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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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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표지, 그것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

김현철, 승지원, 삼성 비자금, 세월호…

1대~13대 역대 편집장들이 꼽은 ‘내 임기 최고의 표지기사’는
등록 2019-03-04 04:03 수정 2020-05-03 04:29
1994년 3월 김중배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가 쓴 창간사의 한 대목이다. “시대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지구촌은 갈수록 좁아진다. 정보의 홍수는 정보화시대를 이끌 길잡이를 갈망한다.”
2019년 3월 이 창간 25주년을 맞았다. 학창 시절 성적표를 뒤적이듯 초대~13대 편집장이 꼽은 ‘내 임기 최고의 표지기사’를 들춰봤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은 좋았다. 은 지난 25년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한국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제10대 이제훈 편집장은 “‘평형을 이룬 기득권적 질서’를 뒤흔드는 ‘불균형’, 곧 ‘작은 변화의 몸짓’을 포착해 세상에 알리는 역할”이라는 말로 의 지난 발자취를 회고했다.
다만 시대는 여전히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데, 시사주간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는 현실이 조금 두렵다. 21세기 후반, 이 로 재창간을 준비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질문은 짙은 회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을 읽으며 성장한 ‘21 키즈’들의 축사가 스물다섯 살 의 불안을 위로한다. 그들에게 은 ‘다른 목소리’였고 ‘약자의 목소리’였으며, 한 주간의 ‘기다림’이고 오랜 ‘습관’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불안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붙들고 다시 25년을 살아낼 첫걸음을 내딛는다. 독자들은 여전히 “타는 목마름으로… 깊이 있는 기사, 다양한 정보, 품격 높은 보도”(김 대표 창간사 중)를 원한다는 간절한 믿음으로!

“가슴이 뛰지 않는 기획이에요.”

‘역대(1~13대) 편집장이 꼽은 임기 중 최고의 표지기사’ 기획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초대 고영재 편집장은 창간 25주년에 걸맞지 않은 “식상한 기획 아이디어”를 가지고 인터뷰를 요청한 후배 기자를 질타하며, “가슴이 뛰는 신선한 기획”을 주문했다. 창간 당시 사내 공모를 거쳐 둘로 압축된 제호를 “상투적”이라며 폐기하고 단박에 로 뒤집어엎은 초대 편집장다운 전복적인 주문이었다.

고 편집장은 자신이 만든 1994년 3월24일치 창간호 표지기사(‘21세기 열네 살의 도전’)에 대해서도 “참신하고 파괴적인 커버스토리(표지기사)를 다각적으로 모색했으나, 구색 맞추기 기획이었다”고 혹독하게 평했다. 실제로 고 편집장은 제2호(1994년 3월31일치)에 실린 첫 번째 ‘만리재에서’ 칼럼에서 “한마디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이 모든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며 통렬한 자기 반성문을 게재했다.

편집도 파격 그 자체
초대 고영재(위) 제2대/ 오귀환(아래)

초대 고영재(위) 제2대/ 오귀환(아래)

고 편집장의 가혹한 자기 평가와 달리, 사실 은 창간 때부터 한국 사회의 여러 금기에 도전하며 말 그대로 시사주간지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한 번도 잡지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일간지 기자’들이 모여 당시 시사주간지와 전혀 다른 문법으로 시장의 변화를 선도했다.

‘김현철(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은 돈을 받았는가’(제8호) ‘승지원(삼성그룹 영빈관) 제2의 청와대’(제4호) 등 한국 사회의 두 성역을 겨냥한 기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다른 시사주간지들이 ‘정치 시사’에 매몰돼 있을 때, 다양한 사회현상에 주목한 차별성 있는 시사 기획을 시도했다. 국민연금 재정 고갈 문제가 본격화되기 10년 전인 1994년 11월10일 제33호에서 처음으로 ‘무너지는 연금제도’ 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다.

