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2일부터 ‘내란음모’ 사건 재판이 진행 중이다. 국가정보원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총책’인 이른바 ‘RO’라는 조직이 여러 의미에서 내란을 모의했다고 주장한다. 이석기 의원 쪽은 혐의를 부인한다. 이 재판은 아직 본격화하지 않은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청구와도 맞닿아 있다. 정부(법무부)는 이석기 의원과 RO가 통합진보당을 장악해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합진보당은 이에 반발하며 소속 의원단이 단식 시위를 하고 있다.
선착순에서 추첨제로 바뀐 방청권 배부‘내란음모’ 사건 공판은 주 4회(수요일 제외) 수원지방법원(수원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 김정운)에서 열리고 있다. 첫 공판 때는 방청권을 관례대로 공판 1시간 전에 선착순 배포했다. ‘3박4일 노숙’을 불사하고 줄을 선 보수단체들이 방청권을 쓸어갔다. 변호인으로 나선 이정희 진보당 대표에게 “북한으로 보내!”라고 고함친 방청객 등 2명은 퇴장 명령을, 이석기 의원에게 욕설과 폭언을 했던 방청객 3명은 감치 3일 명령을 받았다. 2차 공판부터 방청은 추첨 방식으로 바뀌었다. 첫 공판 때는 법원 앞에서 보수단체와 진보당 시위대가 대치하는 살풍경도 빚었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시위는 잦아들었다.
재판정에서는 국정원·검찰이 이석기 의원 등을 기소하면서 적용한 각종 혐의들이 다뤄지고 있다. ‘이석기 경호팀’에 관한 증인 신문도 있었다. 이 의원이 운영했던 CNP그룹 직원 20여 명은 지난 4월6일 설악산을 찾았다. 검찰·국정원은 이를 특수경호팀의 산악훈련으로 본다. 19일 5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설악산국립공원 직원 유아무개씨는 “산불 방지를 위한 통제 기간 중… 사람들이 있어서 단속을 했다. 20여 명쯤 됐는데 8명에게 과태료를 부과했다”고 진술했다. 유씨는 ‘훈련을 목격한 적 있냐’는 질문엔 “없다”고 답했고, ‘다른 등산객과 차이가 있었느냐’는 질문에도 “없었다”고 했다. ‘단속 때 도망간 사람은 없었느냐’는 질문에도 “없었다”고 했다.
11월21, 22일 6·7차 공판에는 RO 관련 내용을 국정원에 제보한 이아무개씨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21일에는 검찰, 22일은 변호인의 심문이 진행됐고, 25일엔 대질심문이 예정됐다. 재판부는 피고인 가족 및 일반 방청객의 출입을 통제했다. 일각에서 이씨를 ‘변절’로 비판하고 있어 증인 보호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다. 피고인들과의 시선 접촉도 막았다. 피고인과 증인석 사이엔 가림막이 설치됐다. 증인 입장 때 법정 경위들이 우산 2개를 펼쳐 그를 가렸고, 피고인들은 벽을 보도록 했다. 14일 2차 공판 증인이던 국정원 직원의 경우에도, 신분 노출 방지를 위해 방청석과의 사이에 가림막이 설치됐다.
