품’(1.2%),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는 ‘미래 없음’(2.1%), ‘희망 없음’(0.9%) 등등. LG유플러스 애프터서비스(AS) 기사인 심용우(43)씨는 비정규직이란 단어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비정규 국민이란 마음이 들고, 해외로 이민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썼다. 고등학교 졸업 뒤 인터넷 통신업계에서만 15년 동안 일했지만, 그는 일터에서 멸시받는 비정규직일 뿐이다. 그는 미래가 없는 이 땅이 싫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인 이진환(35)씨는 “불법파견, 차별, 저임금, 개고생, 파리목숨, 바지사장, 노총각”이라고 썼다. 주변에는 40살 넘은 노총각 동료들이 수두룩하다. 비정규직이라고 하면 맞선 시장에서는 퇴짜 맞기 일쑤다. 결혼해도 아이는 안 낳거나, 1명만 낳는다. 결혼 포기거나 자녀 포기다. ‘차별’은 정규직과 같은 공장,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기에 더 크게 느낀다. 2013년 주간 연속 2교대제 도입 전에 비정규직은 통근버스도 못 탔다.
이씨가 나열한 여러 개의 단어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이번에는 단어들 간의 연결망 분석을 해봤다. 비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동시에 언급한 단어들의 빈도를 따져본 것이다. 299개 단어 가운데 10회 이상 언급된 단어 48개를 대상으로 연결망을 분석했다(84쪽 참조). 예를 들어 이씨가 언급한 ‘차별-저임금’은 총 80회나 동시에 언급됐다. 정규직보다 적은 임금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는 비정규직이 많기 때문이다. ‘차별’이라는 단어는 정규직(26회), 무시(16회), 박탈감(15회), 인격(인간 대접·11회), 을(갑을 관계·11회) 등의 단어들과 쌍으로 많이 등장했다.
를 쓴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 교수는 불안정 노동자(프레카리아트)들이 일상적으로 안고 사는 감정을 ‘4A’라고 칭했다. “프레카리아트는 네 가지 A를 경험한다. 불안(Anxiety), 분노(Anger), 소외(Alienation), 아노미(Anomie)가 그것이다.”
차별·박탈감 등이 소외를 나타내는 단어라면, 분노는 좀더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죽음(자살)처럼 객관을 가장한 단어로 표현되거나, 적나라한 욕설로 응답된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인 김문석(39)씨는 비정규직을 “재주는 곰이 부리고의 곰”이라고 표현했다. 2000년부터 삼성전자의 프린터·팩스·복사기 등을 고치러 다닌 그가 ‘재주’를 넘으면, 돈은 협력업체 사장과 삼성이 챙겨간다. 발랄해 보이는 응답 뒤에 깔려 있는 감정 상태는 분노다. “삼성전자서비스 로고가 박힌 작업복을 입고 일하러 가면 다들 ‘연말에 보너스 많이 받으시겠네요’ 하고 물어요. 우리가 비정규직인 줄 모르는 거죠.” 그런 서러움을 겪으며 일했지만, 삼성은 김씨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서 동료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런데 삼성은 죽어도 노조는 안 된대요.” 초일류기업 삼성을 향한 분노다.
부정적 단어가 쓰인 비중 85.5%이같은 분노는 자칫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응답한 단어에 나타난 비정규직들의 ‘심리적 위험도’를 따져봤다. 김대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국장(응급의학과 임상 조교수)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응답 1차 데이터 중에서 5회 이상 언급된 단어들을 ‘긍정’ ‘중립’ ‘부정’ 3단계로 분류했다. ‘중립’은 해당 단어를 문장에 넣었을 때 긍정·부정 모두 쓰일 수 있는 단어다. 정규직, 일용직, 노동시간, 아르바이트, 대한민국, 휴일, 정부와 같은 단어들이다. 비정규직은 75개, 정규직은 50개 단어가 추려졌다(82~83쪽 참조).
비정규직의 경우엔, 부정적 단어가 쓰인 비중이 85.5%(2014개 중 1723개)에 이르렀다. 정규직은 이보다 10% 이상 낮은 74.9%(1366개 중 1023개)였다. 중립적인 단어에서도 차이가 났다. 정규직은 주로 비정규직을 객관화해서 바라본다. 23.2%(317개)가 중립적인 단어로 비정규직을 표현했다. 반면 비정규직의 중립적인 단어는 13%(262개)밖에 되지 않았다. 긍정적 단어는 정규직·비정규직 모두 2%에 미치지 못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응답군의 차이를 통계학적으로 더 엄밀하게 파악하기 위해, ‘카이제곱’ 방식으로 검증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서럽고,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힘들고, 아프고, 답답하고, 불쌍하고, 우울하고, 억울하고, 절망스럽고, 모멸감을 느낀다. 비정규직인 자신의 주관적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부정적 단어들의 언급 횟수를 모두 합하면, 3위 ‘차별’(7.2%)과 맞먹는 비중인 7%대로 집계된다. 감정이 그만큼 밑바닥까지 침잠해 있다는 의미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자체가 ‘비’(非)를 포함하는 부정적 단어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애초에 반응어로 부정적 단어를 답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동일한 부정적 단어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부정적 단어 비율이 높게 나타난 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극어(비정규직)를 더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대희 사무국장은 “비정규직의 정신 건강이 정규직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쁠 가능성이 높다는 걸 간접적으로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안, 소외, 분노 따위의 감정을 끼고 산다. 그들이 그런 감정의 나락으로 떨어진 건, 개인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고용유연성이라는 명목으로 불안정 노동을 경제시스템의 주춧돌로 만든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인터뷰를 마친 박영봉씨가 잠시 꺼놨던 휴대전화의 배차 프로그램을 켰다. ‘10#탁송)양재동 오토갤러리-대치동’ ‘25#덕이동-동대문시장’…. 순식간에 수십 개의 배차 콜이 떴다. 그는 외진 장소를 찾아 영등포역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혼자 있어야 ‘근거리 배차’를 쉽게 받을 수 있어서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비정규직들은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산다. 살아낸다. 버틴다. 박씨는 주머니에 항상 이쑤시개를 넣고 다닌다. 허리 통증으로 인해 종종 다리가 마비돼서다. 이쑤시개로 다리를 찔러 붉은 피가 솟구치면 마비가 스르르 풀린다. 하지만 감정의 마비는 풀 길이 없다. 불안에 결박당한 삶은,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는 위험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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