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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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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만 불러다 조사하면 다 나올 텐데”

형사처벌감이지만 내정 철회로 유야무야돼가는 ‘천성관 사태’…
검찰이 평소 강조하던 ‘실체적 진실 규명’은 어디로 갔나
등록 2009-07-24 11:09 수정 2020-05-03 04:25

이른바 ‘미스터리맨’ ‘스폰서 검사’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킨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현 서울중앙지검장)가 결국 낙마했다. 국회 청문회까지 거친 검찰 수장 후보자가 추문에 휩싸여 사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문제 있는 공직 후보자가 조기에 처리된 보기 드문 사례”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하지만, 사건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들어 부쩍 ‘친서민’ 행보를 보인 이명박 대통령부터 타격을 입었다. 사재를 털어 장학재단을 만든다고 발표까지 했건만, 이번 사태로 이미지 개선 작업은 말짱 도루묵이 됐다.

지난 7월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서울 강남 고가 아파트 구입과 고급 승용차 무상 사용 등과 관련한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지자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지난 7월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서울 강남 고가 아파트 구입과 고급 승용차 무상 사용 등과 관련한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지자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천성관 사태’는 검찰에도 도드라진 생채기를 남겼다. 이와 관련해 한 검찰 간부는 “(천 검사장이) 검사들 얼굴에 똥칠을 한 셈”이라고 표현했다. 검사들은 으레 수십억원을 거저 빌려 집을 사거나 공짜로 차를 얻어타는 비리 혐의자들이며, 별 6개짜리 최고급 호텔 결혼식장을 ‘조그만 교외’라고 말하는 뻔뻔스런 사람인 것처럼 비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 평검사는 “총장이 제네시스를 땡겨서 타고 다니면 평검사는 SM5 정도는 땡겨서 타고 다니는 것으로 일반 국민들은 생각하지 않겠냐”며 “스스로 처신이 그랬다면 (검찰총장에) 지명됐더라도 ‘그릇이 아니다’라며 사양했어야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말했다.

사실 다 맞는 지적들이다. 개인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검찰 전체가 욕을 먹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비난 이전에 짚어야할 지점이 있다. 바로 ‘사퇴하면 다냐?’라는 질문이다.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천 후보자의 처신은 도덕적 비난 수준을 넘어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도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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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상식 수준을 뛰어넘는 지인의 도움들이다. 수십억원을 빌려주고 최고급 차량 리스비를 대납해준 의혹이 있는데, 과연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혜택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여기에 본인의 해명은 더욱 의혹을 부추긴다. “경기도에 사는 지인의 아들이 서울 올 때 주차할 곳이 없어 (자신의) 아파트에 주차 등록을 해줬다” “지인의 아들을 자주 재워주기도 했다” “차를 전혀 안 탔다는 것은 아니다” 등으로 눈 뜨고 나면 말이 바뀌어 있었다.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관련 의혹과 해명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관련 의혹과 해명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검사 얼굴에 똥칠” 검사들도 다양한 비판

청문회를 지켜봤다는 한 검사는 “(천 검사장의 해명은) 피의자들이 보이는 가장 클래식한 변명들이다. 맘먹고 한 3시간만 불러다 조사하면 다 파헤칠 수 있을 텐데…”라며 말을 줄였다.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결국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철저한 진상조사임을 확인해주는 얘기다. 조사를 통해 대가성이 확인된다면 형사처벌 절차를 밟아야 하고, 대가성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중징계 사안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민재 전 부산고검 검사의 사례가 비교 대상이 될 법하다. 천 후보자의 사법연수원 3년 후배인 김 전 검사는 위신 손상 등의 혐의로 지난해 12월 해임됐다. 한 건설업체로부터 법인카드를 넘겨받아 3년 동안 9700여만원을 사용한 혐의였다. 검찰은 조사 결과 대가성은 없었다며 형사입건은 하지 않았지만, 김 전 검사를 법무부 징계위원회로 넘겼다. 징계위원회는 검사징계법상 가장 중한 징계인 해임을 의결했다. 이로써 김 전 검사는 3년 동안 공직 취임은 물론 변호사 활동이 금지됐고, 퇴직 수당도 4분의 1이 감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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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검사가 3년 동안 썼다는 카드값 9700만원은 한 달 평균으로 계산해보면 200만~300만원꼴이다. 천 후보자가 지인에게서 도움받았다던 거액의 이자나 차량 리스료도 이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카드와 차량은 달라서였을까? 천 후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처가 없다. 조처는커녕 비호가 대단했다. 청문회 준비팀에 차출된 검사들은 ‘피의자들이 내놓는 가장 클래식한 변명’들을 전달하며 언론 보도를 무마하기에 바빴다. 결과적으로 피의자 조사를 업으로 하는 검사들 상당수가 진실을 은폐하며 국민을 우롱하는 일의 공범이 됐다.

