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살배기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엄마, 엄마, 엄마, 늘 부르기만 하던 그 이름의 주인이 되고 보니 달라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기 울음소리만 들려도 마음이 조급해져 낯모르는 아이라 해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고, 한 손에는 아이 손, 한 손에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쥐고 낑낑거리며 버스를 타러 달려가는 엄마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가 이 진실을 진실로 지킬 수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서슴없이 칼날을 휘두르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그런 세상에 맞서 아주 오랜 시간 싸우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회사에서 두 번이나 정리해고를 당한 32명의 시그네틱스 노동조합 조합원들, 그녀들이 바로 긴 싸움의 주인공입니다.
환하게 웃는 해고자, 그녀
2001년 해고, 2007년 복직, 2011년 7월 또다시 해고. 정규직 없는 사업장을 만들려고 영풍그룹은 계열사 시그네틱스 여성 노동자에게 두 번 해고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첫 싸움은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고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려고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안산공장으로 발령낸 회사 쪽의 조처로 시작됐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들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안산공장으로 복직했지만, 영풍그룹은 2011년 7월 다시 32명의 여성 노동자를 해고합니다.
김양순씨도 그 32명 중 한 분입니다. 두 아들의 엄마인 올해 마흔일곱의 그녀, 스물셋에 들어간 첫 직장이 바로 시그네틱스였으니 그곳에서 생의 절반을 보낸 셈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먹고 싶은 것도, 입고 싶은 것도 참고 또 참으며 검소하게 살아온 남편 덕분에 학자금 대출 한번 받지 않고 큰아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두 번이나 자신을 거리로 내몬 시그네틱스를 ‘내 회사’라며 ‘사랑하니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특별한 꿈 하나 가질 줄 몰랐던 내성적이었던 한 소녀는 고등학교 졸업 뒤 반도체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물일곱, 한눈에도 선량해 보이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손도 내가 먼저 잡았다며 좋으면 그래도 된다고 넉살 좋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두 번의 정리해고를 당한 고단하고 힘겨울 그녀들’이라는 내 편견은 그녀에 의해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자기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던지 남편은 정말로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며 때로는 지나치게 성실해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지만 그녀도 성실 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첫아이 출산 하루 전날까지도 퉁퉁 부은 발에 고무 슬리퍼를 신고 일을 한 그녀입니다. 지금도 고된 밤샘 작업을 끝내고 자신의 출산을 축하하러 병원으로 달려와준 동료들이 고마워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 엄마 품을 찾는 아이를 할머니에게 떼어놓고 3교대 근무를 하려고 늦은 시각 집을 나서기도 했던 그녀입니다. 그녀가 회사에 가고 나면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또 울어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떼어 보여주며 간신히 달랬다는 시어머니의 말씀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찡합니다. 출산휴가 3개월이 지나면 백일이 갓 지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놓고 허둥지둥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게 이 나라 엄마들의 현실입니다.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그녀의 역사
20년 넘게 일하며 휴가 한번, 결근 한번 하지 않은 그녀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2001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울 본사를 경기도 파주로 옮기는 사업이 마무리되던 단계에 회사 쪽의 일방적인 안산공장 발령을 거부하던 노조원 130명 전원이 징계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회사가 어려웠던 시절, 모두 힘을 합쳐 일해 파주로 함께 가자던 회사 쪽 말만 철석같이 믿고 월급까지 자진 삭감해가며 일했던 그녀입니다. 그녀뿐 아니라 모든 사원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안산공장으로 가라니 그녀와 조합원들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청춘을 다 바쳐 일한 내 회사인데 이럴 수가…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견디기 힘들어 영세를 받는다는 큰아들을 따라 성당에 나갔다가 그날로 신자가 되었습니다. 어디에라도 기대고 위로받아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투쟁이라는 단어도 동지라는 단어도 생소하던 그녀입니다. 그녀뿐 아니라 함께 해고된 대부분의 동료들이 그랬습니다. 그녀들은 한강철교에 올라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단식·노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승소 판결을 받아 2007년 복직했습니다. 복직된 뒤 참기 힘든 차별과 이간질 속에서도 묵묵히 일해온 그녀는 3년 만인 2011년 7월 다시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3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무 잘못 없이 한 회사에서 두 번이나 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기 싫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졌을 법한데, 그녀는 다시 한번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처음 해고당한 이후 5년은 억울함에 멋모르고 싸웠다 치겠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의 고됨을 모두 아는 지금 어떻게 또 그 세월을 견딜 힘을 낼 수 있는지,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습니다. 돈이 문제라면 다른 회사에 가서 벌어도 될 일 아닌가. 조심스런 물음에 그녀는 특유의 선량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며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므로 이렇게 떠나기엔 너무 억울하고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에게 시그네틱스는 단순한 일터가 아닙니다. 그녀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곳입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낸 일터에서의 시간이 그녀라는 사람을 증명하는 소중한 역사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그들에게
그제야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시그네틱스로의 복귀는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돌아가는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조금도 주저 않고 파주의 시그네틱스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파주에서 일하며 솜털이 아직도 보송보송한 어린 생산직 노동자 친구들에게 과연 옳은 것이 무엇인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던 그 정신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길고 고된 싸움을 앞둔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번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녀를 보며 나의 아빠, 엄마, 남편, 언니, 남동생, 그리고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엄마, 우리의 누이, 당신의 아내 혹은 당신의 딸….
박선희 아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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