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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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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선 라인에 걸린 고된 노동자의 외침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농성장 르포…

불합리한 고용만큼 냉기 어린 작업장에서 시린 어깨 덮을 것은 얇은 비닐 조각뿐이네
등록 2010-12-02 16:21 수정 2020-05-03 04:26

지난 11월23일, 공장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9일째였다. 현대 울산공장 1공장 의장부에 출근해 대기하는 정규직들은 공구 대신 휴대전화를 들고 아시안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비정규직 500여 명이 농성 중인 3층 ‘도어탈착 라인’ 입구로 향하기 위해 16만 평의 공장을 가로질렀다. ‘보조라인’이라는 이름처럼 공장 안에서도 외진 구석이었다. 점거라기보다는 자발적 고립에 가까웠다. 계단 입구를 사이에 두고 300여 명의 회사 쪽 경비용역과 계단을 가득 메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날선 대치 중이었다. 농성장 진입은 녹록지 않았다. 정규직 대표자들만이 제한적으로 출입이 가능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그들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3층에 이르자 오래된 노숙의 냄새와 뒤섞인 한기가 끼쳐왔다. 농성 3일째부터 난방이 차단됐으니 벌써 일주일 동안 온기가 없는 공간이었다. 라인 양쪽으로 엑센트·클릭 등 차체 골격 10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정지돼 있었다. 이곳은 주야간으로 1500여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며 1년에 약 40만 대를 쏟아내는 곳이었다. 돌돌 말려서 버려진 목장갑과 운전 중 정지된 것으로 보이는 중장비들로 점거 당시 상황의 다급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은 일 하면 같은 대우 해달라”

» 지난 11월24일 새벽,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1공장 3층 ‘도어탈착 라인’을 점거한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비닐과 신문지에 의지한 채 잠이 들었다.한겨레 울산=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지난 11월24일 새벽,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1공장 3층 ‘도어탈착 라인’을 점거한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비닐과 신문지에 의지한 채 잠이 들었다.한겨레 울산=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농성자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다. 농성자 500여 명 모두는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 동안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해왔다. 7년차로 대시보드를 장착하는 일을 하는 이아무개(31)씨도 마찬가지다. 친구와 같은 해에 입사했지만, 불리는 이름이 달랐다. 친구는 “직영”이라고 불렸고, 자신은 “업체” “하청” 등으로 불렸다. 월급은 처음부터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친구는 지난해 울산시 외곽에 아파트를 샀다. 딸 둘을 둔 이씨는 전세금 대출을 갚기도 벅찬 상황이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화는 지난 7월에 있었다. “사내하청 업체에서 2년 이상 근무한 근로자는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난 뒤 노조에 가입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아이들이 ‘아빠 직장’이라고 가리키는 1공장이 진짜 자신의 직장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3층에 올랐다.

500명의 굴곡진 사연은 차고도 넘친다. 그중에서도 박아무개(44)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정리해고의 아픔을 직접 몸으로 겪은 당사자다. 박씨는 1998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당시 직장을 떠났다. 3년 뒤 다시 비정규직으로 같은 일터에 돌아왔다. 같은 일을 했지만 예전 연봉의 절반이 되지 않았다. “내가 하청업체 동료들을 무시했으니 할 말은 없죠. 그런데 당해보니까 다르더라고.” 볼트를 하나 더 박는 문제로 정규직끼리 다투다 결국 박씨의 몫이 된 적도 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이다. 힘든 것보다 인간적으로 치사하다는 생각이 앞서서 분했다. 그래도 버텼다. 또 나가게 되면 갈 곳이 없었다. 1991년 함께 입사한 동료들은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 이곳에서 비정규직은 계급장과 같다.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연봉 차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울분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02년에서 2009년까지 매출액이 24조6천억원에서 31조9천억원으로 늘었다. 자동차 생산도 1998년 80만 대에서 2002년 165만 대, 2009년 175만 대까지 늘려왔다. 그런데 이 기간에 정규 생산직은 2002년 2만9천여 명에서 2009년 3만1600명으로 거의 늘지 않았다.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증감을 반복했다. 1998년 4천여 명에서 2002년 8500여 명, 그리고 현재는 8천여 명이 유지되고 있다. 특히 2004년에 9500명까지 늘었다가 2006년 불법파견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6천 명까지 줄었던 것이 최근 다시 급증했다. 숫자 속의 현실은 눈물겹다. “잘린다는 생각만 없어도 살 것 같았다”는 한 조합원의 말처럼 비정규직 수의 증감은 그만큼의 고용 불안을 의미했다.

