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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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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에서 맞는 두 번째 12월

농성 460일 지난 코스콤 비정규 노동자들, 몸 성한 이 없이 맞는 겨울
등록 2008-12-26 13:39 수정 2020-05-03 04:25

‘부르릉, 빵빵.’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앞을 지나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쉴 새 없이 코스콤 비정규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처음엔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잤는데 1년 넘게 소음에 시달리다 보니 이젠 익숙해졌어요.” 12월16일 단식농성 22일째를 맞은 황병화(27)씨가 천막 바닥을 가리키며 멋쩍게 웃었다. “버스가 지나가면 이렇게 땅이 흔들리기도 해요.”

‘옛 동료’들의 외면·무시에 상처

‘비정규직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여의도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462일째. 그는 지난해 3월 코스콤 협력업체에 입사할 때만 해도 자신이 비정규직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빨리 농성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취직하라”고 반대하는 고향의 부모님께 “우린 이길 거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때론 대들고, 때론 설득하는 것도 이젠 힘겹다. 자취방 월세는 밀린 지 오래고,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못한다.

460여 일째 비정규직 철폐 농성중인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460여 일째 비정규직 철폐 농성중인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매일 아침 8시, 그의 하루는 증권선물거래소 정문 앞에서 출근하는 ‘옛 동료’들을 상대로 선전전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때 같이 일했던 코스콤 정규직 노동자들이 눈도 제대로 안 맞춘 채 스쳐지나갈 때면 마음이 아프다. 아침 식사는 건너뛰고, 점심·저녁은 노조에서 지급되는 돈으로 해결한다. 한 끼 3천원. 밥다운 밥을 먹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그런 ‘밥’마저도 지난 11월25일부터는 못 먹고 있다. 회사에 ‘성실 교섭’을 촉구하며 21일 동안 단식농성한 황영수 비정규지부장을 뒤이어, 조합원 20명이 단식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단식 열흘이 지나자 조합원들은 줄줄이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22일 넘게 버티고 있는 건 황씨와 전용철(40)씨 둘뿐이다.

“몸이 성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 경비용역들한테 맞아서 다치고, 2만원짜리 야전침대에서 자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리고….” 전씨도 세 번이나 뇌진탕으로 쓰러졌다. 지난 3월 서울 영등포구청이 용역직원을 동원해 천막농성장을 철거했을 때는, 천막에 쇠줄로 몸을 묶고 앉아 있다가 구둣발에 머리를 걷어차여 정신을 잃었다. 단식, 고공농성, 삭발…. 그동안 안 해본 투쟁이 없다.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져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래도 버텨온 건 “직접고용 요구가 너무나 상식적이라고 믿어서”다. 그는 1991년 코스콤의 하도급 업체인 증전엔지니어링에 입사해 17년 동안 증권사 장비 설치 업무를 해왔다.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3분의 1도 안 되는 월급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해 5월 코스콤은 새 도급업체와 계약을 맺도록 요구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명함을 갖고 일하던 정규직과 비정규직들 사이엔 갑자기 높은 칸막이가 쳐졌다. 전씨를 비롯한 비정규 노동자 90여 명은 전적을 거부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가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직접고용을 피하려 꼼수를 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부와 법원도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을 벌여 “코스콤이 불법파견 노동자를 썼다”고 판정했고, 지난 7월 서울남부지법은 “비정규 노동자 66명의 실질적인 사용자는 원청업체인 코스콤”이라고 판결했다. 회사는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국회 국정감사에 불려나가 집중 공격을 받았다. 시민사회단체들의 비판 성명도 쏟아졌다.

하지만 회사엔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회사는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봐야 한다”고 버티며, 단체교섭위원들의 건물 출입을 막았다. “회사의 미래가 불안해 비정규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도 들었다. 코스콤은 2011년 증권선물거래소와의 금융시세 정보 제공 계약이 끝나고, 전산기능 통합으로 인해 증권시장에서 회사의 입지가 축소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정규직 노조의 이기적인 태도도 한몫했다.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은 “비정규직과 회사 사이 대화를 오히려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1년 전 코스콤 정규직 노조를 제명했다. 회사 임직원들이 사우회를 통해 사내 하청업체 이익금 수억원을 배당받고, 전직 노조위원장들이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규직 노조는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비정규 문제 해결에 나 몰라라 했다.

“불법파견” 판정에도 꿈적 않는 회사

지난해 코스콤 임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9185만원. 비정규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고작 1800만원이다. 이들을 정규직화하기 위해 1년에 필요한 17억원은, 1년 새 회사가 변호사와 경비용역비로 쓴 돈이면 충분하다. “경영이 어려워서”라는 회사 쪽 설명이 변명처럼 들리는 이유다. 그래서 비정규 노동자들은 더 서럽다. 전씨는 “노조 홈페이지에 ‘감히 랜케이블이나 깔던 놈들이…’라거나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곁에 두는 게 아니었다’라는 댓글을 보면 절망스러웠다”고 말했다.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비정규직’이라고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이들이 3박4일씩 막노동을 하거나 다른 노조 홈페이지를 구축하는 일 등을 하면서 근근이 버티는 동안, 코스콤 사장은 세 번 바뀌었다.

김광현 사장 취임 뒤 지난 11월부터 노사교섭은 급물살을 탔다. 조금씩 ‘희망’ 섞인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12월15일엔 노사 실무자들이 만나 구체적인 잠정 합의문까지 작성했다. “별도 직군을 신설해 직접고용한다”는 최대 쟁점에서 노사가 의견을 모은 것이다. 이튿날 오후 서울지방노동청 남부지청에서 최종 합의문을 작성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이날 교섭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코스콤의 안정적인 수익구조 보장에 노력한다’는 부속 합의문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탓이다. 코스콤 정규직 노조는 “대주주인 증권선물거래소가 압박해 회사가 합의문에 서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전산 업무 독점을 놓고 증권선물거래소와 코스콤 사이엔 계속 갈등이 빚어져왔다. 증권선물거래소 쪽은 “애초 코스콤이 비정규직 문제와 별개인 ‘업무 보장’을 무리하게 주장한 것이 문제”라며 “압박한 일은 없다”고 반박했다. 논란이 커지자 회사는 12월17일 “외압은 오해고, 최종 합의는 내부 논의 중”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합의문 작성 앞두고 논란… 새해에는?

또다시 비정규 노동자들에겐 상처만 남았다. “워낙 회사가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꿔와서, 최종 서명 전엔 어떤 약속도 못 믿겠어요. 그저 기다릴 수밖에요.” 요즘 정인열(31) 부지부장은 지난해 12월31일이 자꾸 떠오른다. 보신각 앞 등 서울 도심 5곳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탑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이다가 몇 시간 만에 끌려내려왔던 기억. 12월17일 코스콤 비정규 노동자 등 80여 명은 회사에 교섭을 촉구하는 집단 단식농성을 ‘또’ 벌였다.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 회사 쪽의 ‘결단’을 기다렸지만, 회사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최종 합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천막을 덮고 있는 얇은 비닐천막 틈새로 파고드는 겨울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코스콤 비정규 노동자들은 이렇게 두 번째 연말을 또다시 거리에서 보내야만 하는 걸까.

황예랑 기자 한겨레 사회정책팀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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