콘텐츠 내용뿐만 아니라 편집도 파격 그 자체였다. 은 시사주간지 중 처음으로 디자인 팀에 획기적이리만큼 독자적인 콘텐츠 창조 역할을 부여했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쓰는 ‘주간지 판형’도 이 판형을 확대한 뒤 다른 매체까지 확산됐다. 요즘은 일반적으로 편집장 칼럼을 잡지 앞쪽에 배치한다. ‘만리재에서’가 처음 전면에 배치됐을 땐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낯선 시도였다. 고영재 편집장은 “앙시앵레짐(구체제)의 극복을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창간호 취재팀장이기도 했던 제2대 오귀환 편집장은 의 안착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오귀환 편집장 당시 세기의 특종(제57호 ‘킬링필드, 미군이 시작했다’)과 시대상을 반영한 선풍적인 기획(제127호 ‘아내는 연애 중’), 시대를 앞서간 기획(제96호 ‘재일동포에게 조국 참정권을’)이 넘쳐났다. 당시 편집자이자 7대 편집장을 맡기도 한 고경태 이십이세기미디어 대표는 “세계화가 어쩌니 경제성장률이 얼마니 하면서 너도나도 우리나라가 대단한 나라인 것처럼 떠들던 시절이었다. 은 외국인 노동자 산재 문제 등 타자화된 사람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양심 없고 쪽팔린 나라인가’를 선구적으로 환기시켰다”고 의미를 짚었다.

오 편집장은 그 모든 주옥같은 기사를 제쳐두고 ‘21세기는 흥부를 원한다’(제149호)를 ‘임기 중 최고의 표지기사’로 꼽았다. “기사 가치를 판단할 때 미래 지향성과 예측성, 미래에 끼친 파급효과를 봐야 한다. ‘21세기는 흥부를 원한다’ 기사는 지금까지도 지속성과 영향력이 있는 기사다. 세상은 여전히 흥부를 필요로 하며, 4차 산업혁명이 담아내야 할 가치로도 흥부가 유효하다.”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당시 에서 ‘21세기 인간상’으로 혁신·무소유·환경주의의 표상이자 포용의 상징인 흥부를 꼽았다. 20세기 후반 ‘흥부 비판’과 ‘놀부 재해석’이 유행했던 시대 분위기를 고려하면 역으로 신선한 시도였다. 김 교수와 독자들은 이 기사를 계기로 지금까지 해마다 봄이 되면 흥부정신으로 성공을 꿈꾸는 21세기 흥부를 찾는 ‘흥부기행’을 떠나고 있다.

국내 유일하게 ‘IMF 사태’를 경고하다
제3대 곽병찬(위) 제4대/ 김종구(아래)

제3대 곽병찬(위) 제4대/ 김종구(아래)

제3대 곽병찬 편집장은 “충성주를 마시며 21만 부를 부르짖던” 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매주 10만~12만 부를 찍었고, 가판대에 뿌려지기가 무섭게 이 동나던 시절이었다. 최고의 시사주간지, 특종도 심층기획도 많았지만 곽 편집장은 ‘50조! 천문학적 금융부실’(제184호)을 최고의 표지기사로 꼽았다.

한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구(IMF)가 긴급 자금지원 협상 타결 소식을 발표한 건 1997년 12월3일이다. 그전까지 한국 정부는 ‘펀더멘털은 괜찮다’는 허세로 국민을 기만했다. 언론은 ‘워치독’(감시자)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은 재경원(기획재정부) 금융정책실이 꼭꼭 숨겨뒀던 금융권 부실 채권 규모가 무려 40~50조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최초 보도했다. 곽 편집장은 “이 보도는 지금까지도 연구자들로부터 거의 유일하게 금융위기 징후를 경고한 언론보도로 평가받고 있다”고 자부했다.

을 거쳐 간 수많은 기자가 꼽는 ‘한겨레21 대표기사’는 단연 ‘양심적 병역거부’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다. 두 기사 모두 제4대 김종구 편집장 재임 시절 처음으로 보도됐다. 공교롭게도 둘 다 표지기사가 아니었다. 김 편집장은 ‘미디어의 의제 설정’이 ‘공공의 의제 설정’으로 이어지는 언론보도의 전형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기사 두 건을 모두 표지로 ‘대접’하지 못한 속사정을 털어놨다.