울분이 터져나오듯 점거 농성의 시작은 우발적이었다. 지난 11월15일, 시트를 만드는 사내하청 업체인 동성기업이 폐업하면서 청문기업이 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조합원들과 마찰이 있었다. 비정규직지회는 1공장으로의 비상소집을 제안했다. 1공장은 가장 오래된 공장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유대관계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 과거 현대차 노조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곧바로 ‘오후 잔업 파업’이 결정됐다. 참석한 비정규직 조합원 수는 점점 불어나 1천 명을 훌쩍 넘어섰다. 비정규직지회가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수가 모였다.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팽배해지면서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점심을 굶고 회의는 계속됐다. 그사이 회사 쪽 경비용역들도 1공장으로 향했다. 모여든 비정규직 조합원도 1300여 명까지 수가 불어났고, 충돌을 피해 3층 ‘도어탈착 라인’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다. 사실 1공장의 3층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각각 4명이 일하는 라인으로 공장 내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자리를 옮기자 자연스럽게 대치가 시작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열흘이 넘는 농성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회장부터 스물여덟 4년차 막내까지 작업 점퍼에 발토시, 목장갑과 마스크가 전부였다.

파업 트윗, 스마트 세대의 농성법

오후 1시가 넘자 농성장에서 점심 식사가 시작됐다. 1인당 김밥 한 줄. 편성된 조별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곳이 있었다. 그들의 박장대소가 농성장을 울렸다. 다 함께 웃었다. “김밥 한 줄로 어차피 해결이 안 되니 상대편에게 몰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조용히 두 줄을 먹는 조도 있었다. 아침에 먹지 않고 아꼈다가 점심에 몰아 먹는다고 했다. 먹을거리는 당연히 부족했다. 이들은 “먹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있다”고 입을 모았다.

농성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화장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기계 소리 없이 조용한 공장 안으로 소리와 냄새가 노골적으로 흘러나왔다. 5일 전에 난방이 끊긴 뒤 환기시설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탓에 냄새가 농성장 전체에 깔렸다. 사용할 수 있는 변기는 둘뿐이었다. 게다가 하나는 막혔다. 산술적으로 봤을 때 하루 수십 명은 대변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40대 조합원은 “사람 대접을 해줘야 다른 생각도 할 텐데 이렇게 짐승처럼 궁지로 몰면 극단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결국 점거 7일 만에 회사는 1층 화장실 한 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2명씩만 내려가는 조건을 걸었다. 조합원들은 많을 때는 20여 명씩 줄을 서야 하는 농성장 화장실을 이용하느냐,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회사 쪽 경비용역의 시선을 감내하며 1층 화장실을 이용하느냐 갈등했다. 특히 이날 저녁 처음으로 따뜻한 쌀밥에 컵라면이 지급되고 나서는 화장실이 아우성이 었다. “오랜만에 한정식 먹고 탈났다”는 누군가의 입담에 배를 움켜쥔 사람들도 웃었다.

