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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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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봄이 하얗게 피어난다

‘입산통제’ 기간 동안 봄 맞이 준비 한창인 설악산 대피소…
무릎까지 쌓인 눈 사이에서 새 계절의 기운을 엿보다
등록 2011-03-10 16:42 수정 2020-05-03 04:26

설악초등학교(강원 속초)도 3월2일 개학했다. 아이들의 등엔 책가방 말고 하나 더 짊어져 있다. 설악산이다. 새하얘진 산을 이고, 키만 한 눈더미를 비켜세워 오종종 내걷는 등굣길이었다. 낮잠처럼 짧은 봄방학을 이젠 잊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즈음 학교 너머 펼쳐진 설악산은 ‘입산통제’다. 산은 비로소 봄맞이 방학에 들어간다. 2월16일부터 5월13일까지다. 등산객들은 애가 탄다고들 한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는데 벌써부터 좀이 쑤신다는 것이다.

설악동 야영장에서 중청대피소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내려다본 설악산 전경.

설악동 야영장에서 중청대피소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내려다본 설악산 전경.

눈에 사라진 산길을 트며 출근하다

3월1일 설악으로 달렸다. 산 아래 사람들의 그리움에 밀렸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3시 취재진은 설악산 대청봉(1708m)에 섰다. 누구도 밟지 않은 눈, 때 묻지 않은 눈, 그래서 또 밟을 수 없는 눈이 봉우리 주변을 고요하게 감싸고 있었다. 오르는 내내 허벅지까지 집어 삼키던 눈이다.

3월 설악은 모순의 산이다. 50㎝ 안팎의 적설이 영하 12도에 결빙돼 있는데, 봄맞이가 한창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하 공단)이 2박3일의 설악산 대피소 봄맞이 작업을 3월2일 시작한 덕분이다. 작업이 대규모라 헬기가 동원된다.

“날씨를 워낙 내다보기 어려워서 오전에 (헬기가) 못 뜨면 오후, 오후에 못 뜨면 내일 해야죠.” 공단 김기창(설악행정과)씨의 당초 설명이었다. 취재진은 오늘 취재 못하면 끝, 내일 마감 못하면 끝이다. 그러니 날은 올 들어 가장 맑았고, 2일 오전 11시10분 공단 헬기 HL 9465편 한쪽에 등 굽은 오징어처럼 취재진은 실려 있었던 것이다. 설악동 야영장에서 이륙한 헬기는 두 차례에 걸쳐 대피소 직원, 설비팀, 기상 장비 수리팀까지 20여 명을 중청대피소로 실어올렸다. 15분 만에 만나는 남쪽 하늘 아래 첫 대피소(1676m)다. 대청봉에서 600m 아래 떨어져 있다.

무리가 들어서자 중청대피소가 들썩였다. 모처럼 ‘사람’을 본 덕분인가, 갇혀지낸 겨울이 독해서인가. 중청대피소엔 공단 직원이 4명씩 상주한다. 7명이 돌아가며 일주일을 근무하고 닷새를 쉰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헬기가 설악산 중청대피소에 유류 등 봄맞이 보급품을 내리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헬기가 설악산 중청대피소에 유류 등 봄맞이 보급품을 내리고 있다.

3월2일 ‘중청 근무’ 일주일을 채운 문상경 중청대피소 분소장은 멀리 금강산을 가리키며 “5일 만에 햇볕 구경을 했다”고 말했다. 대청봉은 바닷가가 펼쳐진 영동과 산 너머 산인 영서를 가른다. 모순의 산은, 기상청이 알려주는 영동 날씨에도, 영서 날씨에도 속하지 못하는 날이 많다.

중청의 날씨는 이런 것이다. 올겨울 대피소 배관이 통째 얼었다. 보일러가 고장났다. 기상장비도 작동하지 않았다. 대피소 식수원인 샘터가 입을 닫았다. 대피소 자락 650m 떨어진 샘에서 온종일 물을 끌어올리면 2t의 식수통이 찼다. 두말없이 얼어버렸다. “올해 유별난 겁니다. 8~10년에 한 번씩 오는 추위예요.” 직원들은 말했다. 한 직원이 대피소 안 커다란 함지에 눈을 한 삽 퍼담았다. 눈이 녹으면 세숫물이 되고, 설거지물이 된다.