한국 언론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처음 제기한 건 제345호에 실린 두 쪽짜리 기사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였다. 김 편집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면 개편을 하면서 ‘마이너리티’(소수자) 꼭지를 만들었는데, 그 꼭지에 딱 맞는 기사였다. 기사가 나간 뒤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판매부장이 찾아와 가판대에서 완판됐다고 알려줬다. 표지도 아닌 기사 때문에 잡지가 완판되는 건 드문 일이라 신윤동욱 기자에게 추가 기사를 주문했는데, 한 번 썼던 주제로 표지를 쓰기가 좀 그래서 특집으로 갔다.”

제5대 정영무

제5대 정영무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알리며 ‘파문’을 일으킨 기사 역시 표지가 아니었다. 제256호 ‘한겨레21 지구촌’ 꼭지에 실린 구수정 베트남 통신원(현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의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다. 이후 은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 고백’(제305호) ‘베트남전, 미국 비밀보고서’(제334호) 등 관련 표지기사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김 편집장은 “당시만 해도 국방과 안보, 애국심 문제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성역이라 기사를 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용기였다”고 회상했다.

제5대 정영무 편집장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 편집장의 뒤를 이은 제6대 배경록 편집장은 제499호 표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다- 북핵 해결 없이 정상회담 없다’를 최고의 표지기사로 선정했다. 은 2004년 2월28일 약 100분간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과 정치 그리고 국민통합’을 테마로 노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했다.

제6대 배경록(위)/ 제7대 고경태(아래)

제6대 배경록(위)/ 제7대 고경태(아래)

한국 언론사에서 시사 주·월간지가 현직 대통령을 인터뷰한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사례로 기록된다. 1970~80년대 이 시사지 시장을 선도하며 종합일간지를 제치고 여론몰이를 하던 시절에도 현직 대통령은 인터뷰하지 못했다. 노 대통령 인터뷰 이후 1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직 대통령을 인터뷰한 시사 주·월간지는 없다. 배경록 편집장은 “현직 대통령 인터뷰는 과 신문의 매체 영향력에 힘입은 바 크고, 올곧게 정론지의 길을 걸어온 성과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제7대 고경태 편집장은 거두절미 제592호 ‘국기에 대한 맹세를 없애자’를 최고의 표지기사로 꼽았다. 교회에 가면 주기도문을 외우듯, 국기를 앞에 두고 신앙고백 하듯 외우는 ‘국기에 대한 맹세’의 연원과 변질, 악영향을 다룬 수작이었다.

고 편집장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서비스하는 기관인데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역전시킨 것”이라며 “독재 국가의 큰 잔재인데 그 당시까지도 너무 일상화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문제의식조차 못 느끼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사를 작성한 남종영 기자는 ‘국기에 대한 맹세’ 저자인 유종선 전 충남교육청 장학계장을 찾아내 “1968년 교육감의 지시로 맹세문을 지었고, 1972년 문교부가 전국 학교로 확대하면서 일부 문구가 수정돼 의미가 변질됐다. 지금의 맹세문은 전체주의적”이라는 충격적인 인터뷰를 이끌어낸 바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안경이 관심을 끈 이유
제8대 정재권(위)/ 제9대 박용현(중간)/ 제10대 이제훈(아래)

제8대 정재권(위)/ 제9대 박용현(중간)/ 제10대 이제훈(아래)

