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북한은 남한 이외의 해외 투자자 유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에도 중국 자본을 필두로 중동과 유럽 자본의 대북투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중에서도 이집트 오라스콤 그룹의 투자가 대표적이다.
오라스콤 그룹은 2007년 7월 평양 상원 시멘트연합기업소 지분 50% 인수를 필두로, 2008년 1월 북한 체신청과 75 대 25 지분 합작으로 ‘고려링크’라는 이동통신 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2008년 4월부터 평양 류경호텔 공사 재개에도 참여한다. 현재까지 오라스콤 그룹의 대북투자(계약 기준) 규모는 약 5억~6억달러(약 5500억~6500억원)로 추산된다.
산업자본적 아닌 금융자본적 투자
그런데 최근 오라스콤 그룹이 북한 투자에서 기대한 수익을 내지 못했고, 자금난 때문에 대북사업에서 철수하고 있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오라스콤 그룹의 대북투자와 관련해 프랑스 라파즈 그룹, 아랍에미리트의 에마르 그룹, 독일-스위스의 켐핀스키 그룹 등이 새로운 투자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서구 정보 소식통들은 “(자금난 때문에) 대북사업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오라스콤 그룹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오라스콤의 대북투자는 애초부터 그동안 남한이나 중국이 해오던 대북투자와는 다른 성격의 경영전략과 목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라스콤 그룹은 창업주 온시 사위리스(82)가 일으킨 이집트의 최대 기업집단이다. 지금은 창업주의 세 아들에게 지분과 경영권이 분할 승계됐다. 첫째아들 나기브 사위리스(68)가 이동통신·미디어 부문을, 둘째 아들 사미 사위리스(65)가 호텔·부동산 개발 부문을, 셋째아들 나세프 사위리스(61)가 건설·시멘트 사업 부문을 운영하고 있다.
오라스콤 그룹 2세들은 그룹 명칭은 공동으로 사용하되 각각 독립적인 기업집단을 운영한다. 마치 현대그룹이 ‘현대’라는 이름을 공유하며 정몽구(자동차)·고 정몽헌(건설·상선·증권·대북사업)·정몽준(중공업) 등으로 나뉜 것과 같다. 오라스콤 그룹의 세 아들 중 대북투자를 주도한 사람은 첫째인 나기브인데, 이후 셋째 나세프도 동참하게 된다.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서 콥트교라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오라스콤 그룹 2세들은 스위스와 미국에서 주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이집트보다는 서구적 정체성을 가진 그들은 사업을 물려받은 뒤, 정세가 불안정한 중동·아프리카·서아시아 국가들에 집중돼있던 그룹의 사업 구성과 자산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중·장기적 경영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마침 2000년대 들어 세계 시멘트 업계에서 인수·합병을 통한 1위 경쟁이 치열해지고, 유럽 통신시장 자유화로 통신 서비스 업계의 인수·합병 시장이 커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의 선도기업들이 지정학적 이유로 진출하지 못한 국가들에서 주로 사업기반을 다져온 오라스콤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오히려 인수·합병 시장에서 매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때 한 중개인의 제안으로 주목하게 된것이 북한 투자였다. 2007년 무렵부터 추진된 오라스콤의 북한 투자는 사실 산업자본적 이익보다는 향후 매각 및 인수·합병을 통한 금융자본적 이익을 고려한 경영전략 차원에서 진행됐다. 인수·합병 시장에서 그들의 포트폴리오 특성 강화를 생각할 때 비용 대비 효과가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고, 그룹 전체 사업 규모를 생각할 때 투자액 또한 그다지 큰 부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멘트 이어 이동통신까지 매각할 듯
오라스콤 그룹 2세들의 이런 경영전략의 첫 결실은 2008년 가시화된다. 세계 시멘트업계 1위 경쟁을 벌이던 프랑스 라파즈 그룹이 오라스콤 건설산업의 시멘트 부문 인수를 제안한다. 오라스콤이 가진 전세계 시멘트 사업장들은 대부분 라파즈 그룹의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라파즈로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거래였다. 결국 셋째아들 나세프는 오라스콤 건설산업에서 시멘트 사업만 따로 분리해서 프랑스 라파즈 그룹에 무려 150억 달러(약 17조원)를 받고 매각했다.
나세프는 이 매각대금 중 일부로 프랑스 라파즈 지분을 확보해 단숨에 이 회사의 2대 주주가 된다. 표면상으로 나세프의 개인 지분은 1671주밖에 없다. 하지만 이 회사의 주식 지분 14.6%를 가진 2대 주주인 영국령 케이맨제도에 위치한 ‘엔엔에스홀딩’이란 지주회사가 사실은 나세프의 개인 자산을 관리하는 회사다. 그래서 현재 나세프는 프랑스 라파즈 이사회에도 사내이사로 올라 직접 경영에 참여한다. 추가로 그의 측근 2명이 ‘엔엔에스홀딩’ 몫의 이사진으로 경영에 관여한다. 이 매각의 성사 이후 나세프에게 더 이상 대북투자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라파즈그룹 차원에서도 현재로서는 과거 오라스콤 건설 쪽 계약 내용 준수 이상의 관심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라스콤 그룹 2세들의 또 다른 대규모 인수·합병은 첫째아들 나기브가 소유한 오라스콤 이동통신 부문에서 이뤄졌다. 나기브는 2011년 4월 오라스콤 텔레콤의 중동·아프리카·서아시아 등 8개국 이동통신 업체 사업을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주로 이동통신 사업을 하는 ‘빔펠콤’ 쪽에 65억달러(약 7조원)에 매각했다. 그는 매각 대금 중 일부를 빔펠콤 주식으로 받아 세계 5위 통신사업자가 된 이 회사의 세 번째 대주주가 됐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받아 역시 케이맨제도에 있는 자산관리 회사를 통해 올해 초 캐나다 금광업체 라만차 인수 등에 사용했다.
