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승지에 임명된 정약용이 정조에게 글을 올렸다. 동부승지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수석비서관이다. 임직을 고사하는 곡진한 소(疏·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을 취하였으되, 실상은 ‘사상 전향서’였다. 글의 시작부터 절절함이 묻어났다.
“신(臣)이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천주교)에 대하여 일찍이 그 글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였고 거론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인 심술(心術)의 바탕에 있어서는 대저 기름이 퍼짐에 물이 오염되고 부리가 견고함에 가지가 얽히는 것과 같은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정약용의 살아남기 위한 전향 혹은 배교
소를 올린 데는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다. 조정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왕의 친위세력인 시파를 견제하려고 무리의 신성(晨星) 격인 정약용 가계의 천주교 이력을 집요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정약용으로선 자신의 정치생명을 두고두고 위협할지 모를 ‘사상 문제’를 차제에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전향을 공인받기 위한 정약용의 필설은 실로 필사적이었다.
“애당초 그것(천주교)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성장한 뒤에는 그것을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분명히 하고 분변(分辨)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임금에게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當世)에 나무람을 당하여 입신한 것이 한 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왓장처럼 깨졌으니, 살아서 무엇하겠으며 죽어서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임(遞任·벼슬을 갈아냄)하시고 내쫓으소서.”(이상 정조 46권, 21년(1797년) 6월21일 두 번째 기사)
정약용의 사례에 ‘전향’이란 용어를 적용하는 게 적절한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 통용되는 전향은 ‘사회주의자(급진주의자)가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포기하고 체제가 공인하는 사상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가리키는 일본어 ‘덴코’(轉向)에서 유래했다. 이 정의를 따른다면, 정약용의 행위는 ‘전향’보다는 ‘배교’(背敎)라 이르는 게 합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눈여겨볼 지점은 있다. 갈아치우는 대상이 사상이든 종교든, 그 행위가 과거의 급진적 신념(정약용 시대에 천주교는 체제의 존립을 뒤흔들 수 있는 불온사상이었다)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형태로 드러나고, 그 부정이 외부의 강압에 의해 촉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정약용의 배교 과정에서 나타난 일련의 메커니즘은 일제강점기 이래 악명을 떨친 전향정책에서 동일한 형식으로 변주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진행되고 있는 사상적 공안 국면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한 보수신문 지면에 등장한 새누리당 초선 국회의원 하태경의 발언이다.
“주사파 출신 국회의원 한두 사람 날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과거 주사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종북 파동을 고백운동으로 바꿔나가야 한다.”(5월30일 인터뷰)
하태경은 1986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주사파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된 경험이 있는 ‘전향 486’이다. 그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종북 논란’이 본격화하기 한참 전인 지난 3월28일 인터뷰에서 “통진당에 과거 북한과 연결된 지하조직원 출신이 5명 이상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당시 이력과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자 이석기를 겨냥해선 “과거 북한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된 지하조직 민(족민주)혁(명)당의 서열 5위 안에 드는 핵심 고위직”이라고 ‘폭로’해 이념 논란에 불을 지폈다.
‘2세대 전향자’ 입을 빌린 정치적 겁박
하태경을 필두로, 한동안 잠잠하던 주사파 출신 486 전향자들이 공세의 전면에 등장했다. 계기는 4·11 총선 직후 불거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 경선 파동이었다. 새누리당 지역구 낙선자인 최홍재,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한기홍,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구해우 등이 나섰다. 이들은 모두 세칭 일류대 출신으로 1980~90년대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학생운동 조직의 지도부에서 활동한 뒤 1990년대 말 극단적 반북주의자로 변신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가장 맹렬하게 공격하며 북한 체제 전복론 등을 펼쳐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통합진보당 내부 취재에 어려움을 겪어온 보수매체들은 5월 초부터 이들 전향 주사파의 고백과 전언을 소스 삼아 대대적인 ‘이념 공세’에 나섰다. 논란의 초점은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부정 경선’과 ‘패권주의’에서 당권파를 위시한 통합진보당 민족해방(NL)파의 북한 인식과 이념 문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과장과 예단도 있었지만, 직접 체험에 근거한 전향자들의 구체적 진술은 일반 국민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주사파 운동권에 정통한 내부자가 아니라면 쉽게 접하기 힘든 고급 정보인데다, 진술의 신빙성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보수신문과 종합편성채널 등은 앞다퉈 그들의 전언을 소개했고,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일심회 등 1990년대 말, 2000년대 중반의 주사파 조직사건에까지 많은 지면과 꼭지를 할애해가며 ‘종북파’에 대한 공포와 경각심을 조장했다.