농성장에는 식량과 그 뒤처리 장소만 없는 게 아니었다. 햇볕도 없다. 10m 이상의 높이에 작은 불투명 창이 있지만 햇볕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당연히 창밖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의 낯빛이 어둡지만은 않았다. 농성이 처음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비밀은 손에 든 스마트폰에 있었다. 파업 6일째 되는 날 저녁, 트위터 계정을 가진 한 조합원의 건의로 조합원들에게 트위터 교육이 있었다. 50여 명이 모였다. 스마트폰으로 고스톱 게임 정도만 즐기던 조합원들이 이제는 매일같이 자신들의 소식을 바깥으로 날랐다. 점거농성이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고 탓하는 사람보다 트위터에 어떤 글을 올릴지 고민하는 사람이 늘었다.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농성장(twitter.com/dhauto/hdauto/) 계정을 중심으로 매일같이 자신들의 소식을 나르면서 각자 적게는 100여 명에서 많게는 1천여 명씩 급속도로 폴로어를 늘렸다. 트위터 계정으로 날아오는 응원 메시지는 큰 힘이 됐다. 이들의 활동으로 한 대형 포털에서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이 실시간 검색순위 1위가 되기도 했다.

저녁 7시, 다시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양말이 농성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500명이 일제히 9일 묵은 양말을 벗었다. 해진 양말은 볼트 공구함, 10대의 차체, 중장비 전선 등 곳곳에 널렸다. 이제 부족한 것은 비누였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족한 것은 이미 너무도 많았다.

정규직 일부는 고용 불안 파급될까 불안
» 지난 11월23일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집회를 하는 모습. 9일간의 점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한겨레 울산=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지난 11월23일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집회를 하는 모습. 9일간의 점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한겨레 울산=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밤 9시30분, 집회를 마친 뒤 취침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각자의 자리에서 홑겹 비닐을 덮고 눕는 것이 다였다. 비닐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그마저 부족한 일부는 차체에 들어가는 방습재료를 덮거나 굴러다니는 신문을 이어붙여 덮었다.

그중에서도 박아무개(34)씨는 유난히 콜록거렸다. “9년 동안 근무하면서 폐에 염증을 얻었고 농성 중에 더 심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동차 내부에 선을 까는 작업을 하면서 먼지를 많이 먹었다. 정규직들은 하지 않는 기피 업무였다. 점거 직후에도 기침이 멈추지 않아 지회에 알리고 바깥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게 5일 전이었다. 나가는 것은 쉬웠지만 들어올 때는 경비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농성에 참여해야 하는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나만 빠지면 쪽팔리잖아요.” 그런데 바깥에 다녀온 사람답지 않게 옷이 얇았다. 작업복 그대로였다. 아내가 등산점퍼를 권했지만 거절했다. 작업복만 입고 떨면서 자는 동료들 옆에서 마음 편히 잘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박씨는 옷을 입느니 마느니 오랜만에 부부싸움을 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대치 중인 경비보다 화나 있는 아내가 더 신경 쓰인다고 했다. 걸려온 전화에 달래는 말은 못하고 “다음달 월급 없으니 잘 쪼개쓰라”는 말만 남겼다.

밤 12시를 넘어 기자도 농성장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한 인심 좋은 조합원이 발은 꼭 덮어야 한다며 검은 비닐봉지를 건넸다. 실은 취재 배낭에 옷이 더 있었다. 현장에 난방이 되지 않는다는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방을 열 수 없었다. 입고 들어간 옷만 해도 농성자에 비해 지나치게 두꺼웠다. 1시간 정도 뒤척인 뒤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이 번쩍 떠졌다. 코끝이 시렸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굳은 어깨는 얼어붙은 것처럼 삐걱거렸다. 일어서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온도계를 확인했다. 처음 들어와 확인한 것과 동일하게 16도였다. 이상했다. 알고 보니 며칠 동안 낮·밤과 상관없이 그 온도계는 16도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한 조합원이 지회 간부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일단 사람은 좀 살자”며 “침낭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 읍소에 가까운 건의를 하고 있었다. 지회장은 “침낭은 현대차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했다. 이런 항의가 처음이 아닌 듯했다. 회사 쪽은 파업의 장기화를 막기 위해 난방·온수·침낭 등은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점거 열흘 째인 11월24일 오전 11시, 3층으로 올라온 강성신 1공장 정규직 대의원과 인터뷰 중이었다. 갑자기 형광등이 전부 꺼졌다. 단전 조처였다. 전기가 나가자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더듬어가며 자리를 옮겼다. 어둠 속에서 중장비는 흉기나 다름없었다. 강 대의원은 급하게 정규직 지부로 전화를 돌렸다. “지금 단전됐습니다. 식수가 공급되지 않으니 조치해주세요.”

