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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카에게 빅엿 먹인 괘씸죄?

페이스북에 ‘가카의 빅엿’ 쓰고 신영철 대법관 징계 요구한 서기호 판사 재임용 탈락 가능성 통고받아… 미운털 박힌 판사들 걸러내는 법관 재임용 제도 악용의 21세기 버전인가
등록 2012-02-09 10:56 수정 2020-05-03 04:26
임명장을 받아든 신임 법관의 손이 떨린다.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10년 뒤 재임용 심사를 받는다. <한겨레> 김봉규

임명장을 받아든 신임 법관의 손이 떨린다.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10년 뒤 재임용 심사를 받는다. <한겨레> 김봉규

1993년 8월31일. 법관으로 임용된 지 10년째가 되던 날 신평(56·사법연수원 13기)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복을 벗었다. 10년마다 이뤄지는 법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지법 판사였던 그는 재임용 심사 석 달 전 한 주간지에 사법부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판사실 안에서의 금품 수수와 인사 비리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화근이었다. 임용 10년이 되는 법관 62명 가운데 혼자만 탈락했다.

방희선(57·사법연수원 16기) 동국대 법학과 교수도 법관 임용 10년째가 되던 1997년 옷을 벗었다. 재임용 대상 법관 28명 가운데 유일하게 탈락했다. 그는 광주지법 목포지원에 근무하던 1992년, 영장이 기각됐는데도 시위 대학생들을 풀어주지 않은 경찰서장 등을 고발했다가 다른 법원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이에 불복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다. 그는 판사직에서 물러나며 “(재임용 탈락은) 법원 수뇌부가 조직에서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사실상 잘라내기 위한 행위”라고 했다.

보수언론이 쳐내라고 주장했던 ‘문제 법관’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지금까지 연임에서 탈락한 판사는 신·방 전 판사를 포함해 3명뿐이다. 헌법상 대법원장·대법관 이외의 법관은 10년마다 재임용 심사를 받아야 한다. 한 전직 대법관은 “이제까지 재임용 탈락자가 3명이라고는 하지만 재임용 불가 결정이 나기 전에 본인이 알아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부적격 판사’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말없이 옷을 벗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로 법관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기호(42·사법연수원 29기) 서울북부지법 판사도 올해로 임용 10년째를 맞았다. 그는 최근 대법원에서 ‘연임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번에 재임용 심사 대상이 된 판사들은 임용 10년째인 사법연수원 29기 판사들과 28기 군법무관, 임용 20년째를 맞은 판사 등을 포함해 모두 180여 명에 이른다. ‘연임 불가 가능성’ 통보를 받은 이들은 이 가운데 10명 안쪽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없이 나가는 이들과 다르게 서 판사의 재임용 부적격 여부 심사는 여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서 판사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하며 ‘가카의 빅엿’이라는 글을 썼다가 소속 법원장에게서 구두 경고를 받았다. 법관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두고 사회적 논쟁이 벌어지는 한편에서 보수언론 등은 ‘문제 법관’들을 쳐내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여 만에 서 판사는 재임용 심사를 거쳐 법복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서 판사는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하던 2009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사건 재판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신영철 대법관 사태’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신 대법관에 대한 미온적 처분을 두고 “신 대법관을 징계해야 한다” “대법원장님과 법원행정처는 적법 절차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리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에는 판결문 작성을 두고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민사사건 재판에서 제대로 된 설명 없이 한 문장, 72자짜리 판결문을 받아든 변호사가 대한변호사협회에 진정을 냈다는 기사가 에 실렸는데 해당 법관이 서 판사였다.

법원조직법은 ‘연임 불가’ 사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신체·정신상의 장해로 인해 판사로서의 정상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근무성적이 현저히 불량해 판사로서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판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 서 판사는 대법원으로부터 두 번째 사유, 그러니까 ‘근무성적 불량’으로 부적격 대상에 올랐다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일자 대법원 관계자는 “판사의 근무성적평정 내용 등은 법으로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른바 대통령에 대한 ‘막말’이 문제였다면 ‘판사의 품위’를 사유로 들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10년치 근무평정을 종합해 내린 결정이지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는 것이다.

