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의 목숨은 질겼다. 사망 선고를 받은뒤에도 그것의 맥박은 멈추지 않았다. 악몽 속에선 현실로 되살아났고, 현실 속에선 악몽이 돼 출몰했다. 한번 이빨을 박은 먹잇감을, 그것은 30년이 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3월21일 헌법재판소가 유신체제 긴급조치 1·2·9호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것의 입에서 산소호흡기가 떼어졌으나 숨까지 멎을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세월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살과 뼈와 혼에 그것은 깊은 낙인을 새겼다. 사위어가는 ‘긴조’의 망령과 싸우며 숨죽여 살던 ‘낙인들’이 재심을 빌려 세상 앞에 선다.
‘억울한 죽엄을 당한 자’. 늙은 아버지는 젊어서 죽은 아들을 그렇게 불렀다(2000년 9월 탄원서). 나이 마흔의 아들은 사흘 밤낮 알아듣지 못할 말로 고성을 지르다 늙은 아버지와 10살 딸 앞에서 운명했다. 아들의 온몸은 퉁퉁 부어 있었다. 1988년 7월2일의 일이었다.
19년 뒤 딸은 홀로 29살이 됐다. 늙은 아버지도 아들을 따라간 뒤였다. 2007년 7월. 경기도 포천의 한 병원을 찾은 딸은 아빠의 사망 직전 상태를 증명해줄 진료확인서를 뗐다.
“1988년 7월로 전신부종 및 정신혼란 및 고성방가 등 정신질환 등의 (간질환 포함) 의심으로 입원 후 전신 상태가 나빠져 의료원으로 후송되어 치료한 환자임.”
기억 속 아빠는 늘 아픈 사람이었다. 간이 망가졌고, 어느 순간 말을 못했으며,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숟가락을 들지 못할 만큼 힘이 없었고, 때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어린 딸은 아빠를 볼 때마다 충격을 받았다. 정신이 돌아오면 아빠는 묻곤 했다. “내가 멀리 떠나면 넌 어떡할래?” 딸이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아빠는 물었고, 답할 수 없는 것을 답하라는 아빠를 딸은 울면서 원망했다.
1977년 1월. 28살 아빠 이강현(1949년 출생·가명)씨는 버스 차장이었다. 그날 아빠는 강원도 화천군의 한 여인숙에 묵었다. ‘처음 만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박정희 정권을 비난하는 말을 뱉었다. 유신헌법과 광고 탄압을 비판했고, 보안대와 정보부의 폭력에 불만을 토했다(‘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재심청구서). 공포정치의 촉수는 사방에 뻗어 있었다. ‘처음 만난 남자’가 아빠를 낯선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육군 보안부대 요원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보안대에서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죄명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유언비어 날조·유포’였다. 할아버지는 탄원서에 썼다.
“무슨 죄를 범했는지 법을 모르는 우리들은 전혀 모릅니다. 한데 강현은 죄를 범하였다 하여 조사 중 전기고문을 당하여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비참하게 당하였고….”
삼촌도 아빠의 병이 전기고문 후유증이라고 했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집에 도착한 형은 이미 폐인이 된 상태였습니다. 보안부대에서 고문을 받아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덜컹거리고, 온몸이 붓고, 밤마다 전기고문 받는 꿈을 꾸며, 교도소 철문이 덜컹거리는 환청이 들린다고 했습니다. 형이 말해준 무시무시한 고문 내용을 어린 조카가 알까 두려워 침묵했습니다.”(동생 이아무개씨 인우보증서)
“아직도 끔찍한 시대를 살고 있어요”아빠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자마자 아빠는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됐다. 당직 교도관들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일일 동정보고’로 정리(영등포교도소 서무과 수감기록)해 상부에 올렸다. 서울구치소에서 이감된 날(1977년 6월18일) 당직교도관과 보안과장은 “1.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할 우려가 있어 2. 독거수용하고 3. 요시찰에 부하여 4. 그 동정을 엄중 시찰하겠다”고 보고했고, “요시찰에 부하고 동정사찰에 철저를 기할 것”이란 결재가 떨어졌다. 같은 해 9월24일 보고서는 아빠를 “석식부터 아무런 표현 없이 불식하다가 보안과장의 설득에 의거, 중식부터 취식하는 자”라고 표현하며 “계속 그 동정을 엄중 시찰하겠다”고 기록했다.