현대차 내부는 사정이 복잡하다.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되면 지금까지 비정규직에게 전가되던 고용 불안이 정규직 전체로 파급될 우려가 있고, 연봉도 현 수준을 보장받기 힘들 수 있다는 게 일부 정규직들의 의견이다. 게다가 비정규직이 기피 직역을 전담했다는 점에서 기존 정규직이 가진 불안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현대차의 전체 정규직은 4만5천 명이고 1공장은 3600명 정도다. 이들의 의견은 아직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있다. 금속노조가 현대차 문제와 관련해 파업을 예고한 것과는 별개로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파업 찬반을 묻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성신 대의원도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현대차 정문을 막아선 ‘몽박’산성

하룻만에 다시 정문을 나섰다. 파업 2일차에 만들어져 ‘몽박’산성이라고 불리는 컨테이너 차단벽은 와이어와 용접 작업으로 더 단단해져 있었다. 이는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2005년 현대차 비정규직들이 5공장의 라인을 세웠을 때도 현대차 쪽에서는 “정당, 시민단체 등 외부 인사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며 컨테이너를 쌓았다.

11월25일, 금속노조 박유기 위원장과 현대차 정규직 노조인 현대차지부 이경훈 지부장, 비정규 노조인 현대차 비정규직 3지회(울산 이상수, 아산 송성훈, 전주 강성희 지회장),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김주철 본부장 등은 특별교섭단을 구성하고 회사 쪽에 교섭을 요구하기로 뜻을 모았다. 농성자의 고용 보장과 비정규직지회 지도부의 안전 보장, 불법파견 교섭에 대한 대책 등이 주 내용이었다. 회사 쪽에서는 “제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농성 현장의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이를 거부했다. 불법파견과 관련된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불법 점거자 여러분, 지금 나오신다면 선처를 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회사 쪽의 선무방송은 계속됐다.

울산=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이상수 울산 지회장 인터뷰
“우리는 대형사고를 쳤다”

500명이던 조합원이 7월 대법원 판결 뒤 1600명을 넘어섰을 때도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막상 점거농성을 시작하니 조합원 하나하나가 준비된 듯 흐트러짐 없이 열흘을 버텼다.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이상수(39) 울산 지회장을 만났다.
지금 현대차 쪽과 진전된 협상 내용은 없나. 원청인 현대차는 우리를 대화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황이 열흘간 변치 않았다. 또 지난 수요일(11월17일) 이후 7일 동안 비상(회사 쪽 경비들의 해산 시도)이 하루 한 번씩은 걸리고 있다.
9일이면 지칠 만도 한데 다들 밝다. 나도 놀라고 있다. 우리는 2000년 이후 세 차례나 농성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완전히 다르다. 그 힘이 너무 커서 나도 놀랐다.
그런 힘은 어디서 왔다고 보나. 비정규직에 대한 일반 정서가 우리에게는 자신감이 된다. 사람들의 공감이 큰 힘이다.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전히 경제 논리가 나온다. 농성으로 인한 손실액이 수천억원대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측은지심이라는 말에는 ‘관용’이라는 말도 포함돼 있다. 경제 논리로도 비난받을 수 없는 처지임을 사람들이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비폭력으로 간다. 몸싸움이 일어났을 때 맞고 끌려가고 있다. 조합원들에게 사실 미안하다.
알고 보니 고액 연봉이라는 시선도 있다. 토요일 오후 5시에 나와 일요일 새벽 5시에 퇴근하고 주야간 12시간 일하는 7년차가 연봉 3천만원에서 조금 더 받는다. 오해다.
앞으로의 전망은. 교섭의 장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회적 과제를 우리가 던졌다. 우리는 대형사고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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