제8대 정재권 편집장이 선택한 기사는 제683호 ‘내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 이상 있었다’였다.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법무팀장)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기자회견 형식으로 비자금 은닉 사실을 공개하기 전 미리 보도된 단독 기사였다. 정 편집장은 잡지 발행일까지 하루 늦춰가며 ‘모처’에서 김영배 기자와 함께 김용철 변호사를 만났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이 그룹 임원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조성·관리하고 있다는 그룹 핵심 관계자의 증언과 증거(이자소득세 규모)가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 편집장은 “보도 이후 삼성은 ‘김용철 변호사가 표지사진에서 쓰고 있는 안경이 굉장히 고가’라는 식으로 치졸하게 내부고발자를 흠집냈다”며 “삼성 개혁, 재벌 개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게 아쉽지만 당시 보도가 삼성 개혁의 가장 강력한 단초를 제공한 기사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현 신문 편집국장인 제9대 박용현 편집장은 장고 끝에 제778호 ‘9번 기계의 노동일기’를 꼽았다. 최저임금(당시 시급 4천원)을 받는 일자리에 기자가 한 달간 직접 취업해 몸으로 써내려간 ‘노동 OTL’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다. 경기도 안산의 한 공장에서 시작한 이 시리즈는 서울의 갈빗집과 인천의 감자탕집,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 서울 강북 대형마트로 이어졌다. 훗날 책으로 묶여 나온 으로 기억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2009년 한국에서 ‘장기 참여관찰형 탐사보도’의 장을 연 ‘노동 OTL’ 시리즈는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해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 민주언론상 특별상 등을 휩쓸었다. 박용현 편집국장이 신문 편집국장이 된 이후, 2018년 신문에서 ‘노동 OTL’의 오마주 기사인 ‘노동 orz, 우리 시대 노동자의 초상’ 시리즈를 보도하기도 했다. 박 편집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보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게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우리 이웃의 일상과 관련된 진실은 평범하다는 이유로 외면받기 쉽다”며 “우리가 놓쳤던 진실 하나를 발견해 독자들께 전해드렸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 기사”라고 설명했다.

제10대 이제훈 편집장은 제892호 ‘올해의 인물을 뽑아주세요’를 ‘최고의 (내 마음속) 표지기사’로 골랐다. 이 기사는 애초 단행본 형식의 통권으로 기획된, 당시로선 전인미답의 실험이었다. 모든 구성원이 두 달간 매달려 ‘집단 창작’을 끝냈고, 최고의 표지로 손색없는 기사였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표지기사가 되지 못했다. 강판을 앞둔 2011년 12월17일 토요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급서하는 바람에 긴박하게 표지를 교체했기 때문이다. ‘올해의 인물’은 애초 통권에서 22쪽이 빠진 23꼭지 30쪽 기획 기사로 줄었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는 갔습니다’에 표지 자리를 내줬다.

한반도 전문가인 이제훈 편집장은 “진짜 표지를 밀어내고 형식상 표지가 된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이야기를, 2차 북-미 정상회담 즈음에 대하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그는 “젊은 리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행보가 2500만 북녘 인민의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기를, 식민과 전쟁과 분단으로 점철된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를 여는 한축으로 기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걷다
제11대 최우성(위)/ 제12대 안수찬(중간) 제13대 길윤형(아래)

제11대 최우성(위)/ 제12대 안수찬(중간) 제13대 길윤형(아래)

제11대 최우성 편집장은 불시에 인터뷰 요청을 받고도 “제953호부터 제1052호까지 100권을 만들었다”며 경제학 박사다운 범상치 않은 기억력을 뽐냈다. 최 편집장 시절 제1000호와 창간 20주년이 있었던 터라 공들인 기획기사가 많았다. 하지만 최 편집장은 세월호 참사 첫 주에 만든 제1008호 ‘이것이 국가인가’와 백지에 카피도 없이 검은 테두리와 검은 제호만 넣은 제1009호 세월호 참사 특집호를 최고의 표지기사로 꼽았다. 최 편집장은 “취재기자가 팽목항에 내려갔을 때 유족들이 맨 처음 했던 말이 ‘이게 나라냐’였다. 기사가 들어오기 전에 표지 먼저 마감한 드문 사례”라며 한국 사회에 가장 먼저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표지의 취지를 설명했다. 곧이어 발행된 백지 표지도 비탄에 젖은 한국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은 표지 디자인 이외에 기사로도 세월호 참사를 가장 끈질기고 심층적으로 보도한 매체로 평가받는다. 특히 정은주 기자는 유가족과 함께 38일간 도보순례에 동행하고 관련 기록·자료 집대성에도 앞장섰다. 최 편집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정 기자와 ‘견해차’가 있음을 미리 밝히며 ‘최우성 시점’으로 배경을 설명했다.

