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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뒤처질까’ 핵발전 공약 난립…지역은 전기 식민지가 아니다

AI 산업 내세우며 ‘장및빛 흥분’ 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의 ‘탈탄소’… 2030 탈탈탈 기후순례단, 삼척~광화문 연인원 295명 400㎞ 걸으며 기후 대책 호소
등록 2025-05-23 12:51 수정 2025-05-28 06:09
2030탈핵탈석탄탈송전탑 기후순례단이 2025년 5월14일 오전 경기 구리시 구리역 인근에서 대선후보들에게 에너지전환 공약을 요구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2030탈핵탈석탄탈송전탑 기후순례단이 2025년 5월14일 오전 경기 구리시 구리역 인근에서 대선후보들에게 에너지전환 공약을 요구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인구 절반 이상이 사는 수도권에서 쓰이는 전기는 대부분 땅값이 싸고 유권자가 적은 해안가 시골 마을에 지어진 거대한 발전소에서 생산된다. 그 시골 마을에서 수도권으로 수백㎞에 걸쳐 놓인 송전시설은 가난한 마을들을 가로질러 전기를 실어나르며 공해와 위험을 노출한다. 이런 불의에 더는 눈감지 말자며 ‘2030 탈탈탈 기후순례단’이 신발 끈을 고쳐맸다. ‘탈탈탈’은 탈핵·탈석탄·탈송전탑을 일컫는다. 2022년 5월 순례 이후 3년 만이다. 이들은 주변 석탄발전소 10기와 핵발전소 8기가 포진한 강원도 삼척에서 2025년 4월25일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6·3 대통령 선거 후보들에게 “2030년까지 핵·석탄발전소와 송전탑에서 탈출할 것”을 공약에 포함하라고 요구했다. 21일 동안 연인원 295명이 400㎞를 걸어 5월15일 서울 광화문에 도착해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리인(위성곤 의원)을 만나 요구서를 전달했다. 한겨레21이 막바지 20·21일차 순례에 함께하며 순례자들이 한걸음 한걸음에 담아 보낸 목소리를 전한다.


2030 탈탈탈 기후순례 제21차 광화문 기자회견 영상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RHDtqOWAelU

석탄발전소·시멘트공장 밀집한 삼척이 출발지

2025년 5월14일 아침 8시 경기 남양주 지금동성당. 30여 명의 기후순례자가 둥글게 모여 섰다. ‘우리 모두 소박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더 이상 자연을 훼손하지 않게 하소서.’ 기도문을 읽은 뒤 20일차 순례가 시작됐다.

“의로운 일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서 5월5일 (강원) 횡성에서부터 이날로 열흘째 함께 걷고 있어요.” 강원 영월에서 온 순례자 신명식(69)씨가 말했다. 그는 “석탄·핵 발전소는 대기업과 건설업자들이 큰돈을 버는 일이지 않나”라며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민 세금이 투명하게 쓰여서 가난한 사람들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 고양에서 온 순례자 정선애(57)씨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계속 걷고 외치고 토론하고 만나고 얘기하고 제안하면, 우리 사회의 약한 사람들, 소수자, 어린아이들, 동물들 이런 모든 존재가 공평하고 편안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함께 걷게 됐다”고 말했다. 7·8일차(강원 평창 구간)를 걸었던 강원 삼척 주민인 순례자 김형연(23)씨는 “2024년 12월3일 내란 다음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매일같이 기후순례를 하는 삼척우체국을 찾아갔다가 탈탈탈 순례에 함께하게 됐다”며 “내란으로 확인된 우리 사회 민주주의 문제가 지방 식민지화·황폐화 그리고 국토 난개발 문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30탈핵탈석탄탈송전탑 기후 순례단이 2025년 5월14일 오전 경기 구리시 망우고개에서 대선후보들에게 에너지전환 공약을 요구하는 행진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2030탈핵탈석탄탈송전탑 기후 순례단이 2025년 5월14일 오전 경기 구리시 망우고개에서 대선후보들에게 에너지전환 공약을 요구하는 행진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기후순례’는 2013년 삼척 핵발전소 반대 투쟁이 한창 벌어질 때 성원기 강원대 교수(현 명예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이후 핵발전소 백지화(2019년 5월)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핵’을 넘어서니 ‘석탄’이, 다시 ‘핵’이 기다리는 상황이 반복됐다. 기후순례가 서울의 정치인들과 언론이 외면하는 지역 주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타지역·단체들이 연대하는 ‘하나의 매체’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이번 순례를 포함한 ‘삼척~서울’ 탈탈탈 기후순례는 총 17차례 이뤄졌다. ‘마지막 석탄발전소’ 삼척석탄발전소(블루파워) 공사가 시작된 2021년 12월15일부터 삼척우체국~삼척시청 구간 순례가 매일매일 이어져왔고(870차례·5월21일 기준), 매주 수요일에는 삼척우체국 앞에서 탈탈탈 미사(127차례)가 열리고 있다. 2023년 11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탈탈탈 미사’ 참여가 공식 결정되기도 했다. “이 정도 안 하면 대선 후보들이 우리 얘기를 들어주겠습니까?” 하태성 기후순례단 단장(동해삼척기후비상행동 상임대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삼척 같은 곳에서 환경운동을 안 하면 이상할 정도”라고 말했다. 삼척 시내 중심가에서도 석탄발전소 굴뚝이 2개(반경 4㎞ 내 GS동해파워·삼척블루파워), 시멘트공장 굴뚝이 1개(삼표시멘트)가 보인다. 대기오염 물질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석탄발전소·제철소(DB메탈)·시멘트공장이 전부 밀집한 곳은 삼척이 유일하다. 석탄발전소 하역부두는 물론 세계 최대 규모 엘엔지(LNG) 생산기지(하역부두)까지 들어서는 바람에 삼척 바닷가는 해안침식에 몸살을 앓고 해양생물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하 단장은 “식민지처럼 전기는 뽑아 쓰고 공해물질은 너희가 다 가져가라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대만전력공사가 2025년 5월18일 0시부로 대만의 ‘마지막 원전’ 마안산 2호기 가동을 중단했다. 사진은 대만 최남단 핑둥현에 있는 마안산 1·2호기 모습. 장영식 사진작가 제공

