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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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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익을 일만 남았다

김장소 사서 담그려다 답지한 온정의 재료 덕에 마늘부터 까야 했던 김장 담그기…장기투쟁 노동자들의 겨울 양식 마련하고, 복직의 꿈도 다진 ‘희망김장’ 지상 중계
등록 2012-01-06 13:17 수정 2020-05-03 04:26

누군가는 배추 1천 포기를 보고 절망이라 했고, 누군가는 36쪽 마늘을 보고 다시는 김장을 담그지 않겠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당분간은 배추김치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애초의 계획은 절인 배추 1천 포기를 후원받고, 갖은 양념을 넣은 김치를 만들자는 소박한 출발이었으나, 김장 신출내기들의 마음을 하늘이 아는지 모르는지… 절인 배추 1천 포기는 날아가버리고, 밭에 가서 직접 배추와 무를 뽑아오고, 36쪽 마늘 60kg을 까는 시련을 안겨주셨다. 하지만 추운 겨울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의 아픔만 하겠는가.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장기투쟁 노동자들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만 있다면, 알싸하게 알맞게 익은 김치에 밥 한술 뜨고, 든든한 배를 부여잡고 싸움을 준비할 수만 있다면 배추 1천 포기가 문제겠는가. 모두가 김장이 처음인 김장 신출내기들의 왁자지껄 1천 포기 희망김장 담그기 행사는 절망으로 시작해 마침내 희망을 만나는 행사가 되었다.

원래는 배추를 배달받기로 했는데…
원래는 이런 계획이 아니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시작된 희망의 흐름을 경기 지역에서 이어가자는, 누군가의 제안으로 시작된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경기 지역 희망 만들기, 희망김장’. 포레시아, 주연테크, 동서공업, 파카한일유압, 시그네틱스, 돌다리교통, 쌍용자동차, 이천스포츠센터, 한미약품, 한국쓰리엠…. 얼른 생각나는 곳만 이 정도. 어딘들 다르겠냐마는 이 동네는 투쟁 사업장이 많기도 하다. 게다가 대부분 한두 해 싸워온 것이 아니다. 시그네틱스는 부당해고 판결로 복직한 뒤 다시 정리해고를 당했다. 뒤늦게 배추 뽑으러 온 포레시아 조합원들은 재판을 마치고 왔단다. 법원의 정리해고 기준은 점점 완화되고 어찌어찌 부당해고로 판결을 받아도 대법원까지 수년이 걸리고, 거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업무방해로 고소당하기 일쑤다. 정말로 희망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시작된 희망김장. 원래는 절인 배추 1천 포기를 김장 담그는 장소까지 배달하기로 했는데 말이지.
12월14일 경기도 평택. 배추와 무를 수확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나온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과 그들과 연대하는 수많은 지역 시민들, 경기도 곳곳에서 온 처음 보는 얼굴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보고 희망김장 행사를 위해 모여주었다. 날이 추워져서 얼어 있는 배추를 골라내고 잎을 떼어내다 보면 장갑 낀 손이 차가워진다. 배추 1천 포기, 무 500개, 쪽파. 그나마 사람이 많아 다행이다. 한데서 배추와 무를 뽑다가 5년은 늙어버린 것 같다는 초췌한 한 참가자의 얼굴이 안쓰러워지는 날이었다.
12월15일 마늘이 왔다. 인터넷에 올린 홍보글을 보고 낯 모르는 시민들이 돈과 물품을 보내오고 있다. 후원금부터 양념, 액젓, 마늘, 고춧가루, 김장 김치 한쪽 올려 허기를 달래라고 보내준 보쌈고기 100인분과 막걸리 100병. 시작할 땐 적자 안 나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주변에 따뜻한 손길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홀로 외롭게 싸우는 줄만 알았던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을 후원하려는 수많은 손길을 보며 그들의 싸움, 우리의 싸움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흐뭇한 것도 잠시! 그런데 우리 김장소는 그냥 사서 버무리기만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되면 마늘부터 까야 하는구나.

