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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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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 통해 경제도 발전하는 거지요”

‘혁명공약’에 동의해 공화당 사무총장까지 지내다가 유신 개헌에 반대해 탈당한 예춘호 전 의원에게 박정희와 2012년을 묻다
등록 2012-10-17 11:51 수정 2020-05-03 04:27
지난 10월1일 용인 자택에서 만난 예춘호 전 공화당 사무총장 모습. 용인/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10월1일 용인 자택에서 만난 예춘호 전 공화당 사무총장 모습. 용인/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너는 누구 편이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입장을 먼저 묻는 사람들의 뜨거움 앞에, 입장의 근거를 질문하는 사람들의 미지근함은 열기를 잃는다. ‘박정희의 편’과 ‘박정희의 반대편’ 사이에서 ‘너는 누구 편이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때문에 더 불거진 측면이 있다. 가 지난 9월10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7.6%가 유신에 대해 “중공업 육성에 나설 토대를 만들어 도움이 됐다고 본다”고 대답했다. 박근혜 후보가 유신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했지만, ‘경제발전을 위해 유신이 필요했다’는 정서는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근대화 비전 동의-유신 반대’는 가능한가

그럼, 이 남자는 누구 편일까. 1927년 2월6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일본에 여행을” 갈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조선인의 삶이 치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1945년 해방이 됐다. 좌우익 갈등 속에서 친구들이 많이 죽었다. 당시 모든 양심적인 청년들처럼 그도 마르크스, 레닌, 소련공산당사를 읽었다.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공산주의에도 동의하지 못했다. 전쟁중에 부산 동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영국의 자본주의 근대화가 화두였다. 진보적 경제학인 후생경제학도 공부했다. 고향에 내려와 수산대학(현 부경대)에서 강의했다. 책상에만 앉아 있지 못했다. ‘극동경금속공업사’라는 작은 업체를 운영했다. 후생경제학을 공부한 만큼, 공익사업에도 일찍 눈떴다. 1950년대 국가 예산의 30% 이상이 미국의 원조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수십달러였다. 미국 해외원조처(USOM)에서 지원하는 빈민을 위한 주택 건설 사업을 맡아 진행했다. 요컨대 지역의 진보적인 청년 엘리트였다. 그러다 1960년 4·19 혁명이 왔고, 1년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근대화 비전에 동의하는데 삼선개헌과 유신을 반대하는 게 가능한가. 취재수첩 앞장에 그 질문이 있었다. 예춘호 전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을 지난 5월과 10월 두 차례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만났을 때 거듭 던진 질문이었다. “쿠데타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올해 85살인 예 전 이사장은 큰 성량의 부산 사투리로 거침없이 답했다. 유도를 수련했을 것 같은 큰 손과 풍채에서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물론 우리는 군사 쿠데타에 반대했습니다. 군인은 전쟁에만 몸을 둬야하는 것이거든. 정치에 나오면 잘못된 거예요. 그런데 4·19는 혁명 주체가 없는 거예요. 대학생들이 국회를 짜고 정부를 짜고 해야겠지만, 학생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거든. 민주당이 안 싸운 건 아니지만 학생들만큼은 안 싸웠거든. 학생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굴복시켰단 말이죠.” 그는 4·19 혁명에 주체가 없었음을 거론했다. ‘부정선거 규탄’ 외에 슬로건도 없었다. 어부지리를 얻은 민주당은 실망을 줬다. 예 전 이사장은 1960년 4·19 직후 열린 7·27 국회의원 선거 때 무소속으로 등록했다가 72시간 만에 철회했다. 부산의 민주당은 자기 계파가 아닌 정치인의 선거를 방해했다. “민주당은 해방 직후 지주들이 만든 한민당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그때는 지식인들이나 제대로 양심 있는 놈들은 (민주당과) 관계를 철저하게 안 한 거예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가난했다. “군인들이 쿠데타 했지만 슬로건이 있다니까요. 김종필 전 총리가 쓴 혁명공약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상을 쥐어짠 에센스였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보릿고개에는 밥을 다 못 먹습니다. 비참했습니다. (민주당은) 대한민국을 이렇게 이끌어가야겠다 이런 게 없었어요.” 예 전 이사장에게 공화당의 이념을 물었더니 “가난을 몰아내자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만든 헌법을 지켜야 한다”

