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태안의 기적’은 불온하다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재난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일어나는 범국민적 온정주의…근본적 문제 은폐하려는 권력의 의도 아닌가

▣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언론홍보학 kwonhb@dju.ac.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대한민국의 저력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선진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태안을 자원봉사의 메카로 삼아 정신운동으로 승화시킬 계획이다.” 태안반도 지역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한 이완구 충남지사의 최근 발언이다. 이런 말은 환경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환경 및 생존권 파괴의 근본적·구조적 원인을 파헤치지 않고 문제를 뭉뚱그리거나 피해서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환경 문제를 언급하거나 다룬다고 해서 생태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환경문제를 그릇된 방향으로 오도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지사는 한편으로는 기름 유출 사고의 후유증을 얘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투자 유치를 통한 경제 활성화에 사활을” 걸고 황해경제자유구역을 두바이 같은 ‘명품 경제 구역’으로 만들 거라고 호언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경제지상주의가 사실은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결여돼 있다. 이 말을 제대로 독해하면 이 지사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요구의 모순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고 환경에 대한 관심이 개발주의의 액세서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선진국’ 담론은 이제 진부하기도 하지만 과연 ‘경제 활성화’와 봉사활동을 통해 선진국이 될 수 있는지, 어떤 대가라도 치를 만큼 선진국의 생활양식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은 전혀 없다. 경제성장 제일주의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고 온전한 바다 및 갯벌 생태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사가 드러내는 사고 체계는 주류 언론과 한국 사회의 대처 방식과 반응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난다. 그건 크고 작은 재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이 자동 조건반사적으로 되풀이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다.

금 모으기 운동, 애국주의의 승리

‘그들이 태안의 기적을 만들었다’ ‘자원봉사자, 우리의 진정한 영웅’ ‘감동이 싹튼다’ ‘한마음 한뜻으로’ ‘태안의 기적’ ‘세계도 놀란 자원봉사 인간띠’ ‘검은 절망 걷어내는 희망의 자원봉사’ ‘자원봉사자 백만의 신화’ ‘위기에서 저력을 발휘하는 한국인’ 등의 신문 헤드라인은 뭘 암시하는 것일까? 초기에는 생태계의 파괴와 주민 생존권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바로 문제의 초점이 기름 유출에서 자원봉사를 찬양하고 전면에 내세우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으로 옮겨가버렸다. 기름 유출의 구조적이고 정책적인 원인에 대한 관심은 손쉽게 사라졌다.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에 대한 진단과 책임소재 규명을 끝내기도 전에 항상 ‘희망’을 조급하게 내세우는 한국 사회의 관성 때문이다.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자는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면서 온정주의적 접근으로 사건을 얼버무리려 한다. 지배적 정치·경제 권력층이 당연히 선호하는 방식이다. 조건반사적으로 ‘온 국민’과 ‘온정의 물결’부터 찾고 본다.

그것은 가령 ㅅ일보 같은 수구보수적 신문이 환경문제에 열을 올리는 특정한 방식과 이유에 관련된다. 거기에 실리는 글들을 살펴보면 환경문제에 대한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탐구는 아예 빠져 있다. ‘자연을 사랑하자’ ‘강을 살리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서’ 같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입장만 보인다.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 메커니즘 같은 정치·경제적 원인이나 정책 및 제도적 변화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 경제제일주의에 대한 성찰과 비판도 전혀 없다. 이런 식으로 환경문제를 인식하자는 것은 말만 번지르르 하고 책임을 개개인에게 돌리고 실제 요구되는 구조적·제도적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자연을 지키자’는 말은 초등학생도 쉽게 할 수 있다.

이번 보도에서도 기껏해야 예인선, 유조선, 해양수산청 관제소 사이의 교신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봉사활동을 왔던 사람들의 헌신적이고 ‘감동적인’ 자세와 ‘태안의 기적’만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큰 재난을 똑같은 방식으로 알리고 대처하는 한국 사회의 습관적인 반응에서 한 치도 자유롭지 못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97년 말 한국의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초기에는 그것을 초래한 한국 경제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그것을 책임져야 할 정치·경제 엘리트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이 벌어지면서 갑자기 논의의 핵심이 개방적 ‘애국주의’로 옮아가고 그러면서 위기의 원인 및 책임에 대한 탐색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위대한 한국인의 저력’ 강조는 손쉽게 민족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게 하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중·장기적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를 은폐하는 기능을 하였다. ‘온 국민’과 ‘범국민’의 난무 속에서 그 내부에 심각하게 존재하는 다양한 성, 계급, 계층, 지역 간 불균등한 이해관계의 재생산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는 설 자리를 갑자기 잃었다.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에 대해 가장 많은 박수를 쳤던 것은 누구였을까? 바로 해체의 벼랑 끝에 몰렸던 재벌자본이었다. 더구나 일부 진보층에서 내세운 ‘선진국 음모론’은 한국 사회의 내부적 변혁 요구를 되레 ‘외부’로 돌리는 데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다. ‘경제를 살리자’ ‘의지의 한국인’ ‘다시 뛰자 태극기’ ‘제2 한강의 기적’ ‘제2 건국운동’ 등의 슬로건에서 구조적 원인과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몇 년 전 강원도 수재 사건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됐다. 언론이나 정부는 수재의 인재적 차원, 즉 하천 관리 시설 및 제도의 문제, 물 흐름을 인위적으로 변경해 홍수를 악화시킨 일부 댐, 계곡이나 강가에 들어선 불법 건축물, 경보 및 구난구조 체계의 문제 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즉각 자동응답전화(ARS)를 통한 광적인 수재의연금 운동을 통해 ‘온 국민’의 온정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데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1천만 명 참여와 100억원 성금이라는 기록을 내세우며 ‘우리’의 ‘따뜻한 이웃사랑 정신’이 살아 있음을 자화자찬하는 가운데 수재를 악화한 구조적 문제와 책임 규명의 문제는 또다시 증발해버렸다.

