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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복무, 한국 사회의 업그레이드

등록 2008-07-24 00:00 수정 2020-05-03 04:25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처벌하는 제도와 법에 동의해야 할까

▣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언론홍보학 kwonhb@dju.ac.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30여 년 전의 겨울, 나는 논산훈련소에 있었다.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순진하게 입대했던 나는 불과 하루 만에 탈영을 고민하는 군인이 되고 말았다. 군대에서 짐승 같은(아니 짐승도 이런 모욕을 당하지는 않는다. 짐승에게 ‘얼차려’를 주지는 않는다) 대우를 받으면서 탈영하기에 적당한 담을 봐두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용기 부족으로 탈영을 포기했지만 그 이후 군생활에서도 징병제 군대의 야만성을 겪으며 그것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군대에서 겪은 일 때문에 정신적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것은 심지어 50대인 내 머릿속에서도 무의식 중에 나타난다. 제대를 코앞에 두고 군복무 기간이 늘어나는 꿈, 분명히 군복무를 마쳤는데도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꿈, 상관에게 맞거나 가혹 행위를 당하는 꿈 등을 여전히 꾼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주변에서 군대 갔다 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다. 구타는 거의 사라졌지만 억압과 다른 형태의 폭력은 여전하다. 휴가 나오는 제자들에게 꼬치꼬치 물어서 확인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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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국가안보의 신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한 동료가 집총을 거부해서 훈련소 기간병들에게 참혹하게 구타당한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왜 쟤는 집총을 거부하냐?”라고 물었더니 “잘은 모르지만 여호와의 증인이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국기에 대한 경례를 무시했던 ‘초등학교’ 친구가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도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유신체제의 폭압적 지배 속에서 국기와 집총에 대한 거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인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더구나 군대 안에서 말이다. 우리는 숨죽여 구타가 끝나기를 바랄 뿐 어떤 저항도 할 생각을 못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 동료는 그날 밤부터 보이지 않았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남한산성에 끌려갔다고 했다.

‘이단’으로 취급되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존경심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다. 나와 같이 소심한 사람에 비하면 자신의 종교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무자비한 폭력을 견뎌내는 그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해서 혼자 살 때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포교하던 여호와의 증인이 찾아오면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버릇이 생겼다(물론 그 바람에 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와서 당혹스러웠지만 말이다).

놀라운 것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절차적 민주화를 이뤄낸 뒤에도 이런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에 불교신자로는 처음으로 오태양씨가 살생하지 말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뒤에도 여전히 그 권리는 법적으로 전혀 보호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여호와의 증인이 대부분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한 해에 최소 400명 이상이 감옥에 끌려가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최근에 국방부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민적 합의’를 위해서 ‘연구용역을 발주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대체복무제를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시민의 기본권에 속한다. 대한민국 헌법도 이 권리를 보장한다. 문제는 이 권리가 국방의 의무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내가 자주 인용하는 헌법 제37조 2항에 따르면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전 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법철학의 해석에 달려 있지만 자신의 양심과 종교적 원칙을 국가가 개입해서 제한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건 자신의 사상과 양심에 따라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이다. 국제앰네스티는 물론 한국이 이사로 있는 유엔인권이사회도 1987년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상, 양심, 종교적 자유의 정당한 행사’로 규정했다. 대체복무제는 이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적합한 방안이다. 사회적 형평성과 개인의 양심의 문제를 조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이런 거부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것은 분단체제와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국가안보의 신화와 국가주의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유보돼야 하고 그 앞에서는 어떤 개인의 권리도 용납되지 않는 정치적 문화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다. 국가안보는 초월적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개인을 부속품 정도로 취급하는 집단주의적 국가주의 문화가 강한 것도 문제다. 그래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부정하는 것은 불온하고 반국가적인 행위로 매도된다(어떤 국가적 당위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개인주의 문화가 필요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어떤 집단의 이익보다도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 아닐까?).

둘째, 거부권을 비판하는 이들은 한국의 특수성을 내세운다.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엄중한 분단 상황’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이나 대체복무제는 유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통일 전의 서독에서도 적국인 동독을 마주 보면서도 양심적 병역거부 권리는 인정됐고 매년 수만 명의 대체복무자들이 양산됐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의 대만에 대한 현실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체복무제가 시행되는 대만의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선진국 중에서도 시민의 권리 수준이 떨어지는 미국조차도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한 바 있다.

특정 교리에 머무르지 않아

더구나 이 논리는 분단 때문에 서구적 민주주의를 유보해야 한다던 박정희 정권의 주장과 유사하다. 하지만 한국은 분단체제임에도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평화적 정권 교체와 민주화를 이뤄냈다. 더 이상 분단체제의 ‘현실’을 핑계로 사용하지 말자.