판사들 걸러낸 박정희, 전두환

사법부의 과거를 돌아보면 권력에 미운털이 박힌 판사들을 걸러내는 데 법관 재임용 제도가 악용된 사례는 많다. 제헌헌법은 법관의 임기를 10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은 법관 임기를 권력에 종속시켜버렸다. 유신헌법에 따라 개정된 법원조직법에 근거해 법관 356명은 연임, 38명은 재임용을 받지 못해 1973년 3월31일자로 의원면직됐다. 38명 가운데 5명은 ‘1차 사법파동’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말은 의원면직이었지만, 1971년 국가배상법 위헌 의견을 낸 대법원판사 9명도 같은 날 의원면직됐다. 이 일이 있은 뒤 사법부는 급속히 굴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80년 개정 헌법에 따라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됐다. 이듬해 4월17일 6명의 대법원판사가 퇴직하고 판사 37명이 법복을 벗게 됐다. 1991년에도 30여 명의 판사가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이들이 포함됐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게 시국사건 판결을 내린 판사들도 포함됐다.

법관 재임용 판단의 주요 근거 자료는 해마다 법원장에 의해 이뤄지는 법관근무평정이다. 과거 법관 서열과 인사, 보직 결정은 판사가 되기 전 사법시험 성적과 사법연수원 수료 성적에 따라 전적으로 이뤄졌다. ‘성적순’은 법복을 벗을 때까지 꼬리표가 됐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식당에 들어갈 때, 등산을 할 때’조차 성적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비판이 커지자 1994년 근무성적평정이 시작됐다. 2003년에는 법원장 1명이 평가하고 당사자가 원하면 10년 경과 뒤 평정 결과 요지를 공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005년, 처음으로 근무평정 결과가 법관 정기 인사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법조 브로커 사건으로 사법 불신이 커졌던 2006년에는 부적절한 처신으로 물의를 일으킨 판사들을 연임 심사 때 철저히 검증해 퇴출시키는 방안이 마련되기도 했다.

한 전직 법원장은 “근무평정의 객관성을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업무성실도, 판결, 내부 의견, 상급심 재판부의 의견 등을 종합해 평가한다. 하지만 시험 성적처럼 1~2점으로 나누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하는 일이라 당사자는 섭섭하고 억울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서울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남을 판단하는 게 직업인 판사들은 평가를 당하게 되는 근무평정에 굉장히 민감해한다”고 했다. 현 법관 인사 시스템의 가장 큰 폐해로 지적되는 ‘고법부장 승진’에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튀는 판사들을 걸러내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을지 고민스럽다”고 했다.

전관예우, 정치판사는 걸러지나

재판의 독립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사항은 평정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하지만 평정 권한을 가진 법원장의 부당한 압력과 판사들의 눈치보기가 결국 재판 독립성을 일상적으로 해칠 것이라는 우려는 가시지 않았고 현실화하기도 했다. ‘신영철 사태’가 언론에 불거지기 직전인 2008년 12월,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일선 법원장들에게 “근무평정 권한을 지닌 법원장의 언행이 자칫 한계를 벗어나면 젊은 법관들의 의욕과 기백을 꺾게 된다”고 뜨뜻미지근하게 지적했다. 재임용 여부를 결정하는 법관인사위원회에는 외부 인사도 참여한다. 서 판사는 “재임용 심사에 들어갈 사유도 아니고 사직할 마음도 없다. 소명 절차를 거치겠다”고 했다. 2월 말 법관 인사에서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 여부가 공식 발표된다.

양승태 대법원장 들어 엄격해졌다는 법관 재임용 심사. 사법부는 정말 전관예우에 약한 판사, 불성실한 판사, 정치권력을 따르거나 경제권력에 어깨가 기운 판사들을 제대로 걸러내고는 있을까.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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