국정원·검찰이 주장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녹취록에 의존한다. 특히 ‘내란’과 관련해서는, 5월12일 저녁 서울 합정동 마리스타교육수사회 강당에서 있었던 진보당 모임의 녹취록이 핵심이다. 국정원·검찰은 제보자 이씨의 증언 등을 토대로 이 모임이 RO 모임이라고 본다. 지하조직인 RO로선 이례적으로 대규모 모임이지만, 그만큼 당시 한반도의 긴장 고조에 대한 엄중한 인식을 반영한다는 설명이다. 진보당 쪽은 앞서 이 모임이 경기도당 모임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제보자 이씨는 매수되었나이날 모임의 녹취록에는 통신·유류시설 타격, 장난감총 개조 등이 등장하지만, 변호인 쪽이 증거능력을 문제 삼으면서 증거 채택 여부에 대한 결정이 미뤄지고 있다. 먼저 입수 과정에 대한 의문이다. 국정원이 제보자 이씨를 매수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측이 떠돈 지는 이미 오래다. 지역 시민단체 및 당 동료들과의 갈등이나 경제적 어려움 탓에 매수당할 수 있는 ‘약한 고리’가 됐다는 얘기다. 변호인단은 22일 7차 공판에서 “수원시의원 윤모씨에게 ‘선배’라고 부르지 않아 갈등을 빚은 적 있었나” “당 수원시위원장에 다른 사람이 선출되자 화를 내며 사무실을 뛰쳐나간 적이 있느냐” 등을 물었다. 이씨는 부인했다. 변호인단은 이씨가 2009년 9월 아파트 계약 관련 대출과 부인의 퇴직, 장인의 투병, 당구장 인수 등으로 경제적 곤궁을 겪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정원·검찰은 이씨가 2010년 5월 국정원에 RO의 존재를 처음 신고했으며, 같은 해 8월 증거 확보를 위한 녹음기 제공을 부탁했다고 주장한다. 제공된 녹음기를 작동하는 게 서툴러 몇 차례 실패했을 뿐, 자발적이었다는 것이다. 14일 2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수사관 문아무개씨는 “제보자가 자진해서 녹음파일을 제출하겠다고 해 녹음파일을 건네받았고 들리는 대로 녹취록을 작성했다. 녹취록 작성 뒤에는 제보자가 이를 확인했다”며 매수설을 부인했다. 22일 7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이씨도 직접 문씨에게 제출했다고 진술했다.
[%%IMAGE2%%]녹취록의 왜곡 가능성에 대한 공방도 이어진다. 우선 원본이 아닐 가능성이다. 국정원은 제보자 이씨가 2011년 1월~2013년 9월 기간의 녹음파일 47개를 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초 디지털 녹음기에 저장했던 녹음파일은 내·외장 하드디스크로 복사된 뒤 일부가 지워졌다. 국정원 쪽은 ‘녹음기 용량 부족’을 이유로 대지만, 엄밀히는 원본이 삭제됐다고 볼 수도 있다.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직원이 이를 시인하자, 변호인단은 “디지털 증거는 원본을 제출해야 한다. 원본 아닌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다”며 증거능력 없음을 주장했다. 국정원 직원은 “변조는 없었다”고 반박했고, 국정원은 자료를 내어 “국과수를 비롯한 국내 음성 전문가들에 의하면, 디지털 음성녹음의 경우 원본을 위·변조할 수 없다”고 했다. 녹음파일이 담긴 SD 카드 등 저장장치를 국정원·검찰이 밀봉하지 않고 법정에 제출한 것도 시비를 불러왔다. 재판부는 증거능력 여부에 대한 판단을 일단 미룬 채 저장장치들을 봉투에 넣어 봉인했다.
녹취록 수정본에서 드러난 오류국정원이 뒤늦게 녹취록의 오류를 수정·추가한 것도 논란거리다. 이 입수한 국정원의 ‘수사 보고’를 보면, 국정원은 5월10일 ‘곤지암 모임’과 5월12일 ‘합정동 모임’ 등 일부 녹취록에 대한 수정본과 수정 내역을 최근 재판부에 냈다. 두 녹취록만 보더라도, ‘곤지암 모임’ 녹취록에서 38곳, ‘합정동 모임’ 녹취록에서 234곳 등 모두 272곳의 표현을 고치거나 보완한 것이다.