1926년생인 김종필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앞세워 38살의 나이에 불과 3천여 명의 병력으로 국가권력을 접수했다. 이한림 당시 1군사령관이 진압을 하겠다고 밝혔는데도 진압 명령을 포기한 윤보선 당시 대통령과 맞서 싸우는 대신 수녀원으로 도망쳐 잠적한 장면 당시 총리의 허약한 리더십이 역설적으로 쿠데타를 도왔다. 김종필 전 총리는 신념에 찬 의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세르 쿠데타 등을 공부해 정치의 작동 방식과 쿠데타는 쿠데타를 부른다는 동학을 이해하고 있었다. 숱한 중남미·아프리카의 독재자들과 달리, 원내와 원외를 분리한 근대 정당 공화당을 만들어 1963년 대선에 대비했다. 총구로 잡은 권력이 지속 가능하려면 의회를 통해 이끌어야 한다는 역설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국의 젊은 명망가를 포섭하려 접촉했다. 예 전 이사장에게도 연락이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리영희 전 논설위원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예 전 이사장은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전략에 동의했다. 1963년 부산 영도에서 출마해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사무총장이 됐다. 6~7대 의원을 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주 독대했다. 거기까지였다. 1969년 삼선개헌 반대를 주도했으나 막지 못했다. 한 차례 탈당한 뒤 복당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공화당을 탈당해 재야로 돌아섰다.

“유신 선포를 보고 느낌이 어떠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신문 보고 알게 됐죠. 벼락을 맞은 거나 마찬가지죠. 청천벽력이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삼선개헌을 경과하고 (박 전 대통령이)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겠죠. 삼선개헌 때 저 같은 일들로 해서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되겠다’ 이렇게 된 거지요.” 예 전 이사장은 놀라움을 강조했다. “삼선개헌 반대를 한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워서가 아니고, 공화당이 나빠서가 아니고, 이건 정치 자체가 망하는 거였어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유신이 잘못이지만 당시 냉전 상황에서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지만 뻔하게 알면서도 또 반복이 된다는 것 아니에요? 이승만 전 대통령이 4선까지 하려던 거 아니에요? 자꾸 무리가 가는 거예요. (삼선을 금지한) 헌법을 박 대통령이 만들었거든. 1961년 최고회의에서 만들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이 만든 헌법을 스스로 부정하려 했다는 취지다. “공화당이 있으니까 당에서 지도체계를 만들어가지고 당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삼선개헌을 금지한) 헌법을 지켜야 된다, 법을 만든 사람들이 헌법을 지켜야 된다, 그 당시 객관적 여건을 고려하고 (자유당) 13년 정치 경험을 돌아보고 만든 헌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19가 날 정도로 (자유당이) 했으니까 거울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재는 오히려 (경제에) 안 좋다고 판단하신 겁니까”라고 거듭 물었다. “그렇죠. 정당이 발전되어야 하니까요. 지도체제라는 게 공화당에는 있었어요. PK 라인, 박김 라인.” 공화당은 이념을 가진 정당이었고, 자본주의 근대화를 특정 개인이 아니라 당을 통해서 하는 게 옳았다는 취지였다. “결국 (자유당의) 12~13년간의 정치 경험을 통해서 당시 김종필 전 총리가 정치 문제를 분석한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정당, 국민들이 혐오하는 정당인이 아닌 새 일꾼들로 하는 새 사회를 만들 정당을 구상한 거예요. 그게 공화당입니다.”