» 2011년 12월17일 천주교 수원대리구청에서 ‘희망김장’ 1천 포기를 담그는 사람들. 배추뽑기·마늘까기부터 시작한 과정은 힘들었으나, 장기투쟁 노동자들의 겨울 먹거리를 마련했다는 생각에 고생의 끝은 달았다. 희망김장 기획단 제공

» 2011년 12월17일 천주교 수원대리구청에서 ‘희망김장’ 1천 포기를 담그는 사람들. 배추뽑기·마늘까기부터 시작한 과정은 힘들었으나, 장기투쟁 노동자들의 겨울 먹거리를 마련했다는 생각에 고생의 끝은 달았다. 희망김장 기획단 제공

희망의 맛은 맵다 짜다 싱겁다

12월16일 천주교 수원대리구청. 마늘을 까고 있다. 36쪽 마늘, 후원받았다. 집에서도 해본 적 없는 마늘 까기를 6쪽도 아닌 36쪽으로 시작하다니…. 그렇다고 ‘돈으로 주세요’ 내지는 ‘우린 6쪽 마늘만 후원받아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심 그럴걸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 밖에서는 배추를 절인다. 절인 다음엔 배추를 뒤집어야 하고 날씨는 왜 이리 추운지… 씻어놓은 배추에 고드름이 언다. 그래도 우리는 구원해주는 이가 있었으니. 드럼통 2개에 불을 준비해오신 한 건설노동자.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다. 저녁 6시부터 배추를 씻어야 하니 이곳에서 밤을 보내야 한단다. 그러니까 원래 이런 계획이 아니지 않았나? 12월17일 오전 10시부터 하루를 함께하며 가볍게 김장을 담그는, 그런 거였는데.

그런데도 12월14일부터 함께한 투쟁사업장 조합원들 표정은 밝다. 이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는구나. 체력도 좋아라. 자본의 탄압은 끈질기다. 부당해고 판결나도 복직시키지 않는다. 민주노총 탈퇴 투표가 부결되어도 조합원들을 한층 더 회유하고 협박하며 다시 투표에 부친다. 2009년의 쌍용자동차 노사 합의는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합의는커녕 절차도 법도 무시한다. 우리는 더 끈질겨야 한다.

12월17일 대망의 희망김장 본편. 슬슬 체력이 고갈되어 주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밖에서는 투쟁사업장 부스가 운영되고 있고, 안에서는 김장이 한창이다. 막상 김장은 정신없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된다. 매캐한 고춧가루가 날아다니고, 여기저기 양념을 버무리는 손이 정신없다. 그 와중에 한입 먹어본 배춧속의 매콤함이 달고 단 희망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정성껏 버무리고, 희망김장을 기다리는 수많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꽁꽁 동여매진 희망의 마음들. 맵다, 짜다, 싱겁다 말은 많았지만 결국 이 김치의 맛은 희망으로 버무려져 있다는 것은, 이 김치를 먹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남은 배춧속과 푸짐한 보쌈과 시원한 막걸리. 몇 날 며칠 고생의 끝은 이렇게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절망이고, 다시는 안 한다는 김장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마무리하고 시원한 막걸리를 한잔하고 있으니, ‘내년에도 다시 한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뒤풀이 자리에서 한국쓰리엠 노동조합의 여성 노동자가 흘린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회사에 의해 노조가 파괴되고 다시 세우기를 몇 번,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년에는 1만 포기 합시다”

앞에 투쟁사업장을 나열했지만, 사실 끝까지 투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눈물 흘리며 돌아선 사람들을 기억한다. 패배했지만 영원한 패배는 아니다. 절망이 계속되는 세상에 희망이 눈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끈질기게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이 여기 있지 않은가. 해고당하고도 아직도 회사 작업복을 벗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들. 다시 출근할 날을 기다리며 작업복을 다리고 다시 희망을 부여잡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작업복에 다시금 땀내 물씬 풍기는 그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누군가가 외친다. “내년에는 경기도청 앞에서 1만 포기 합시다.”

와하하, 웃음이 이어졌다. 이 웃음이 참 좋다. 매일 밥상 위에 올려져 있던 김치. 어제만 해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배추와 무였지만 오늘은 우리를 희망으로 엮어준 이 김치가 참으로 고맙다.

이근택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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