천성관 후보자의 수입·지출 대비

천성관 후보자의 수입·지출 대비

스폰서로부터 법인카드 받아 쓴 검사는 해임

사실 천 검사장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바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보인 거짓말 논란이다. 천 검사장을 검찰 총수로 내정한 이명박 대통령마저 이 대목을 짚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7월15일 검찰총장 내정 철회 사실을 전하며 “검찰은 잘못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한 사람들을 조사하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검찰이 국회 청문회에서 거짓말을 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형사처벌은 어려워 보인다. 국회 법사위원장실 관계자는 “국정조사나 국정감사 증인의 경우 위증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증인선서를 하는 반면, 인사청문회 대상자는 국회에서 증인선서를 하지 않는다”며 “법적으로 (천 후보자에 대한) 고발이 가능한지를 검토해봤지만, 인사청문회법상 미비점으로 인해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고 밝혔다. 사실 법규의 미비점을 뚫고 요행히 살아나는 이런 행태는 수단 좋은 피의자들이 주로 보이는 것으로, 일선 검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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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놈은 쫓아내고 힘있는 놈은 비호해주고”

상황이 이러하니,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검찰 내부에서도 ‘이건 아니지 않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청문회를 지켜본 직후 한 검찰 간부는 “천 검사장과 김민재 부장이 다른 게 뭐냐. 힘없는 놈은 잘라내고 힘있는 놈은 총장 지명되고 저렇게 보호를 받고 있다. 밖에서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 지경이다. 스스로가 빨리 나가는 게 해법”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의 말대로 천 후보자는 청문회 이튿날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검찰은 그의 여러 의혹들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사는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 사실과 증거를 수사하여야 한다”(195조)고 규정하고 있다. 또, 검사들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 또는 직무과 관련해 가장 자주 입에 올리는 게 ‘공익의 대변자’ ‘실체적 진실의 규명’이란 말이다. 그런데, 검찰 총수 후보자와 비리 의혹 관련해서는 형사소송법 조항도, 검사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말들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 침묵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검찰도 국민도 서로 잘 알고 있을테지만 말이다.



청문회 단골 코멘트 “기억나지 않는다”
의혹 부인하며 위증 논란도 피하는 ‘묘수’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난 7월13일 열린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천성관 후보자가 내놓은 답변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말이다. 전날까지도 언론 등에서 제기된 무수한 의혹에 대해 “청문회에서 밝히겠다”며 입을 닫았던 그가 갖고 나온 ‘비장의 카드’였던 것 같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은, 바늘로 콕콕 찌르듯 시시콜콜 자신의 과거를 파헤치는 청문위원들의 예봉에 맞서는 최고의 무기다. 구체적인 정황까지 확인한 날카로운 질의도 스펀지와도 같은 그 대답 앞에서는 맥이 빠지고 만다. 머리가 나빠져 기억이 안 난다는 데 어쩔 건가. 적극적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위증 논란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천 후보자는 선배 공직자의 청문회를 보며 이 답변을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2007년 11월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장에서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은 임채진 후보자를 향해 “삼성에버랜드에서 운영하는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에서 부산고 선배인 이우희 전 에스원 사장과 부산고 후배인 삼성 전략기획실 장충기 부사장과 골프를 쳤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김용철 변호사한테서 구체적인 제보를 받은 터였다. 그러나 임 후보자는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현장에서는 “안 쳤다는 게 아니라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질책이 나왔다.
천 후보자보다 여드레 앞선 지난 7월5일 청문회를 치른 백용호 국세청장 후보자도 마찬가지였다. 땅과 아파트 매매 과정에서 수차례 ‘다운 계약서’를 작성해 3천만원이 넘는 세금을 탈루했다는 의혹에 대해 백 후보자는 “고민 없이 관행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것 같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어물쩍 넘어갔다.
다른 공직 후보자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용케 청문회의 질곡을 벗어났지만 천 후보자는 그러지 못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천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하이라이트는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스폰서’ 의혹을 받은 박아무개씨와 천 후보자의 부부 동반 일본 여행을 추궁한 대목이었다. 박 의원은 두 부부의 출입국 기록과 골프채 통관 사실, 면세점 구매 내역까지 완벽하게 확인해 거세게 몰아세웠다. 궁지에 몰린 천 후보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그때 상황을 말하면, 2004년도 휴가철이고 그래서 비행기에 한국 단체관광객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를 같이 탔는지는 모르지만, 같이 간 기억은 없습니다.”
우연히 한 비행기를 탔다고 해도, ‘머리 좋은’ 검사님이 그걸 기억 못할까. 도덕성에서는 관대한 기준을 갖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도 이 부분을 ‘치명적인 거짓말’로 규정했다고 한다. 거짓말을 자꾸 하려다 보니 횡설수설하게 되고, 결국 “같은 비행기를 탔을 수는 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이 꼬여 자기 발등을 찍게 된 것이다.
‘미스터리맨’은 이렇게 공공의 영역에서 퇴장했다.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속이려 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도 약발이 안 먹힌다는 좋은 교훈을 남겨주고.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2팀 dokbul@hani.co.kr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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