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에 오랜만에 화기가 돌았다. 정권 방송 장악 반대 투쟁을 주도한 KBS사원행동 관계자들에게 내려졌던 파면 등 중징계가 10여 일 만에 철회됐기 때문이다. 과정을 보면 더욱 뜻깊다. 모처럼 기자협회와 PD협회가 똘똘 뭉쳐 제작 거부 투쟁에 나섰고, 허를 찔린 회사 쪽이 꼬리를 내린 모양새가 됐다.
이같은 ‘사건’의 한가운데 양승동(48) PD가 있다. KBS사원행동 대표인 그는 지난 1월16일 김현석 전 한국방송 기자협회장과 함께 파면됐다가, 29일 재심을 거쳐 정직 4개월을 통보받았다. 1월30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개인적으로 동료와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죠. 다들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고 나섰으니까요. 한국방송 전체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병순 사장 취임 뒤 회사 분위기가 많이 위축됐잖습니까. 뉴스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쪽에서 무력감도 많이 퍼졌고요. 그런데 이번 투쟁을 계기로 힘을 좀 회복한 것 같습니다. 외부나 경영진의 부당한 압력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회사 쪽이 16일 양 PD 등에게 중징계를 내렸을 때부터 ‘부당하고도 음흉한 조처’라는 말들이 돌았다. 지난해 12월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강동구 위원장이 당선되자 이병순 사장 쪽은 크게 고무됐다고 한다. 강 위원장이 정연주 전 사장 퇴진을 주도한 전임 노조 부위원장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장 쪽의 예상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강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KBS사원행동 쪽에 노조 동참을 요청했고, 사원행동 쪽도 이에 부응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결정된 중징계가 노조와 KBS사원행동을 갈라놓으려는 의도가 아니겠냐는 분석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징계 결정 이후 오히려 기자와 PD들이 대거 징계 철회 투쟁에 나서자 회사 쪽은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결국 여러 경로를 통해 ‘재심을 청구해라. 조처해주겠다’는 뜻을 기자·PD들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월28일 밤 재심 청구를 접수한 회사는 이튿날 오전 10시 인사위원회를 열어 징계 수위를 낮췄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노조가 며칠 만에 징계 철회 요구 대열에서 이탈한 것에서 보듯이, 한국방송 내부 ‘동력’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정직 4개월의 징계 역시 가볍지 않다. 월급도 대폭 줄고, 몇 년 동안 승진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피해가 크다. 양 PD는 “일단 징계는 수용하되, 변호사와 상의해 법적 대응은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사장을 강제로 몰아내기 위해 이사회가 불법적으로 열렸으며 이를 저지하려 한 것은 정당했다는 확신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원한 것은 아니지만 넉 달 동안 놀게 됐는데 그동안 뭘 할까?
“PD 생활 20년인데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야죠. 프로그램 기획이나 방송정책과 관련한 공부를 좀 하면서, 틈틈이 등산도 할 생각입니다. (잠시 침묵) 그런데 2월 임시국회가 열리면 (재벌 등의 방송 진입을 허용하는) 방송법이 또 상정되지 않겠나요. 모든 것을 잊고 초야에 묻힐 수는 없는 상황이어서, 고민이 많습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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