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연구자들은 대통령 박정희를 위협한 난적(難敵)으로 세 사람을 꼽는다. 첫 번째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던 김대중이다. 지역주의와 조직적인 관권(官權)의 동원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그해 선거에서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김대중에 대한 두려움과 견제 심리는 훗날 일본에서의 납치·살해 기도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시인 김지하다. 1970년 당시 29살의 청년 김지하는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통해 부패한 독재정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해 박정희의 눈엣가시가 된다. 결국 김지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나서야 옥문을 나올 수 있었다. 세 번째 적수가 광복군 출신의 재야 정치인 장준하다. 반정부 지식인 잡지 의 발행인이자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그는 셋 가운데 유일하게 박정희의 재임 기간에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숱한 의혹이 제기됐으나, ‘박정희가 죽였다’는 심증뿐 결정적 물증이 없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사후 37년 만에 재점화됐다. 지난 8월1일 그의 묘를 이장하며 이뤄진 유골 검시를 통해서다.
<font color="#877015">지름 6cm 구멍과 충격에 의한 균열</font>
장준하의 유골에 대한 의료진의 검시가 이뤄지기는 1975년 8월 그가 숨지고 나서 처음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그의 유골 감정을 추진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좌절됐다. 하지만 올해 그의 유골을 경기도 파주의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파주시 탄현면에 조성한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며 자연스럽게 검시가 이뤄지게 됐다. 검시 결과 유골의 머리 뒤쪽에 지름 6cm 깊이 1㎝ 크기의 함몰 자국과 함께 외부 충격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 균열이 발견됐다. 검시한 의사는 “인위적인 상처로 보인다”는 1차 소견을 냈다. “등산 중 실족에 의한 추락사”라는 사망 당시의 검찰 발표를 뒤집는 결과다.
사건의 후폭풍은 정치권으로 번졌다. 그의 죽음이 당시 유족과 재야의 주장대로 ‘정권에 의한 타살’이 맞다면, 박정희의 딸이자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 의원에게 정치적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민주통합당이 보도 이튿날인 8월16일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조사위’를 구성하는 등 발빠른 대응에 나선 것도 이런 상황을 의식해서다. 민주당 대선주자들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잃었는지 꼭 밝혀져야 한다.”(문재인 후보 트위터) “장준하 선생 가족이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구순을 앞둔 부인은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20만원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이래도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는 것인지 박근혜 의원에게 묻고 싶다.”(김두관 후보 트위터) 정세균 후보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침묵을 옛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딸이 보여준 성찰적 행보와 대비시키며 박 후보를 압박했다.
공천 헌금 파동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새누리당은 사건의 정치적 휘발성을 의식해서인지 말을 아꼈다. 일각(친박 진영)에선 “새로울 게 없다”며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박근혜 캠프의 핵심 관계자는 “(박 후보가) 5년 전 (장준하 선생의) 유족을 만났다”며 “지금 그게 나왔다고 어떻게 될 게 있겠느냐”고 했다. 박 후보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를 만나 화해를 모색했고, 타살 의혹이 제기된 것도 처음이 아닌 만큼 박 후보의 대선 행보에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font color="#877015">2004년 ‘진상규명 불능’의 이유</font>
새누리당의 이런 반응에는 의학적 정밀 검사를 통해 단순 실족사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사망 당시 고인과 주변 인물의 행적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새로운 목격자의 증언이 나오지 않는 이상, 2004년 의문사위 발표 내용 이상의 정치적 파괴력을 갖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2004년 의문사위가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린 것도 의학적 소견이 불충분해서라기보다, 장준하가 타살됐다면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를 밝힐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장준하가 처음부터 박정희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1961년 5·16 직후에는 권두언과 편집후기를 통해 쿠데타 세력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개혁을 이끌던 나세르가 청년장교들의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사실도 장준하의 오판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한-일 협정(1965년)과 3선개헌(1969년)을 거치며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성이 표면화되자 그는 누구보다 비타협적인 ‘반박정희 투사’로 돌아섰다. 19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경험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장준하의 죽음을 두고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은 것은 주검의 상태와 사망 경위를 둘러싼 의문점 외에도, ‘사고’를 당하기 전 장준하가 보여준 행적에서도 의미심장한 대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 아래서 숨진 채 발견된 1975년 8월17일을 며칠 앞두고 30년 넘게 보관해온 충칭 임시정부의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는가 하면, 아내와 갑자기 천주교식 혼례의식을 치르고 백범 묘소와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등 신변 정리를 서둘렀다. 평소 왕래가 뜸했던 김대중을 은밀히 만나는가 하면, 재야 원로 함석헌을 찾고 광주의 홍남순과 무등산을 등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가 광복 30돌(1975년 8월15일)을 전후해 중대한 정치적 거사를 준비하다 기관의 정보망에 포착됐고, 정치적 위협을 느낀 정권 수뇌부의 지시로 실족사를 가장한 ‘모살’(謀殺)을 당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삼웅 지음, 2009년).
<font color="#877015">‘사고’당하기 전의 의미심장한 행적</font>
장준하의 죽음을 둘러싸고 재점화된 의혹이 박근혜 후보와 그의 집권을 바라는 ‘박정희족(族)’의 정치적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불확실하다. 37년 만에 무덤을 열고 나온 고인의 원혼은 혹시나 알고 있을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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