지난 2월 하루 적설량 120~130㎝, 최대 누적 적설량이 180㎝였다. 최저 영하 28.7도가 기상상황판에 찍혔고, 체감온도는 영하 60도 아래로 곤두박칠쳤다. 일주일 전 눈에 사라진 산길을 트며 ‘출근’한 문 분소장의 입술은 아직도 부르터 있다.

실상 기자에게 추위의 임계치는 하나다. 취재용 볼펜이 나오지 않는 추위다. 대피소 밖이 그랬다. “볼펜똥 빙점”이라 부르며, 밖에서 묻고 들은 얘기를 대피소 안에서 복기했다.

외로우니 더 춥다. 문 분소장은 “이틀 되면 직원들 말수가 줄고, 5일이 되면 대꾸도 안 한다”며 웃는다. 직원들의 혀가 고드름처럼 솟았다. “눈보라, 비바람 몰아치는데 아무도 없고 하면,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근데 내려가지는 못하니까 미치는 거예요.”

“예전엔 한 달씩 머물렀어요. 그땐 장가도 가기 전이었는데…. 밑에 여자친구는 편했겠지요. 전 유배예요.”

실제 중청대피소 발령을 받은 뒤 결혼한 이가 있었다. 일주일 근무 뒤 신혼집으로 퇴근했다. 3시간여 하산길을 1시간30분에 주파했다. 달렸다. 아니다, 날았다.

중청대피소 앞마당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모이를 찾고 있다.

중청대피소 앞마당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모이를 찾고 있다.

물품 채워넣고 모포 세탁하고…

대피소 직원들은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산손님들이 속상하다. 취사장 식수통 꼭지를 열고 머리 감는 이들을 보고 기겁했다. “샤워장이 있느냐” “화장실이 왜 수세식이 아니냐” 따지는 이들이 어이없었다. 남녀 탐방객들의 거침없는 애정 행각은 잔인하다.

하여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건, 겨우 채운 식수로 머리를 감고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남녀일 것이다. 가을 성수기 하루에 2만 명까지 중청대피소를 지난다.

이돈희씨는 말했다. “그래도 탐방객이 못 오는 동안엔 직원들끼리만 있으니까 정말 적막하지요. 또 사람이 그리워지는 겁니다.”

산 아래 그리움이 산 위 그리움을 넘어서지 못한다. 봄 채비도 산 위에서 먼저 서두르는 까닭이다. 봄맞이 정비 작업은 중청·소청대피소와 희운각대피소 3곳에서 주로 이뤄졌다. 유류, 식량 등 대피소 유지·관리에 필요한 물품이 새로 보급된다. 특히 개인이 운영해오던 소청대피소는 지난해 공단이 인수해 올해 새로 지어올릴 참이다. 대피소는 불모지 한가운데서 삶을 건사할 수 있는 완결성을 갖춰야 한다. 숙박 공간, 발전·태양열 설비, 보일러, 취사장, 오물처리 시설, 기상·통신 시스템까지 조밀하게 엮여 있다. 이는 곧 대피소 직원들의 ‘업무’로 직결한다. 구조, 방재, 생태계 조사, 불법 단속 및 계도활동이 더해지고, 요리와 설거지도 추가다.

문 분소장은 새까맣게 탄 정병호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쟨 아내가 있는데, 꼭 집에 갈 때 되면 수염도 안 깎고 얼굴도 태운다니까. 고생은 혼자 다 한 것처럼 보이려고. 허허허.” 정씨도 웃었다. 문 분소장의 농 때문인지, 이제 곧 산을 내려갈 수 있어서인지 알 수 없다.

봄맞이 기간에 모포도 세탁된다. 탐방객한테는 제 피부만큼 귀한 물품이다.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청대피소의 모포가 일제히 헬기에 실려갔다. 탐방객이 지난 3개월 동안 버리고 간 쓰레기도 실렸다. 정병호·김광원씨는 헬기에 매달 그물 위로 쓰레기를 쌓아올렸다. 이들은 “성수기 때는 한 달에 이 정도, 작은 동산만큼 나온다”고 말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중청대피소 직원들이 지난 3개월치 쓰레기와 모포 등을 산 아래로 옮기기 위해 쌓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중청대피소 직원들이 지난 3개월치 쓰레기와 모포 등을 산 아래로 옮기기 위해 쌓고 있다.