5월28일 1면 머리기사 제목은 ‘KAL기 폭파도/ 북 지령 따라 왜곡/ 그것이 주사파다’였다. 기사에는 ‘자민통 보스였던 구해우씨가 본 통합진보당 종북파’라는 문패 아래 ‘의혹 키우고 국민 현혹시켜/ 배후는 오직 북한 노동당/ 이석기도 무대 등장인물일 뿐’이란 중간 제목이 달렸다. 기사에서 구씨는 통합진보당 인사뿐 아니라 민주통합당 소속인 안희정 충남지사의 학생운동 시절 행적까지 언급했다.
는 5월24일 ‘이정희·김재연의 중간세대인 1996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종철씨의 주사파 고백’이란 제목으로 ‘2세대 전향자’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자신이 주사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술하는 차원을 넘어, 486 전향자들보다 더 극단적인 폭로와 전망을 쏟아냈다. “주사파들에겐 종북이란 말이 오히려 약하다. 이들은 수령론·후계자론·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대한민국을 북한처럼 만들자는 사람들이다. 북한이 무너지기 전까지 절대 종북세력은 바뀌지 않는다.”
전향자들의 고백 퍼레이드가 취하려는 목표는 분명해졌다. 애초부터 그들은 비전향자들의 뼈를 깎는 반성이나 통합진보당의 민주적·사상적 혁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점은 이종철의 이어지는 발언에서 한층 명료하게 드러났다. “이런 사람(종북파) 10명 정도가 국회에 들어가면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통진당이 섞인 야권 연대가 선거를 이긴다고 생각해봐라. 그러면 북한 김정은 왕조와 공동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권자를 향해 ‘이래도 야권 연대 지지하겠느냐?’는 정치적 겁박이었다.
김문수, PD 계열 전향의 극단
를 쓴 작곡가 겸 철학자 최정우씨가 5월28일 트위터를 통해 이 문제를 짚었다. “신문 전체가 ‘개심’의 변을 새삼 고백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부흥회장’이다. 자본과 파렴치와 추한 종교적 열정이 한 신문 안에서 이렇게 완벽히 만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도 자신의 트위터에서 전향자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환기한 터였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좌냐 우냐’가 아니라 ‘행태의 극단성’에 있었다. “극단주의자들은 극우에서 전향을 해서 극좌로 갔다가 다시 극우로 돌아온다. 그들이 가진 진짜 이념은 ‘극단성’이다.”(5월27일 트윗) 진 교수는 이미 올해 초 에 쓴 칼럼 ‘전향의 정치학’에서 최초의 주사 팸플릿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에 대해 “그가 반성할 것은 ‘좌’라는 방향이 아니라 극단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를 반성한 채 그 극단성을 그대로 갖고 ‘우’로 갔고, 그 결과 극우가 됐다”고 논평했다.
이런 변신의 극단성은 전향 주사파들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다수의 좌파들이 동구권 붕괴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목도하고 가시적·비가시적으로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순치해나갔지만, 유독 정치권에 진출한 좌파 중엔 변신의 폭을 극단적으로 가져나간 자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민중민주(PD) 계열 전향자로 꼽히는 경기지사 김문수가 그런 경우다. 1970년대 서울대를 중퇴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체제 변혁을 위한 정치투쟁을 강조하며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 운동가들을 경제주의·개량주의로 몰아세운 급진주의자였다. 1990년 장기표의 권유로 민중당 창당에 참여해 노동위원장을 맡았다. 그사이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와 소련의 해체(1991년)를 목격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변화는 대개의 좌파들이 그렇듯 이념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는 점진적 자기갱신 쯤으로 여겨졌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에서 의회주의 좌파로의 변신 말이다.
1992년 총선에서 민중당이 2%의 지지율도 얻지 못해 해산된 뒤 그는 좌절했다. 1994년 민정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 민중당 선배인 이재오와 함께 입당했다. 말 그대로 전향이었다. 그가 든 전향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민중당의 실패. 15대부터 내리 3선을 하고, 경기지사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는 충실한 말과 행동으로 전향의 이름값을 지불해왔다. 한때의 동지들을 앞장서 공격하며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고, 국가보안법을 옹호했다. 새로 편입된 집단 안에서 전향의 진실성을 인정받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그의 행보는 전향 동료 이재오가 유독 박정희와 ‘유신독재’에 대한 증오심만은 거두지 못하는 것과도 묘한 비교를 이뤘다.
