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햇살이 참 좋아요.” 조승현(63)씨가 건넨 첫 인사는 날씨 얘기였다. 발을 조금 옮겨 나무 아래에 들어서자마자 “그늘도 있네요”. 그 예민한 감각에 내심 놀라며 ‘그의 오른팔’을 붙잡고 길을 안내해 인터뷰 장소까지 걸음을 옮겼다.
의지하지 않는 삶, 선택권이 생겼다
2001년 포도막염으로 시력을 잃은 조씨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눈앞에 검은 커튼이 쳐지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원인불명으로 시작한 그 병으로 그에게 세상은 1년 만에 까만 것이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 지내지는 않았다. 그는 2003년 장애인 재활을 돕는 단체 ‘라이프존’을 결성해 왕성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낙천적인 그는 시각장애를 통해 얻은 새로운 사람, 관계, 도전 때문에 삶이 즐겁단다.
요즘 조씨는 장애인 보조기기인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를 사용해 을 읽는다. 이 806호부터 도입한 시각장애인용 ‘2차원 고밀도 바코드’에 기계를 대고 잠시 기다리면 기계가 잡지를 ‘읽어준다’.
이렇게 을 읽게 된 뒤의 생활에 대해 묻자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이 들어온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생활이 전부 변했다. 시각장애인에게도 선택권이란 게 생긴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사물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타인의 안내를 받아야 하고 점자 도서로 출간된 책만 읽어야 했다. 가게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려고 해도 주인에게 일일이 물어야 하는데, 냉장고에 든 모든 음료수에 대해 물을 수 없으니 그들의 선택에는 언제나 제약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는 그들에게 세상을 읽어주는 눈이다.
그럼에도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는 모든 시각장애인의 눈이 돼주고 있지는 못하다. “양쪽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당사자인 시각장애인과 바코드를 도입할 수 있는 여러 매체나 회사들. 시각장애인은 어차피 바코드가 도입된 책이 많이 없으니까 굳이 기계를 마련할 생각을 안 하고, 매체나 회사 쪽은 들이는 시간과 돈에 비해 이용률이 낮다 보니 도입을 주저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많은 상품에 시각장애인용 바코드를 도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여러 물건과 매체에 바코드를 도입하는데도 시각장애인이 계속 ‘세상을 읽어주는 눈’을 외면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요지다.
그는 특히 인쇄물과 의약품에는 바코드가 꼭 도입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자유롭게 읽는다는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생활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약을 먹게 마련인데 아무 약이나 먹으면 위험하잖아요. 예컨대 두통약이 필요한데 옆에 확인해줄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그도 참아야 해요.”
더 많은 매체·물건에 바코드 새겨달라헤어지면서 다시 한번 그의 팔을 잡으려 하자 조승현씨가 말했다. “나를 바로 마주 보고 서요. 그리고 오른손을 뻗어요.” 시키는 대로 하자 그는 내 오른팔을 붙잡고 반걸음 정도 뒤에서 발을 내디뎠다. “이렇게 해야 안내받는 사람이 넘어지지 않아요.”
짧은 조언을 하고 그는 인천으로 향했다. 사이클 연습이 있어서다. 그는 텐덤사이클(장애인과 방향을 조절해주는 비장애인이 한 조가 돼 움직이는 경기)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다. 지난해 전남에서 열린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는 금메달을 2개나 땄단다.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며 못다 읽은 을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로 들으며 가겠다고 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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