빔펠콤의 매각 리스트에서 빠진 이집트·레바논·북한의 3개국 이동통신 사업은 ‘오라스콤통신미디어기술’이라는 신설 분할 법인을 설립해 현재 관리 중이다. 나기브는 수익성이 높고 안정적인 이집트 이동통신 사업은 계속 소유할 예정이지만, 레바논과 북한에서의 이동통신 사업은 향후 적당한 시기에 매각을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라스콤은 시멘트 사업에 이어 이동통신사업까지 사업권 매각이 추진된다면 북쪽 당국의 반발이 예상되기에 이에 대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러나 오라스콤 그룹과 북한 당국의 사업적 관계가 이미 파국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나기브는 지난 10월 방북해 사업 논의를 한 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오라스콤 그룹의 여러 대북투자에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라파즈·에마르·켐핀스키 그룹도, 실제 내용은 그동안 알려진 바와 조금 다른 경우가 많다. 우선 라파즈 그룹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라스콤 건설의 시멘트 사업 인수·합병으로 얽힌 것 이상의 그룹 차원의 추가 투자 계획이 없다.
오라스콤 자금난 탓 철수설 사실 아냐
에마르 그룹의 대북투자설도 마찬가지다. 두바이의 초고층 빌딩 부르즈 두바이 개발로 유명한 에마르 그룹이 류경호텔 공사에 투자자로 참여했다는 설이 2009년 초부터 나왔지만, 에마르 그룹의 대북투자 검토 시작 시기는 2007년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에마르 그룹의 모하메드 알라바르 회장이 남한을 방문한 직후, 서울에서 전용기를 타고 이례적으로 서해 직항로를 통해 전격 평양을 방문한 것이다. 그는 평양에 하루 머물며 방북을 주선한 통일교 쪽이 평양에서 운영하는 세계평화센터와 보통강호텔 등을 방문했고, 북한 당국자로부터 대북투자 환경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알라바르 회장은 방북 이후 에마르 그룹 차원에서 의미 있는 수준의 북한 투자를 하지는 않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유럽의 한 정보 소식통은 “골프 애호가인 알라바르 회장이 북한 골프장 투자에는 약간의 관심이 있었다. 에마르 그룹 인력과 기술이 류경호텔 공사에 일부 관여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본격적인 투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북쪽에서는 애초 오라스콤 그룹에서 중동 5성급 호텔을 다수 소유하고 있는 둘째 아들 사미가 류경호텔 사업에 참여하기를 내심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미는 두 형제들과 달리 북한 사업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이후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켐핀스키 그룹 등 다른 기업의 류경호텔 운영권 참여를 논의하게 됐다.
이처럼 오라스콤 그룹의 대북투자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건전한 산업자본의 투자 활동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들에게 대북투자는 조세회피 구역인 영국 케이맨제도에 세운 지주회사들을 통해 운용하는 개인 자산만 30조원이 넘는 오라스콤 그룹2세들이 중동 기반 위험자산을 서구 기반 안전자산으로 재편하기 위한 기업 인수·합병 과정에서 이용한 작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니 오라스콤 그룹의 북한 투자를 두고 대북사업의 숨겨진 높은 수익성과 잠재력에 유럽과 중동 자본이 주목했다는 일각의 분석은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이다. 오라스콤 그룹이 북한 당국의 지나친 간섭으로 수익성이 악화돼 자금난에 봉착해서 최근 사업 결렬에 이르렀다는 주장 또한 그간의 사정과 맥락을 모르는 잘못된 분석이다.
그동안 대규모 대북투자 유치에는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개인들이 투자 초기 부터 개입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주로 북한 정권 및 지도자들과의 특수관계를 활용해 중개인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다. 최근엔 제네바 등 유럽에서도 대북투자와 관련된 새로운 중개인들이 활동한다. 이들은 수십조원의 거대 자본을 굴리는 유럽과 중동의 부호들을 위해 조세회피 구역에 다단계 지주회사를 세우고 다양한 자산관리 전략을 기획한다. 그들의 북한 투자 동기 및 전략은 논리 자체가 이전의 남한 기업들이 하던 산업자본적 대북투자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2012년 한반도의 자화상
이처럼 지난 5년간 중국이 북한의 지하자원과 사회간접시설 사업권을 대거 확보한 것도 모자라, 중동과 서구 자본은 금융자본적이익 추구 수단으로 북한을 활용해왔다. 그동안 국내 정치를 위해 남북경협에서 희생시켜온 남한 당국과 외국 기업에 비해 오히려 남쪽 기업을 공공연히 역차별했던 북한 당국, 남북한 모두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할 2012년 한반도의 자화상이다.
파리(프랑스)=윤석준 통신원·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유럽학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원 sem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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