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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 시력 잃은 정금성씨 “음성변환 출력기로 <한겨레21> 읽으니 세상에 다시 눈뜬 느낌”
등록 2010-06-15 20:28 수정 2020-05-03 04:26

편지가 한 통 왔다. 색이 고운 종이에 정갈한 글씨를 담은 ‘종이 편지’를 받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의 오랜 독자였다는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정은영 바르톨로메오 수녀는 지난 4월 에서 진행한 ‘시각장애인용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 체험 이벤트에 신청했다. 이벤트에 당첨된 정은영 수녀는 “아버지에게 참 좋은 어버이날 선물을 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전했다. 광주에 사는 아버지 정금성(60)씨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만났다.

장애 얻은 우리가 죄인…

정금성(60)씨. 정금성 제공

정금성(60)씨. 정금성 제공

정씨가 흰 지팡이를 손에 쥔 지는 햇수로 16년이 됐다. 1992년까지 정씨는 안경을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눈이 밝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꾸 눈이 부시고 눈앞의 물건이 흐리게 보였다. 처음으로 안경을 맞췄다. 하지만 시력은 점점 떨어졌다. 안경을 바꾸고 또 바꿨지만 그의 눈을 보조해줄 안경을 더는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고 했다. 정씨에게 잠재돼 있던 소인이 40대 후반에야 나타나 그의 시력을 앗아갔다. 1995년 1월, 하던 사업을 접고 1급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점자와 안마 교육을 받았다. 시력을 잃은 대신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키우는 훈련을 해야 했다. 비장애인으로 지낸 삶이 훨씬 길었기에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비장애인이었을 때와 비교해 생활의 변화가 있는지 묻자 “그저 장애를 얻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한숨조차 섞지 않고 덤덤히 말한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장애인을 이해해주면 좋겠어요. 가령 장애인이 기차·지하철 등을 탈 때 교통비를 할인하거나 무임승차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가 있는데, 뜻은 좋죠. 그런데 나 같은 시각장애인은 그런 서비스를 쓰려야 쓸 수도 없거든요. 안 보이니 멀리 지방까지 잘 가지 않을뿐더러 지하철 있는 도시도 사실 몇 개 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시각장애인끼리는 우스개로 ‘번 돈 택시비로 다 쓴다’고 얘기해요.”

2007년 10월부터 정씨는 LG텔레콤에서 안마사로 근무하고 있다. 종일 앉아서 일하는 전화 상담원들의 피로가 그의 손끝에서 녹아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2명의 안마사와 함께 일한다. 비정규직에 급여가 많지는 않지만 매일매일 일을 하고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지난 5월부터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로 을 읽은 정씨는 요즘 유난히 옛 생각이 많이 난다. “젊었을 때 가구회사 회계과에 있었어요. 이상하게 을 읽고 나서부터는 그때 작성하던 장부가 꿈속에 나타나 눈에 훤히 보여요. 활발하게 일하던 젊은 시절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그만큼 다시 세상에 눈뜬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정부, 장애인 교육에 더 투자해달라

최근 4대강과 선거 관련 기사를 유심히 ‘들었다’는 그는 지난 6월2일 지방선거에 앞서 부재자투표를 신청해 투표도 했다. 개표일에는 새벽까지 선거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선거 결과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대체로 그런데. 아, 서울은 아쉬워요. 제가 그날 새벽 3시46분까지 들었거든요. 그런데 잠깐 자다가 4시10분에 다시 듣기 시작했는데 그사이 역전이 됐더라고.”

그는 이렇게 시력을 잃은 대신 세상에 더 촘촘히 귀기울이게 됐다. 그래서 이전보다 많이 읽고 많이 배우는 삶을 지속해나갈 예정이다. 그는 정부에서 장애인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볼 수 없게 되고부터 책과 가까워졌어요. 1년에 50~60권씩은 읽는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에게 점자책과 녹음 도서, 바코드로 들을 수 있는 책이 많이 보급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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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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