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사 안에선 온갖 물건을 판다. 옷, 신발, 책, 화장품, 식료품, 소형 가전제품, 액세서리….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이나 약속 시간이 조금 남았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 수 있는 물건들이다. 물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1만원짜리 한두 장으로 흥정이 끝난다. 그런데 이런 지하철 상가 점포의 한 달 임대료가 많게는 수천만원에 이른다.
지하철 상가의 지배자 ‘자리부장’
지하철 상가를 임대해주는 곳은 서울의 경우 서울메트로(1~4호선)와 서울도시철도공사(5~8호선)다. 이들은 공개 입찰을 통해 대개 5년 계약의 상가 운영자를 선정하고, 상가 위치와 크기, 유동인구 등에 따라 점포 한 곳당 월 임대료 100만~1200만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실제 장사를 하는 사람이 내는 수천만원의 임대료와 서울메트로 등이 받는 임대료의 차액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돈 먹는 하마’는 불법 재임대(전대) 조직이다. 전대란 애초 상가를 빌린 사람이 직접 장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재임대를 하는 것으로, 주택의 ‘전전세’와 비슷한 개념이다. 민법 629조는 상가 등을 빌려준 쪽의 동의 없이 전대를 할 수 없도록 못박고 있으며,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임대 관련 규정도 전대를 금지하고 있다. 전대가 드러날 땐 계약 해지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금지는 규정에서나 살아 있을 뿐이다. 불법 전대 조직은 지하철 상가 세계의 엄연한 지배자다. 대표적인 곳이 S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S사가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빌린 상가는 모두 61곳이다. 하지만 S사가 상가를 직접 운영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S사가 서울메트로에 월 1200만원을 내기로 한 가게를 A씨에게 전대해 월 1600만원을 받는다. A씨는 실제 운영자 B씨에게 다시 전대해 월 3천만원을 받는다. B씨가 내는 돈과 S사가 내는 돈의 차액 1800만원은 고스란히 S사와 전대 조직의 몫이다. 상인들이 ‘자리부장’이라고 부르는 A씨, 즉 전대 조직은 보통 2~5단계로 이뤄져 있다. 전대 조직을 거치면서 임대료가 말도 안 되게 뛰어오르는 구조다.
지하철 상가 중엔 ‘××기업 부도 단 3일만 폭탄세일’ 같은 펼침막을 내걸고 장사하는 곳도 적잖다. 그래서 임대계약 기간은 하루도 될 수 있고, 몇 달도 될 수 있다. 계약서는 없다. 이 때문에 전대 조직의 이중계약으로 피해를 보는 상인도 있다.
10여 년 동안 지하철 상가에서 의류판매업을 해온 한 상인의 말은 이랬다. “하루에 300만원은 벌어야 한 달에 200만원이라도 가져갈 수 있어요. 매일 임대료 65만원(월 2천만원)을 자리부장한테 입금해야 하고, 물건 떼오는 비용에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니까요. 그런데 장사가 어디 매일 그렇게 됩니까? 하루라도 입금을 못하면 자리를 빼라고 하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대출받아서 임대료를 내죠. 그러다 보면 한 달에 700만~800만원 적자 보는 건 일도 아닙니다. 남들은 지하철 상가라고 하면 날씨 안 타니 장사 잘되는 줄 알지만, 브로커들한테 이렇게 임대료 많이 내는 거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압수수색 뒤 두 달 넘게 수사 진척 없어지난해 종합부동산 컨설팅사 ‘쿠시먼 앤드 웨이크필드’(C&W)가 발표한 서울 명동 상가의 평균 월 임대료가 ㎡당 60만4226원이니, 월 2천만원이면 명동에서 대략 33㎡(10평)짜리 가게의 임대료에 해당된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장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건 “할 줄 아는 일”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상가를 임대하는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 쪽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가업무 담당자들이 S사나 관련자들로부터 금품을 받으면서 이런 사실을 눈감아줬다. 감사원은 ‘공공기관 공직자 등 비리점검 감사’를 벌여 이를 밝혀내고, 지난 1월 말 관련자들의 파면 조처 등을 요구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엔 관련자 9명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당시 감사원은 S사가 불법으로 받아챙긴 돈으로 수십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하고 소득을 축소 신고해 세금을 포탈한 혐의 등도 잡았다. 이에 따라 검찰은 지난해 11월 초 S사를 압수수색한 바 있다(834호 줌인 ‘지하 세계의 비리, 감싸는 자 누구인가’, 837호 보도 그 뒤 ‘검찰의 칼끝, 서울 밑으로 향하나’ 참조).
그런데 압수수색을 벌인 지 두 달이 넘도록 수사는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 감사원 수사 의뢰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최윤수 부장검사는 “그동안 경기도 고양시 식사지구 인허가 비리 사건을 수사하느라 상가 관련 수사의 속도가 늦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난해 8월 참여연대 등이 제기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상가 비리 의혹 고발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가 한 차례 각하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S사의 실제 소유주로 알려진 S씨다. 그는 S사의 법인등기부등본 어디에도 이름이 올라 있지 않지만, 업계에선 “이 바닥에서 조금만 오래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S씨가 S사 주인이란 사실을 안다”고 할 정도다. 감사원에서도 임대료가 S씨의 차명계좌로 흘러 들어간 정황을 포착했으며, 그가 S사의 실제 대표라고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S씨는 ‘한-일 월드컵 휘장사업권(의류 등에 월드컵 공식 마크·마스코트·엠블럼 등 휘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로비 의혹’과 관련해 정·관계 로비 혐의로 2003년에 구속된 바 있다. S씨는 2001년 월드컵 홍보물을 판매하는 지하철 상가를 한국관광공사에서 위탁받으면서 지하철 상가 운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정부 실세였던 K씨, 김상돈 전 서울메트로 사장과 가깝다”는 말이 나도는 등 정·관계 쪽 인맥도 탄탄하며, 각종 봉사활동을 통해 스포츠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
과연 배후는 없나지난해 2월 서울메트로의 행선안내게시기 설치 사업 비리 의혹 등으로 시작된 감사원 감사는 초점이 김상돈 전 서울메트로 사장에게 맞춰지면서 여권 고위층의 압력으로 감사가 지연됐었다. 결국 행선안내게시기 설치 사업 비리 의혹과 관련해 김 전 사장에 대한 감사원의 조처는 수위가 가장 낮은 ‘수사자료 통보’에 그쳤고, 상가 비리 의혹과 관련해선 어떤 조처도 취해지지 않았다. 여기에 김 전 사장을 포함한 두터운 정·관계 인맥에 수십억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전직 로비스트까지 더해지면, 자꾸만 늦어지는 검찰 수사가 과연 우연인지 의구심이 일게 된다.
이와 관련해 최윤수 부장검사는 “지하철 상가 수사와 관련해 외부로부터 어떤 전화도, 압력도 받은 적이 없다. (상가 전대나 비자금, S씨 등이 정치권과 관련이 있다면) 수사를 하다 보면 밝혀질 수 있는 내용”이라며 “수사 상황과 결과를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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