내가 ‘안티 수재의연금’이라는 글에서 이미 얘기했듯이, 수재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한결같이 판박이다. “정부는 수해 관련 긴급 장관회의를 열어… 관련 기관이 힘을 합쳐 수해 복구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한 뒤 “이재민들의 생활 불편 해소와… 물놀이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하고 수재의연금 모금과 수해 복구 예방에 공직자들이 앞장서도록” 한다. 그 뒤를 따르는 언론사의 ‘알림’은 한결같다. “최선을 다해 피해 복구와 구호 대책에 나서고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불의의 재난으로 생활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고 깊은 실의에 빠져 있는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여러분의 온정을 담은 의연금·품을 접수하오니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대다수 언론은 공무원들의 ‘철저한 자세’와 일반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씨’만을 강조한다. 결국 물난리가 어떤 지역과 계층에 집중되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지 등을 냉정히 따져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연말이면 되풀이되는 ‘불우이웃 돕기’와 ‘소년소녀 가장 돕기’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안타까운 사정을 가진 ‘소녀 가장’에 대한 보도가 나오자마자 ARS로 성금이 쇄도한다. 언론은 이런 시민들의 ‘온정’을 부각시키고 성금을 사회적 약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필요한 사회복지제도의 발전, 정책 변화,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물며 사회복지를 확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진보적 정당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지배 권력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런 식의 ‘범국민적’ 온정주의로 즉각 대응하며 사회적 비판, 문제 해부, 정책 및 구조 개혁 요구를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어넣게 된다.

다시 기름 유출 사건(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이 사건은 2007년 12월7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크레인 부선과 허베이 스피리트호 간의 충돌과 기름 유출 사건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줄여서는 ‘삼성-허베이 기름 유출 사건’이다. 이렇게 하면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태안반도’를 선호하는 언론이 대다수다)으로 돌아가보자. 100만 명의 봉사자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앞서 설명한 ‘범국민적 온정주의’에 잘 부합한다. 물론 나는 봉사자들 마음이 잘못됐다거나 봉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봉사자들의 이타적인 정신은 찬양받을 만하고 그들에게 기름 제거 봉사활동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계의 온전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점을 악용해서 특정한 정치적 조건반사를 만들어내려는 언론과 정경 엘리트의 의식적·무의식적 의도다. 거기서 기름 유출과 환경에 대한 근본적 문제 설정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 근본적 질문을

사실 이번 사건은 복잡한 측면을 갖고 있다. 거창하게 말해서 이것은 석유자본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조선의 존재는 석유 같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과 그것을 수천km 떨어진 곳에서 수송하는 문제에 직결된다. 자원이나 상품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대기와 바다를 오염시킨다. 충돌 사건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상식과는 달리 사실 기름 유출은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통상적인 일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1년에 1500번 정도의 기름 유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부터 원인을 찾고 대처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최소한 철판 한 겹으로 이뤄진 단일 선체 유조선을 문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미국과 유럽에서는 철판이 두 겹으로 되어 있는 유조선만이 항해할 수 있고 전세계적으로 단일 선체 유조선을 줄이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앞으로 한국 사회가 환경문제와 관련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떤 생각과 제도의 변화가 필요한지를 암시했다. 집단 폐사한 각종 조개류·해조류·해초류·갑각류, 그리고 이들을 먹이로 하는 조류와 어류의 2차적 피해, 갯벌 깊숙이 침투한 기름, 작은 섬 주변에 남아 있는 기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고 생태계의 완전한 복원은 먼 훗날로 미뤄졌지만, 이 사건은 온전한 자연 생태계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생태계 파괴가 생명과 인간의 생존권 확보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우리가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하고 아파한다면 사소한 기술적 문제부터 시작해 상품 및 자본, 특히 석유 같은 자연자원을 전세계적으로 나르고 소모하는 산업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졌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소모하면 석유는 60~70년 안에 모두 고갈될 것이라는 주장에 귀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대안적 친환경 재생 가능 에너지의 개발과 사용, 그리고 무엇보다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 제도, 일상적 삶의 크고 작은 변화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반드시 기름 유출 사건은 또다시 발생할 것임이 틀림없다. 언론 역시 ‘자원봉사자의 신화’만을 되풀이해 보도할 것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