“유가족 도보순례 제보는 내가 받았지만 따라가겠다고 한 건 정 기자였다. 정 기자는 ‘한겨레21 페이스북에 도보순례 중인 정 기자의 휴대전화 번호를 올려 자신을 순례단 로드매니저로 만든 사람’이 나라고 하지만 내 기억엔 정 기자와 합의해 올린 것이다. 정 기자가 고생했지만 그 뒤로 많은 이가 함께 걸었고 유가족에게도 큰 힘이 됐다.”

제12대 안수찬 편집장 역시 2년간 만든 중 최고의 표지로 세월호 연속보도를 꼽았다. 제1057호 ‘진실은 이렇게 감춰졌다’를 시작으로 안 편집장 시절 세월호 관련 표지기사를 세 차례나 썼다. 안 편집장이 마지막으로 만들고 후임자에게 ‘만리재에서’ 배턴을 넘기고 떠난 제1157호 표지도 ‘세월호 그날의 목소리’였다. 안 편집장은 “최 편집장 때 유족 도보순례에 동행하면서 이 세월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계속 환기시키는 역할을 해왔고, 나도 그 역할을 계승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유족과 함께하고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세월호 의혹과 사실을 밝히는 쪽으로 ‘진도’를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침 정은주 기자가 세월호 관련 수사 기록 일체를 입수했다. 너무 방대해서 검찰과 감사원조차 그 의미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는 자료였다. 분석하려면 상당한 인력과 시간, 비용이 들어가는 문제였다. 안 편집장은 말했다. “옛날엔 시사주간지가 발생 뉴스를 조금 더 깊게 해설하면 됐지만 더 이상 그 포지셔닝이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깊은 호흡으로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는 추적 탐사보도가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탐사보도 대상은 세월호 참사였다. 의 역량을 다 바쳐서라도 하자고 결심했다.” 정은주 기자와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자료 분석을 위해 10개월간 매달렸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9분 세월호가 오른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을 때부터 10시30분 침몰할 때까지 한국의 국가구조 전체가 어떻게 오작동했는지 적나라하게 전모가 드러났다. 주요 내용은 기사로 보도됐고, 단행본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다.

제13대 길윤형 편집장은 사이비 역사의 폐해를 심도 있게 다룬 제1167호 ‘사이비 역사의 역습’을 선택했다. 기사 출고 전 등 위서를 상대로 열심히 싸우고 있던 소설가 이문영씨가 “엄청난 후폭풍이 있을 텐데 자신 있냐”고 물었을 땐 “천둥벌거숭이에 가까워서 ‘별로 겁나지 않는다’고 답했으나, 정말 상상도 못할 후폭풍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이 기사로 은 역사학자 이덕일씨로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공격을 받았다. 회사에는 길 편집장의 사죄와 사퇴를 요구하는 공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길 편집장은 “젊은 역사학자들과 한국 상고사학회 등으로부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는 격려가 이어졌다”고 상반된 평가를 전했다.

길 편집장은 책의 완성도 측면에서 ‘死·삶 4·3을 말하다’도 빼놓을 수 없다며 기어이 표지 하나를 더 꼽았다. 그는 “두 달 전부터 전체 기획을 구성하고 고정 필자들에게 모든 외고의 주제를 ‘4·3으로 해달라’고 주문했다”며 “다른 시사주간지와 비교가 되지 않는 압승이었고 ‘이렇게만 만들어달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매주 잡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ㅠㅠ’로 마침표를 대신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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