셋째, 대체복무제가 시행되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병역 의무를 거부하는 이들의 양심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내세운다. 또한 “모두 군대를 기피하면 누가 나라를 지키느냐”는 항변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방의 의무에 대한 무비판적 긍정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대체복무제가 시행돼도 그것은 여전히 ‘핸디캡’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안대로라면 현재 군복무 기간의 2배를 대체복무자들에게 부과하게 될 것이다(물론 이 방안은 그들에 대한 처벌적 성격이 강해 문제가 있다). 따라서 병역 기피를 위해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설사 그런 악용의 소지가 있다 해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다. 대체복무제도 시행착오를 통해서 정착될 수 있다. 심사를 철저히 하면 된다. 어떤 제도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넷째,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면 군대 가는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주장이다. 이 논리야말로 전형적인 흑백 이분법에 속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비기독교인’이 될까?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양심에 따라 군대를 가고 또 다른 사람은 양심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게 될 뿐이다.

다섯째, “평화를 말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기본 전제가 되는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겠다는 것 역시 위선이다” 혹은 “국가안보 없이 평화 없다”라는 주장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해라”라는 서양의 격언과 유사하다. 이러한 주장을 펼 수는 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되레 징병제와 병역 의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군사적 긴장이 생겨난다는 주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평화 없이 국가안보 없다! 이들은 평화를 핑계로 징집을 면제받으려는 병역기피자들이 아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야말로 평화를 염원하고 준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단지 특정 종교의 교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평화주의는 대표적인 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총을 잡거나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없습니다”는 종교적인 이유지만 “휴전선에 배치된 남과 북의 군사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여호와께서는 어느 군대가 이기기를 바라겠습니까. 여호와의 눈으로 보면 모두 형제들입니다”(양지운)라는 주장은 분단체제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평화주의적 저항이다. 또한 남한과 북한을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반공반북주의를 넘어서며 매우 탈분단적이다. 이들을 지지하는 또 다른 평화주의자의 목소리도 들어보자. “군대는 결국 폭력을 위한 집단이라는 점, 그 조직은 폭력의, 폭력에 의한, 폭력을 위한 곳이라는 점은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버거운 곳일 겁니다. 누군가를 살상한다는 생각을 갖고 그런 용도의 흉기를 매일 손에 쥐고 그 목적을 위해 연습하고 훈련받는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심영구)

이와는 반대로 군대가 협동정신과 극기력을 기르고 성인이 되는 긍정적 경험을 부과한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군대에 ‘순순히’ 입대하면 된다. 하지만 비폭력주의자에게 군복무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들에게는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권위 및 폭력에 대해 복종심을 키우는 군 경험이라는 게 사람들을 수직적 사회질서에 순응적으로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유약한 철부지’가 ‘어른’ 혹은 ‘사람’이 되어서 돌아온다는 것으로 오인한다.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통념은 기존 사회질서에 비판 의식 없이 동화될 수 있는 바탕이 군필자들에게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 경험을 통해서 총명함, 섬세함, 창의성, 저항성 등은 거세된다. 그는 언제나 명령만 주어지면 무기를 들고 ‘적’으로 지목한 사람이나 집단에 폭력적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잠재적 가해자로 변해 있다. 군 경험은 유사시에 폭력을 동원할 수 있는 예비적 심리·신체 훈련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힘든 육체적 훈련,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 폭력 연습을 통해서 남자들은 여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여자들의 ‘보호자’가 되며 성차별적인 남성성을 부여받는다. 국방의 의무를 완수함으로써 군필자 남자가 국민적 정체성을 독점·전유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나라를 지키는 당당한 한국인’이 된 것이다.

‘사람’ 되어 돌아오는 제자들…

나는 아직도 호기심과 생기로 가득 찼던 수많은 제자들이 군생활 뒤 어떻게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지를 매번 확인할 때마다 그들의 변화에 대해서 안타까운 심정이 든다. 양심적 병역거부 권리가 인정돼도 징병제 군대의 본질에서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체복무제 도입 이후에는 한국 사회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모병제로의 전환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 중요한 것은 이런 징병제 군대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고 그것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에게 대안적 출구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 그런 사고방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생각과 다를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에게 주먹질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징병제 군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제도와 법에 동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무릇 민주주의 사회라고 한다면 이러한 정치·사회·종교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제도와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지 않을까.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한 사회의 의식 수준을 나타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자의 양심적 병역거부 권리를 인정하는 순간 한국 사회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면서 사람이 좀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권혁범의 세상읽기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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