예춘호 전 총장은 전두환 정권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기소돼 징역 12년형을 받았다.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앉은 예춘호 전 총장의 모습이 보인다.

예춘호 전 총장은 전두환 정권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기소돼 징역 12년형을 받았다.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앉은 예춘호 전 총장의 모습이 보인다.

20개월 복역 출소 뒤 민주화운동

그는 3공화국의 국가 주도형 경제발전에 동의했다는 면에서 보수주의자다. 동시에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 의회주의의 틀 안에서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믿었던 점에서 정당정치주의자이고 의회주의자였다. 그리고 정당정치의 신념이 그를 재야 활동으로 이끌었다. 1972년 10월17일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그는 정구영 전 공화당 총재와 함께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정구영 전 총재도 삼선개헌과 유신에 반대하며 박 전 대통령과 멀어졌다. 양순직·박종태 전 공화당 의원도 같은 입장에 섰다. 1974년 유신의 그늘이 점점 짙어졌다.

“정구영 선생이 1970년대 초 내게 ‘어느 날 박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공화당도 바로잡고 박 대통령도 바로잡겠다’고 말하며 그런 희망을 가지고 버티고 있었어요. 그런데 청천벽력처럼 유신이 나왔단 말이지요. 1974년 난상토론 끝에 정 선생이 본인과 제가 탈당하고 유신 반대 성명을 내기로 했습니다. 1월5일까지 휴일입니다. 6일에야 기자들이 나오거든. 그래서 (1974년) 1월6일 북아현동 정구영 선생 댁에서 유신 반대 성명을 내고 탈당계를 냈습니다. 그때 공화당 대변인이라는 녀석이, 제가 볼 땐 똘마니인데, 우리들더러 ‘배신자다. 공화당 총재, 사무총장을 지낸 사람들이 당에 배신 행위를 했다’고 보도자료를 냈죠. 그리고 긴급조치 1호가 나왔습니다.” 긴급조치가 내려지고 정구영 전 총재는 1978년 5월 숨졌다. 그리고 1년 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숨졌다. 예 전 이사장은 완전히 재야로 돌아서 “국회에서 욕친구”였다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이끌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잡혀가 고문수사 끝에 징역 12년형을 받았다. 20개월 복역 뒤 출소해 또 민주화운동을 했다. 1987년 양김 분열에 환멸을 느껴 현실정치에서 눈을 돌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직 제안을 다 거절했다. “정당이라는 건 평생 한 번 해야지 또 하고 또 하고 이러면 안 돼요. 대통령이 바뀌면 만들어지고 또 없애고 이러면 안 됩니다.”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이 그의 마지막 직함이다.

예 전 총장은 박근혜 후보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박근혜 후보는) 청와대 들어가보면 중학교 1학년 세라복(세일러복)을 입고 있더라고요. 박 후보가 우리 둘째아들과 국민학교 같은 반이었습니다. 박지만은 세발자전거 타고 이층 복도에서 왔다갔다 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2012년 대선에 누구를 찍을지 물었다. 지지 후보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돈을 받지는 않을 것 같다”고 장점을 평했다. 야당 후보들이 개선할 점을 물었다. “서로 자기를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외부 세력이 (단일화를) 강제 안 하면 상당히 힘들 겁니다.” 양김 분열이 준 상처가 느껴졌다. 2012년 대선의 시대정신을 물었다. “정당정치가 진보해야 합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양김 분열이 준 상처 “정당정치 진보해야”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예춘호 전 이사장은 국가 주도형 자본주의 근대화 편이었지만, 동시에 정당정치와 의회주의 편이었고, 그래서 한때 민주화운동가 편이었으며, 2012년엔 아직 누구 편도 아니다. ‘너는 누구 편이냐’고만 묻는 얇은 질문으로, 그의 선택의 두께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기부에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지난 8월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예종석(59)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등 아들 셋을 뒀다.

*참고 문헌: (언어문화), (성정출판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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