지난 성탄절이었다. 중년 부부 두 쌍이 오색약수터에서 입산했다. 그중 한 남성이 대청봉에서 주저앉았다. 전날 술을 마셨는지 탈진해 웅크린 채 꼼짝하지 못했다. 봉우리는 영하 27도였다. 체감온도가 영하 60도에 가닿았다. 중청에서 달려갔다. 탈진과 동상으로 생사가 한 몸에 있었다. “얼굴이 다 얼어서 시계만 해졌더라고요. 그분 정말 죽다 살아났어요.” 공단 10년차 최성근씨는 대피소 안 큰 원형시계를 가리켰다.

들것에 실려온 남성은 사흘 동안 대피소에서 응급조치했다. 119 헬기가 악천후로 돌아갔고, 산림청 헬기가 결국 싣고 갔다. “눈도 못 뜨고 돌아다니지도 못하니까, 직접 밥 갖다주고 치료해줬지요. 나중에 전화하더라고요. 고맙다고. 인사 한마디면 우린 돼요. 그런데 요즘엔 그런 말 한마디 안 해주는 분이 대다수예요.” 직원들의 외로움이 또 커진다.

충주에 사는 유영태 계장은 3월2일 일주 근무를 시작했다. 때마침 헬기가 아니었다면 출근길 눈을 헤치며 산을 올라야 했다. 퇴근길도 마찬가지다. 3시간 산을 내려가 3시간 운전을 해야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유 계장은 “그래도 국립공원 근무의 꽃은 중청”이라며 “여기서 일해야 일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백산에서 근무하다 설악산을 지원했다. 중청은 이제 온 지 한 달이다. 2시간가량 야외에 꼼짝없이 서서 유류를 탱크로 옮겼다. 영동에서 닥쳐오는 찬 바람이 그의 입가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마냥 웃었다.

추위로 식수원이 얼어, 중청대피소 직원들은 눈을 퍼 담아 녹인 물을 사용하고 있다.

추위로 식수원이 얼어, 중청대피소 직원들은 눈을 퍼 담아 녹인 물을 사용하고 있다.

취재진은 중청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 직접 올랐다. 설악이 ‘맛보기’로 허락한 것인데도 에베레스트나 되는 양, 열 걸음마다 멈춰 숨씩을 토했다. 길을 알려주는 가드도 군데군데 사라졌다. 눈은 무릎을, 때로 허벅지를 와락 삼켰다 뱉었다.

그러다 봄은 와락 다가오겠지

상춘곡은 일러 보인다. 그러나 설악은 3월 중순께 산 아래서부터 늘 절레지를, 복수초를 피워냈다. 꿩의바람꽃을 지상으로 올려보냈다. “봄 되고서 잎들 나오고 관광객 올 때가 제일 좋다”는 이돈희씨 바람을 모를 리 없다.

한 직원이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년’을 꼽았다. “아, 이제 딱 14년 남았네.”

다른 직원이 말했다. “내년부터 아마 예순 살로 는다지 않아?”

“어, 그래? 그럼 16년이야?” 다들 웃었다.

16년이면 설악산도 변할 것이다. 문 분소장은 “15년 전만 해도 눈 녹인 물을 바로 먹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부동액 맛이 난다는 것이다. “고산지대에서 그러면 안 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설악으로 오는 길, 세 번의 방역을 거치고, 휴게소에서 목이 타 구입한 생수 ‘○○ 심층수’를 ‘○○ 침출수’로 잘못 듣고 입 벌어졌던 기억이 스쳐갔다.

설악산 대청봉. 아무도 밟지 않는 눈이 ‘오지 마라’ 말하는 듯하다.

설악산 대청봉. 아무도 밟지 않는 눈이 ‘오지 마라’ 말하는 듯하다.

그 시각 중청은 “풍속 1.9m, 기온 영하 11.8도, 바람 서”(기상상황판)에 있었다. 이동규 외설악 신선봉 분소장은 “대설이 잦아지면서, 고산지대에 무슨 화재 위험이냐며 산을 열어달라는 민원을 올해 유독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이 분소장이 “입산통제는 산불 예방이란 취지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필요한 휴식 기간”이라며 “낙석처럼 위험한 요소도 많지만, 이때 동식물은 새 생명을 준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중청대피소 안 3월치 달력엔 유채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설악에 봄은 오지 않았으나 오고 있고, 겨울은 가지 않았으나 가고 있다. 그리고 또 품을 연다.

설악산=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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