전향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변신의 극단성은 보통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 욕구’의 산물로 설명되곤 한다. 변신에 따른 심리적 불안정을 메우려고 과거의 대극에 있는 신념·사상을 취하게 되고, 자신이 속했던 집단에 대해서도 한층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에 앞서 사회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전향을 경험한 일본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1930~40년대 일본 공산당 지도부의 다수는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포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천황제 파시즘의 열광적 지지자가 됐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핵심으로 꼽히는 라이어넬 트릴링, 어빙 크리스톨도 젊은 시절엔 극좌 트로츠키주의자였다. ‘네오콘의 한국판’이란 비아냥을 듣는 뉴라이트 역시 핵심 이데올로그들은 전향 주사파다.
주사파나 뉴라이트나 공히 부국강병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이들 행위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고 꼬집는다. “사람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좋아할 때,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좋아하는 행위 자체다. 그 행위가 나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 대상이 나에게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할 때, 그 대상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 다른 대상을 찾아나선다. 주저 없이 신념과 사상을 갈아치우는 사람들, 그들의 행위를 추동하는 것은 결국 ‘자기애’다.”
물론 이 교수는 주사파의 극적 변신을 전향으로 규정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이것은 주사파를 과연 ‘좌파’로 볼 수 있느냐는 논쟁적 주제와 관련된다. 그가 볼 때 ‘주사파=좌파’는 일종의 착시다. 한국에선 보수 우파가 민족·국가를 방기하다 보니, 민족주의자가 졸지에 좌파가 돼버렸다는 논리다. “그들이 희구한 것은 정상국가, 곧 민족국가였다. 자주적 통일국가는 결국 부강한 국가, 열강과 당당히 힘을 겨룰 수 있는 국가다. 그 가능성을 북한에서 찾았던 이들의 일부가 실상을 확인한 뒤 뉴라이트로 돌아섰다. 그들은 여전히 이상적 민족국가를 추구하고 있다. 뉴라이트의 선진화론이 대표적이다. 그게 과연 전향일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주사파의 변신은 총체적 자기부정이라기보다 즉자적인 ‘노선 선회’에 가깝다.
하지만 ‘전향’에 대해 엄격한 ‘개념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전향을 “근대 세계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특성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 세계는 복수의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공간인데, 어느 것이 진리인지를 판별할 절대적 준거가 부재한 상황에서 개인들이 상황과 인식 조건의 변화에 따라 신념 체계를 바꾸는 것은 예외적이기보다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전향을 대하는 시각이 어떻든, 타인에게 전향을 강요하는 행위가 심각한 반인간적 폭력이란 점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택광 교수는 “전향하라는 것은 사실상 주체성을 바꾸라는 것으로 결코 용인돼선 안 될 행위”라고 말한다. 특정 사상이나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개인의 인격 구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만큼, 억압이나 강요로 그것을 바꾸려 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김홍중 교수는 전향 논란에 자리잡은 ‘(나의) 진정성 대 (너의) 비진정성’의 대립 도식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전향자든 비전향자든 자신의 태도만이 진실되고 순정한 것이란 인식을 버리지 않는 한 ‘진정성의 폭력’은 언제든 타인의 인격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 형제의 비극을 새삼 재론하게 되는 이유다.
약종의 죽음에 끝내 침묵한 약용
정약용의 고백과 참회에도 반대파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위장 전향’을 의심하는 시선도 여전했다. 1800년 강력한 후견자였던 정조가 죽자 정약용은 다시 한번 옥사(신유박해)에 휘말린다. 1801년 그는 형인 약전·약종과 함께 혹독한 추국을 당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는 과거의 행적과 사상을 거듭해 부정하며, 배교를 거부한 형 약종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영세를 준 매형 이승훈을 저주했다. 심지어 천주교도 색출법을 자청해 조언하고, 처조카 황사영을 발고하기도 했다.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약종이 처형되고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정약용과 약전 형제는 남도로 긴 유배길을 떠나는 내내 형제와 일가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약종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철저히 침묵했다. 신념을 버리고 핏줄을 배신하면서까지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해 살아남았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19년의 유배가 풀린 뒤 고향에 돌아와 쓴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은 그 유장한 문체의 심연 너머로 속절없는 처연함이 묻어난다. 그가 남긴 명(銘)의 일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 하였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의 분운(紛云)함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창광(猖狂)을 거두어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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