가 9월2~3일 이틀 동안 4개 지면에 걸쳐 보도한 합정동 모임 녹취록을 원본으로 보고 수정본과 비교해보면, 이석기 의원의 발언을 기록한 부분에서 어이없는 오류가 다수 눈에 띈다(표 참조). ‘사상누각’이라고 말한 것을 ‘사상전’이라고 쓴 것은 애교에 가깝다. ‘동서 냉전 이후… 반제반미 투쟁’을 ‘중소 냉전 이후… 완전난민 시대’라고 한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를 의심케 한다. 변호인단은 한층 심각한 의혹을 제기한다. 수정본을 보며 다시 원본을 돌이켜보면, 합정동 모임 장소 인근의 ‘절두산 성지’가 ‘결전 성지’로 둔갑했다. ‘선전전이 중요하다’는 ‘선전선동이 중요하다’라고 적혔다. ‘구체적 준비하자’는 ‘전쟁을 준비하자’로, ‘결정을 내보자’는 ‘결전을 이루자’가 됐다. 이런 표현은 이석기 의원이 호전적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게 변호인단의 시각이다. 이 의원의 농담에 좌중이 웃음을 터뜨린 대목을 따로 표시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육성 공개 없이 녹취록에 의성어·의태어 등이 전혀 담기지 않으면 의미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새롭게 발굴된 혐의점들국정원이 수정한 부분은 아니지만 곤지암 모임에서 이석기 의원이 “김근래 지휘원, 자네 뭐하는 거야, 지금!”이라고 했다는 부분도 변호인단은 문제를 제기한다. 국정원은 이 대목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더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해 여러 가지를 유추했다. ① 김근래 진보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이 술 냄새를 풍긴 이유 등으로 화가 난 이석기 의원이 결국 모임을 해산시켰고 ② 김 부위원장이 RO의 상급 조직원이기 때문에 이 의원이 ‘지휘원’이라고 불렀고 ③ 김근래 부위원장이 이틀 뒤 합정동 모임에서 동부권역 발표를 맡았으므로, 다른 권역 발표를 한 사람들도 모두 각 권역의 ‘지휘원’이라는 것 등이다. 녹취록을 작성한 국정원 수사관 문씨는 15일 3차 공판에서 “‘지휘원’이 정확히 들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김근래 부위원장이 20분가량 지각하자 이석기 의원이 ‘김근래 지금 오나! 뭐하는 거야, 지금!’이라고 호통친 게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수정본에서 고쳐지거나 보태진 부분이 이석기 의원 쪽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수정본에서 북부 권역모임 발표자가 “상황 발생시에는… 후방교란을 잘해야 된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애초 비워져 있던 부분이 ‘후방교란’이라고 명시됐다. 다른 참석자가 원본에서 “부산 국제시장에 가면”이라고만 했던 부분은, “부산에 있는 국제시장 가면 (웃음) 총 하나쯤 살 수 있다고 해서 알아봤는데 솔직히 없는 거예요”라고 보완됐다. 총기 구매 가능 여부를 알아봤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또 다른 참석자의 발언에서는 “혁명 수뇌부에 대한 죽음의 충성”이라는 표현도 새로이 ‘발굴’됐다.
이 밖에 국정원의 ‘수사 보고’에 담긴 다른 녹취록을 보면, 홍순석 경기도당 부위원장 등 구속 기소된 피의자들이 사상 학습을 진행하면서 김일성 주석을 ‘수령님’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장군님’으로 지칭하는 부분도 있다. 북한의 3대 세습은 “저쪽의 집단이 옳게 결정했겠지”라며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정희 진보당 대표는 호칭을 생략하면서도, 이석기 의원은 꼬박꼬박 ‘대표님’이라고 부른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김일성 주석의 ‘교시’를 어원으로 당 강령에 들어갔다는 주장도 여기에 나온다. 다만 이런 것들은 흔히 보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내용들이다.
재판부가 종국에 해야 할 일은 내란음모에 대한 판단이다. 헌법재판소도 향후 정당 해산 심판 과정에서 이 부분을 판단해야 한다. 국정원의 증거 왜곡 논란이 사실로 드러나면, 증거 채택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 내란음모도 정당 해산도 근거가 약해질 수 있다. 1차 분수령이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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