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의 산뜻한 1만 평의 공장, 그 담 너머 ‘원직 복직‘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5평 남짓 컨테이너는 너무 극명한 대비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절로 연상되는 풍경이다. 경기 화성시 장안면 장안외국인전용투자단지에 있는 (주)포레시아배기컨트롤시스템코리아, 프랑스 자본의 다국적기업으로 자동차 머플러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말이 단지이지, 허허벌판 한가운데 공장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스피커로 제아무리 소리쳐봐도 공장 안에만 울릴 뿐인 곳. 이 대치가 참, 얄궂다.
정리해고로 무너진 아버지의 꿈
그렇게 외진 곳에 올해 쉰한 살의 이병운씨가 있다. 흰색 작업복 대신 방한용 검은색 점퍼를 입은 그를, 지난 12월6일 오전 만났다. 시커먼 그의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간밤 당직을 섰어요. 아침부터 날도 흐리고 마음도 그래서, 나무에 소지천을 걸었어요.”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양손을 비벼대며 계면쩍게 웃었다. 공장 입구 진입로에는 정리해고의 부당함과 원직 복직을 담은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고, 그런 마음을 담은 천들이 나뭇가지에서 무성한 이파리처럼 나부꼈다. 이날 아침 그는 마음 한 자락을 또다시 공장 앞에 걸어두었다.
925일. 그가 일터를 잃은 날수다. 2년7개월 조금 안 된 시간은 그에게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란 무거운 호칭을 붙여주었다. 2009년 5월 회사는 경영난을 이유로 1997년 8월 이후 입사한 이들을 모두 정리해고했다. 정리해고에 대한 소문은 이미 공기를 타고 유령처럼 공장 안을 떠돌았다. 어렵다는 회사 쪽의 말에 자진해서 휴무 순번을 정해 쉬고, 일하고, 그랬다. 회사 쪽의 임금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노동자들의 배려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건 칼날 같은 해고. 5월은 이곳 포레시아 노동자들에게도 잔인했다.
그의 유년은 슬픔투성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 모두 3개월 상간으로 돌아가셨다. 형편도 어려웠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큰일을 두 번이나 치러야 했던 그.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열아홉에 강원도 화천의 두메산골을 빠져나올 때 청년의 꿈은 의외로 평범했다. 돈 벌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 마음뿐이었다. 짧은 학력을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기술로 대신했다. 취업해 공장에서 착실하게 기술을 배워가며 일했고, 스무 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꽃다운 연애도 했다. 식도 못 올린 채 살다가 성실하게 모은 돈으로 3년 뒤 결혼식을 치렀고, 두 아이를 두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남편, 아빠로서 행복했다.
2009년 5월 정리해고 통지서는 이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딱 1년만 지켜봐달라고 했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이렇게 쫓겨날 수는 없지 않냐면서.”
가족을 설득하면서도 설마 1년까지야 걸리겠나 싶었다. 그러나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기각당하고, 1년이 넘어도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가장의 빈자리는 가족에게 점점 커졌고, 끝내 아물지 못할 상처가 돼버렸다. 결국 아내가 떠났다. 스물둘 아들은 군 입대를 미루고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일찍이 가장이어야 했던 그, 자식들에게만은 청춘을 맘껏 누리게 해주겠노라 다짐했던, 아버지로서의 바람이 한순간 무너졌다.
“처음에는 몇 달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는데 번번이 거짓말이 되었어요. 아내가 그사이 지친 거죠. 당연해요.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그저 미안하고 고맙고…. 지금도 아내가 아이들 통해 언제 끝나느냐고 물어봐요. 해줄 말이 없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죽은 나무와 동병상련
말하는 그도, 듣는 이도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열아홉 청년의 소박한 꿈은 이렇게 동강 나버렸다. 어디 그만의 사정일까. 정리해고에 맞선 오랜 싸움은 끝내 가정의 절단으로 이어지곤 한다. 한 사람의 존재감을 공중부양 해버리는 끔찍한 상황들을 ‘제발 악몽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목격해왔다.
독한 질문을 했다. 왜 가정까지 포기하면서 싸워야 하는지. 그런데 느닷없이 소지천을 걸어두는 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뜬금없다 싶었다.
“공장 앞 가로수에 소지천을 걸었는데, 시청 직원이 그러면 나무가 죽는대요. 우리는 일회성 소모품이 아니라면서 싸우고 있는데, 나무한테 미안했어요. 그래서 그 뒤로 죽은 나무들을 주워왔어요.”
그런 마음이었다. 지금 농성장에는 그를 포함한 19명의 해고자가 있다. 싸움이 길어져 3개월씩 교대로 생계 방편을 찾고 있다. 매일 10명의 해고자가 농성장을 지키고 있으며, 주말이면 생계노동을 하는 이들도 함께한다. 그리고 지금 공장 안에선 8명의 노조 조합원이 일하고 있다.
“저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한쪽 벽면에 세워놓고 일 안 시키고, 회의실로 불러 무릎을 꿇게 하고, 욕하고, 침 뱉고. 험한 꼴 다 참아내며 노조 탈퇴 안 하고 버티고 있어요. 바깥에서 싸우는 나를 지켜준 사람들이에요. 도와주는 사람들 나 몰라라 등지고 차마 가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등에 짊어지고 농성장을 지키겠다고 했다. 가족과 농성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면접도 보고 용접시험도 보고 들어간 직장인데 일회용 쓰레기처럼 버려도 되는 건지, 우리가 쓰레기는 아니잖아요. 지금 돌아서면 평생 주눅 들고, 죄책감으로 살 거예요. 아무 잘못 없는데,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면 정말 나는 인간이 아니라 일회용품이 돼 버리잖아요. 당당하게 나에게,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마음 아프지만 여기에 있는 거예요.”
앞에는 절벽, 뒤에는 낭떠러지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다 지난 10월 고등법원에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승소 판결이 나왔다. 2003년 시화공단에서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고용 승계를 약속했고, 희망퇴직자 대다수가 다시 들어와 일을 하고, 정리해고 전후로 임금총액이 줄어들지 않았고, 생산량이 급증한 점 등을 들어 회사의 정리해고는 부당하다는 판결이었다. 회사는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지만, 오랜만에 그는, 그들은 설레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빨 날이 곧 오겠지요”
며칠 전 농성장 옆 나대지에 심어놓은 배추를 수확해 김장을 담갔다. 큰 독 두 개 가득 김치를 담아 컨테이너 옆에 묻었다. 올겨울도 농성장에서 나야 한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점심시간 짬을 내 건너왔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하얀 작업복이라니. 빨래하는 것도 일이겠다 싶었는데, 그가 말했다. “하루에 수십 번이라도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빨 수 있어요. 조만간 그럴 날이 오겠지요.”
하루 세끼 밥처럼 평범한 꿈조차 지켜내기 어려운 시대라면, 그건 단연코 문제 있는 사회다. 그에게 925일은 그 꿈을 지켜내기 위한 시간이었고, 당당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뼈아픈 여정이었다. 다만 그 상처가 너무 깊지 않기를.
노영란 문화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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