대만전력공사가 2025년 5월18일 0시부로 대만의 ‘마지막 원전’ 마안산 2호기 가동을 중단했다. 사진은 대만 최남단 핑둥현에 있는 마안산 1·2호기 모습. 장영식 사진작가 제공


대만 마지막 핵발전소 가동 중단

성원기 명예교수는 “탈핵·탈석탄·탈송전탑은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재생에너지가 많이 생산되는 호남 지역에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면 대규모 송전탑을 깔 필요가 없다. 남쪽 외벽을 전부 태양광 모듈로 덮어서 서울 도봉구청과 같은 모델로 정부가 태양광 발전소에 대해 제대로 설계하고 재정 지원을 한다면 수도권 에너지 자급률이 높아진다”며 “이런 선택지를 두고 전기생산량 조절이 어려운 경직성 전원인 핵발전을 늘린다.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공급과 이에 대한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국가적인 에너지 정책 전환이 필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2025년 2월21일 산업통상자원부는 핵발전소 신설을 포함한 ‘제11차 전력수급계획’을 확정했다. “삼척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또다시 핵발전소 갈등이 벌어지려 해요. 작은 마을의 일부 주민에게 접근해 핵발전소를 계속 짓도록 설득할 궁리를 하는 거죠. ‘더럽고 위험한 삶’을 일부 지역에 언제까지 전가할 건가요. 대통령 혼자 원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공론화해야 하고, 대만처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해야죠.”(성원기 명예교수)

2025년 5월18일 대만의 마지막 핵발전소(마안산 원전 2호기) 가동이 중단됐다. 2021년 12월18일 국민투표로 핵발전소 운영 반대(52.84% 득표) 여론을 확인한 결과다. 한국은 정반대 길을 가고 있다. 6·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온 주요 후보들의 에너지 관련 공약을 보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2030년까지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2040년까지 한반도 에너지고속도로를 건설해 남서해안 해상풍력으로 생산한 전기를 해상 전력망을 통해 주요 산업지대로 송전하겠다고 밝혔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원전 비중 확대를 통해 에이아이(AI·인공지능) 시대 에너지 공급능력을 확충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반면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는 2035년 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조기 폐쇄, 공공재생에너지 확대, 탈핵기본법 제정으로 2040년 탈핵 달성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AI 산업 발전을 위해 데이터센터 등 전력 과소비를 풀려면 핵발전소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주요 후보들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다. 대선 후보 1차 티브이(TV)토론에서 “원전을 짓지 않고 AI 3대 강국이 어떻게 가능한가”(김문수 후보), “AI 산업 발전을 위해선 전력 확보가 중요하다. (핵과 재생에너지 가운데) 어느 게 효율적인지는 이미 드러나 있다”(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등의 발언이 나왔다. 이재명 후보도 “원전도 필요하고 재생에너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언주 민주당 중앙공동선대위원장은 “우파 에너지, 좌파 에너지가 따로 없다. 전세계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소형모듈원전(SMR) 산업 육성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2월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며 핵발전소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환경단체들은 이언주 위원장에 대한 해임을 촉구(5월19일)했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만 유일하게 탈핵(2040년까지 탈핵 달성)을 언급했다.

 

“지금 한국 정치권과 언론 반응을 보면 ‘우리가 뒤처지고 있다’며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게 흥분된 상태예요. AI 산업 발전을 통한 사회적 의미와 정책 방향에 대해 차분하게 논의·평가하지 못하고 있어요. 관련 업계 등 투자가 필요한 이해당사자들의 입장만 과도하게 반영돼 장밋빛 희망만을 강조하고 있죠.”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이 말했다.

이 정책위원은 △제11차 전력수급계획이 연평균 전력 증가를 16.8%로 과도하게 전망하는 점(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연평균 9.9%로 전망) △10~15년 뒤 준공이 가능한 핵발전소·SMR을 이미 본격화한 AI 개발 경쟁의 대안으로 거론하는 점 △이미 포화상태인데다 사회적 반감과 비용이 많이 들어 추가 설치가 쉽지 않은 전력망(송전탑)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점 등을 현재 AI 개발을 위한 전원 개발 논의의 문제점들로 지적했다.

