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22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의 금품수수 의혹 수사를 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37)씨 부부의 미국 아파트 구입 의혹 수사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검찰은 4월30일 노 전 대통령 소환조사까지 마친 상황에서 가족들에 대한 조사까지 ‘완성’시켜 수사를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검찰은 5월7일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씨로부터 박연차(67)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받은 100만달러 사용처와 관련한 진술서를 받는다. 나흘 뒤에는 국제 공조를 통해 박 전 회장이 정연씨에게 40만달러를 송금한 사실을 확인한다. 5월20일에는 미국과 홍콩에 아파트 계약과 관련한 형사사법 공조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5월22일 브리핑에서 당시 홍만표 중수부 수사기획관은 “(아파트) 계약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계약서 원본을 파기했다는 (노정연씨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계약서 사본이 있으면 달라고 했다. 계약서가 확보되면 조사가 마무리 단계에서 깨끗이 끝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하루 뒤, 노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형사처벌 대상에 가족은 없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중수부(부장 최재경)가 고인의 가족을 다시 노리고 나섰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둔 민감한 시점이다. 유력 대선주자로 자리를 굳힌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친노 인사들이 대거 선거판에 뛰어든 상황이다.
3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6월12일 중수부는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며 이렇게 발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수수 의혹 사건. 혐의 요지. 노무현 전 대통령: 2006년 9월~2008년 2월. 박연차로부터 4회에 걸쳐 미화 합계 640만달러 등 뇌물수수. 처리 결과. 노 전 대통령에 대하여는 내사종결(공소권 없음) 처분. 박연차에 대하여는 내사종결(입건유예) 처분.” 640만달러를 실제로 받아 사용한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노 전 대통령 한 사람만을 ‘피의자’로 지목해 수사를 했고, 수사 종결 발표문에도 노 전 대통령 한 명만이 피의자로 등장한다. ‘대통령’을 보고 돈을 준 것이기 때문에, 형사처벌 대상은 가족이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이라는 게 당시 검찰의 판단이었다.
중수부는 지난 2월25일, 13억원을 ‘환치기’ 방식으로 미국에 있는 정연씨의 지인 경연희(43)씨에게 송금한 혐의(외국환관리법 위반)로 은아무개씨를 체포해 조사했다. 경씨는 3년 전 수사에서도 이미 등장했던 인물로, 정연씨 부부가 사들인 미국 아파트의 원소유주다. 앞서 검찰은 미국의 한 카지노에서 매니저로 일했던 이달호씨 형제도 조사했다. 이씨는 검찰에서 경씨가 정연씨에게 전화를 걸어 ‘100만달러를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한국에서 선글라스를 쓴 남자로부터 13억원이 든 돈 상자 7개를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돈은 은씨를 통해 경씨에게 전달됐다. 중수부 관계자는 논란이 커지자 “현재로서는 돈이 건네진 경씨에 대한 수사”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중수부는 13억원을 선글라스 남성을 통해 경씨에게 건넨 사람을 정연씨 쪽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2월29일 중수부는 수사 브리핑에서 “3년 전에 노 전 대통령 수사는 종결한다고 했지만 그 가족에 대해서는 (종결한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앞서 대검 고위 관계자도 “당시 가족에 대해서는 수사를 종결한다고 발표하지 않았었다. 최근 ‘가족에 대한 수사도 종결하기로 했다’고 기사를 내보낸 언론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쓴 것 같다”고 했다.
검찰 수뇌부, 박근혜 위원장에 줄 섰다?
중수부가 다시 수사를 하게 된 계기는 새롭게 등장했다는 13억원 때문이다. ‘3년 전 수사 종결 당시에는 몰랐던 새로운 내용이 나왔으니 다시 봐야 한다’는 논리다. 검찰은 이미 3년 전 정연씨에게 집값으로 흘러간 140만달러를 계좌추적과 혐의거래에 대한 사법 공조를 통해 확인해놓은 상태다. 이렇게 확인한 140만달러는 ‘노무현 공소권 없음-박연차 내사종결’로 어쩔 수 없더라도, 이번에 새로 등장한 13억원(환치기 뒤 100만달러)은 수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수부는 지난 2월27일에는 박 전 회장을 불러다가 “지금 문제가 된 13억원은 내가 준 돈이 아니다”라는 진술까지 받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부적절한 처신까지 감쌀 수는 없다 하더라도, 묻어두기로 했던 과거를 민감한 시점에 다시 들쑤시는 중수부의 행태에 대해서는 야당 등으로부터 ‘매우 고약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극우단체인 국민행동본부(대표 서정갑)는 지난 1월 말 13억원 의혹과 관련한 수사의뢰서를 대검에 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대대적인 검찰 개혁 요구를 촉발했던 중수부가 극우단체의 수사의뢰서 한 장에 움직인 것도 그렇지만, 수사 실익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사건에 검찰총장 직할부대인 중수부가 나선 것도 검찰 수사 방식을 아는 이들을 갸웃하게 만든다. 검찰은 형사처벌이 가능해야 움직인다. 노 전 대통령이 숨진 상황에서 법적 책임을 물을 대상이 없기 때문에 13억원 의혹도 공소권 없음 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설사 정연씨를 뇌물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벌하려 해도 정연씨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않으면 처벌은 어렵다.
수사 실익은 없지만 ‘먹물 튀기기’ 효과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등은 3년 전에도 자신들이 보도했던 내용을 마치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내용인 양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새누리당은 문재인 고문 등을 공격하는 불쏘시개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총선과 대선에서 야당이 권력을 잡을 경우 필연적으로 불어닥칠 검찰 개혁을 막으려 중수부가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다시 칼을 겨눴다는 분석도 나온다. 검찰 개혁의 첫 번째는 중수부 폐지가 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검찰 수뇌부가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쪽에 줄을 선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이에 대해 대검 고위 관계자는 “수사 착수에 대한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 시각은 너무 기계적이다. 이 사건은 일단 수사 의뢰가 들어온데다 마침 이씨 형제도 한국에 들어왔다. 우리가 사전에 이씨와 접촉한 사실도 전혀 없다. 우리가 수사 착수 시기를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경씨와 함께 일하다 사이가 틀어진) 이씨는 경씨를 어떻게든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수사 시기, 얼마든지 ‘선택’ 가능해
수사 착수 시기는 사실 ‘선택’이 가능하다. 이 정도 사안이라면 더욱 그렇다. 검찰은 총선 등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는 시기에는 관련 수사를 가급적 피해왔다. 이에 대해 대검 고위 관계자는 “총선을 넘겨 수사에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또 대선에 영향을 주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을 것이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도 그랬지만 큰 선거로 갈수록 이런 식의 압박은 점점 더 심해진다”고 했다.
중수부는 2009년 6월 관련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끝내며 “이번 사건에 관한 역사적 진실은 수사 기록에 남겨 보존된다”고 ‘아쉬움’을 나타낸 바 있다. ‘역사적 진실’로 봉인해뒀다는 내용들이 불과 3년 만에 캐비닛에서 튀어나오는 데 이유가 없을 수 없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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