아빠는 수감 11개월 뒤인 1977년 12월25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만기 출소 ‘코앞 석방’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시혜를 베풀듯 즐겨 쓰는 방식이었다. 아빠는 취직할 때마다 직장에서 쫓겨났고, 생활고로 괴로워하던 엄마와도 이혼했다. 딸 이경은(35·가명)씨는 할아버지 밑에서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았다. 딸은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견디며 나이를 먹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빠를 신고한 사람이 누군지 너무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갓 20살이 넘었을 때부터 아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다녔고, 교도소를 방문해 아빠의 수감 기록을 확인했다. 그는 지난 2월 민변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아빠의 목숨값을 받아 억울함을 풀어드리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는 실명 공개를 원치 않았다. 영혼에 박힌 낙인은 대를 이어 유전됐다. 그는 아직도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다. “재심을 한다는 이유로 보복당할 것 같아 무섭다”고 했다. “아빠의 삶이 나에게도 전이될까 겁난다”고도했다. “세월이 바뀌었다지만 고통당한 이들과 그 가족은 아직도 끔찍한 시대를 살고 있어요. 그동안 우리는 너무 약자였으니까….”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시 ‘황무지’)이라고 정의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이하영(55)씨에게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노란 개나리가 활짝 폈을 때 중앙정보부에서 죽음 같은 고문을 겪었고, 노란 개나리가 떨어질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지옥을 경험했다. 노란 딱지(‘긴조 위반자’ 상징 표지)를 방문 앞과 수감번호(71 54) 위에 붙인 채 노르스름한 플라스틱 밥그릇으로 밥을 먹었다. 그에게 노란색은 평생 봄의 접근을 불허하는 소름과 공포의 색깔이다. 그에게도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국가 공식 사과 받아야 죽을 수 있어”그는 ‘저항시인’ 김지하를 흠모하던 문학청년이었다. 1976년 4월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노트에 쓴 ‘별말씀을 다하십니다’란 제목의 시를 “가리방(등사)으로 긁어” 지인들과 돌려 읽었다. 박정희 정권의 인권유린을 시를 빌려 꼬집은 글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에게 체포된 뒤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남산으로 끌려갔다. 중정은 그에게 “배후를 대라”며 고문했다. “중정 요원이 짬뽕을 시켜 같이 먹다가 면만 먹고 국물은 남겨두라”고 했다. 요원은 그를 “바로 눕히고 얼굴에 수건을 덮은 뒤 남긴 짬뽕 국물을 들이부었다”. 국물이 눈과 코로 흘러나왔다. 고문을 못 이긴 그는 깡통 따개로 손목을 긋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체포 사흘 만에 처음 잠을 잘 수 있었다. 중정은 그를 한 달 전 있었던 ‘명동사건’(3·1 민주구국선언사건)과 엮으려고 시도했다. 17살의 청소년에게 배후가 있을리 없었다. 국가기록원을 통해 확보한 재소자 신분카드에선 앳된 그가 자신의 한자 이름 푯말을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늦은 사춘기를 구치소 소년수 방에서 보내며 극한의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 그에겐 ‘곱징역’의 시간이었다. 소년수들은 ‘빨갱이 새끼’라며 날것의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방 동료들의 왕따로 ‘또박살이’를 견뎌야 했다. 1.24평 감방은 9명의 소년수를 가두고 있었다. 동료들은 ‘9분의 1’만큼의 공간만 그에게 허락한 뒤 경계를 벗어나면 집단 폭행했다. 구치소는 감방 안 가혹행위에 눈을 감았다.
그는 긴조 9호 위반(유언비어 날조·유포)으로 구속돼 1년3개월을 복역했다. 만기 3개월을 남기고 1977년 7월 출소했을 때 그는 ‘최연소 긴조 위반자’가 돼 있었다. 그는 석방 이후 줄곧 공황장애를 앓아왔다. “타고 가던 버스가 폭발할 것 같은 망상”에 시달리고, “처음 탄 비행기에서 죽을 뻔해” 다시는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감정 절제가 안돼 가족에게도 이유 없이 화를 낸다. 그는 방사능 치료로 이빨이 모두 상했다. 4기 편도암이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안 것도 3년 전 개나리가 피는 봄이었다. 현재 그는 경기도 부천에서 1인 인터넷 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남은 삶의 길이를 알 수 없는 그는 최근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였습니다. 긴조와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판단에 맡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경악합니다. 저와 피해자들이 역사 아닙니까. 병원에서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고 했지만 3년이나 살아 있습니다. 재심에서 무죄받고 국가의 공식 사과를 받은 뒤에야 저는 비로소 죽을 수 있습니다.”
민변, 긴조 피해자 2천여 명 추산‘억울한 죽엄을 당한 자’와 ‘최연소 긴조 위반자’는 피해자의 일부일 뿐이다. 3월21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국가배상 가능성이 커졌지만 정확한 피해자 수는 확인조차 되지 않는다. 2006년 진실·화해를위한과 거사정리위원회가 파악한 위반자 수는 1140명(사건 수 589건)이다. 위원회가 국가기록원 등에서 확보한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름만 집계한 수다. 권혜령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현 성균관대 법학연구소 연구원)은 “위원회가 확보하지 못한 판결문까지 고려하면 위반자는 100~200명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숫자 역시 피해를 입었지만 유죄 확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포함하지 않는다. 1979년 12월8일 긴조 9호가 해제되면서 재판 도중 풀려난 면소자나 기소유예·공소취소자도 제외돼 있다. 이들은 사건 기록을 입수해 스스로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민변은 이들을 다 합칠 경우 2천여 명까지 피해자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유죄 확정자들 중에서 민변을 통해 재심을 청구(재심 개시 7건)한 사람은 170여 명이다. 청구자 대부분이 당시 재야 정치인이나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48%에 달하는 ‘막걸리 보안법’ 피해자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위헌 결정 뒤 검찰의 잇단 항소 취하로 배상 가능성도 커지고 있지만, 피해자 절반이 거주지는 물론 생존 여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정말 피해 구제 의지가 있다면 ‘판결문이나 수사 기록에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민변 조영선 변호사는 “검찰과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국가 차원에서 공개해 피해자 현황 파악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혜령 전 조사관도 “진실화해위 시절을 돌아봐도 홍보가 절대 중요하다. 정부가 숨죽이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배상 가능성을 적극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긴조의 낙인’을 벗기는 일은 피해자의 의무가 아니라 가해자의 의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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