 

 

2025년 5월21일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 삼척우체국 앞에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함페트릭신부 집전으로 129번째 탈탈탈 기후미사가 열렸다. 성원기 제공

2025년 5월21일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 삼척우체국 앞에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함페트릭신부 집전으로 129번째 탈탈탈 기후미사가 열렸다. 성원기 제공


AI에 흥분해 ‘디지털 절제’ 거론조차 안 해

‘AI와 기후의 미래’(착한책가게 펴냄)를 쓴 김병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독일이 2027년까지 데이터센터에서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했고, 아일랜드는 2022년 7월 탈탄소화와 디지털화를 균형 있게 추진하겠다고 했다. 중국도 에너지법(2025년 1월 시행)으로 데이터센터 재생에너지 이용률을 연 10%씩 증가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2024년 12월 통과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법률’(AI 기본법)에 기후위기 대응 내용을 전혀 담지 않았다.”

독일·아일랜드·중국은 미국과 함께 전세계 AI 관련 데이터센터가 가장 밀집한 국가들이다. 김 작가가 이어 말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도 신재생에너지 이용을 기본으로 가져가면서 발전소 건설 시간이 짧은 ‘가스 발전’을 ‘플랜B’로 생각한다. SMR은 ‘플랜C’ 정도로 거론됐을 뿐인데, 이게 한국으로 오면서 점핑돼 AI 발전을 위한 핵심으로 바뀌어버린다. AI로 인한 전력 부담과 이로 인한 기후·환경 부담 등도 함께 거론되는 미국 등 다른 나라 사례와 달리, 우리는 AI로 에너지 효율화가 이뤄지고 이로 인해 기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만 부각된다. 그러다보니 디지털 절제(Digital Sobriety·기후 환경 부담을 줄이고자 AI 등 디지털 기술 사용을 줄이는 일) 같은 개념은 거론조차 잘 안 되는 형편이다.”

“더 편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건드려 이 사회의 악은 우리가 삼척·울진·고리·월성·영광 그리고 태안·당진 등 핵발전소와 석탄발전소의 고통을 외면하고 강요하는 죄를 짓게 했습니다. 수도권과 대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발전소로 인해 생기는 부조리한 문제를 알려고 하지 않고 모른 척한 태도는 결국 밀양 할매들(2013년 송전탑 반대)의 고통을 다시 한번 홍천군민(현재 양수댐 반대)과 하남시민(현재 변전소 증설 반대)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5월15일 서울 광화문 탈탈탈 기후 미사에서 양기석 신부가 한 강론이다.

5월14일 20일차 순례길을 함께한 박신자 여호수아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 논리로, 국제적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연이 희생되고 또 주민들이 희생되는 걸 너무 당연시하고 있어요. 생태적인 연결성을 하찮게 생각하는 지금의 문화가 너무도 안타까워요. 석탄발전소로 기후변화가 일어났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가난한 약자들이고 자연이잖아요. 프란치스코 교황님(4월21일 선종)이 ‘찬미받으소서’ 회칙(2015년 5월 발표)을 통해 가난한 약자와 자연에 대한 보살핌을 우선하라고, 저희에게 그 책임을 촉구하고 있죠.” “더 많은 사람이 경제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대선) 후보들이 경제 분야 공약을 주로 내놓고 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삶의 토대인 환경이잖아요. 우리가 지금처럼 익숙한 삶을 계속 살면, 편리를 추구하면서 지속 가능한 환경이 될 수 없어요. 우리, 특히 기성세대가 어느 정도는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지구가 지켜지죠. 미래세대가 자기 꿈을 펼쳐나간다는 건 정말 큰 보람이잖아요.” 순례길에서 만난 김규봉 신부(지금동성당·가평구리남양주양평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가 말했다.

2025년 5월21일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 삼척우체국 앞에서 129번째 탈탈탈 기후미사가 열린 가운데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함페트릭신부가 강론하고 있다. 성원기 제공

2025년 5월21일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 삼척우체국 앞에서 129번째 탈탈탈 기후미사가 열린 가운데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함페트릭신부가 강론하고 있다. 성원기 제공


‘핵발전소 백지화’ 승리의 경험을 전국으로

삼척 근덕면에는 두 차례(1998·2019년)에 걸쳐 핵발전소 백지화를 이뤄낸 두 개의 기념비가 놓여 있다. 그저 소박한 삶을 꾸려가길 원했던 주민들은 1991년 3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7년9개월, 이어 2010년 12월부터 2019년 5월까지 8년5개월 두 차례 ‘전쟁’에 내몰렸다. 핵발전소 추가를 선언한 ‘제11차 전력수급계획’이 확정되고 닷새 뒤인 2025년 2월26일 삼척시청 앞에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핵발전소 결사반대’ 구호를 외쳤다.

‘이 승리의 기쁨을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물려주신 조상에 바친다. 우리의 반핵 의지를 이 땅을 지켜갈 후손에 계승한다.’ 1998년 첫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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