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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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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손등을 뒤집어 남북이 함께 손뼉을 치자

미국이 ‘인내’에서 ‘개입’으로 전략 바꾸고 북-미 관계 빠르게 대화 수순을 밟아가… ‘통미봉남’ 피하려면, 권력승계 국면에서 머뭇거리는 북한에 남쪽이 더 적극적 손길 내밀어야
등록 2012-01-12 03:15 수정 2020-05-02 19:26

‘손뼉을 치려면, 손바닥이 두 개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탱고를 추려면, 두 명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일에는 상대가 있고,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뻔한가? 세상 이치가 대체로 그렇다.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 역시 비슷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남과 북이 엇박자를 낼 때마다, 외국 언론에 흔히 등장했던 표현이 ‘손뼉’과 ‘탱고’ 비유였다.

MB 정부, 대북정책 ‘유연화’ 조짐?
정부가 달라졌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발표 직후 조문단 파견에서 전보다 ‘유연한 행보’를 보인 데 이어, 북쪽을 향해 사실상 대화를 제의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1월2일 내놓은 신년사에서 “한반도 정세가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다”며 “기회의 창을 열어놓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어 “(남북이) 대화를 통해 상호 불신을 해소하고 상생공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통일은 누구보다도 한반도의 주인인 남북한이 함께 해결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좀더 구체적인 표현은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내놨다. 류 장관은 1월5일 새해 업무보고를 마친 뒤 연 기자회견에서, 변화된 한반도 정세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핵심 과제로 ‘남북 간 대화채널 구축’을 꼽았다. 그간 남북 대화를 가로막아온 천안함·연평도 문제에 대해서도 “대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대화를 할 때 테이블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의제”라고 밝혔다. 류 장관은 이어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포괄적 의미의 대화 제안”이라는 나름의 해석도 덧붙였다.
같은 날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내외신 정례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발언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김정은 북쪽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남북 협상의 파트너로 인정할 것인지를 묻자 김 장관은 “북한과 회담을 하면서 거기에 합당한 직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분과 회담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미 대화 전망과 관련한 질문에도 “북-미 대화만 있고, 남북 대화는 없을 것으로 단정하지 말아달라. 우리도 나름 노력하고 있으니 결과를 기다려보자”고 말했다. 지난 4년여 남북관계에 비춰, 이 정도면 ‘적극적’이라 평할 만하다.
북쪽은 어떤가? ‘애도 기간’을 통과한 직후부터 한껏 목청을 돋우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을 치른 지 사흘 만인 지난해 12월31일 북쪽 국방위원회는 성명을 내어 “(이명박 정부와) 영원히 상종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바라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어 1월2일엔 북쪽의 대표적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가 나서서 ‘민족의 대국상에 칼질을 한 리명박 역적패당은 준엄한 심판을 받고 파멸에 처하게 될 것이다’란 제목의 성명을 내놨다.
사흘 뒤인 1월5일 조평통은 서기국 명의로 다시 장문의 ‘상보’(성명에 대한 일종의 해설)를 내놨다. 제목은 사흘 전보다 더 심하다. ‘괴뢰역적패당의 천인공노할 반인륜적·반민족적 죄악의 진상을 폭로한다.’ 조평통은 이날 상보에서 남쪽 정부를 향해 “극악무도한 대결광신자” “천하 불망나니” “희세의 패륜패덕의 무리” 등의 맹비난을 퍼부어댔다. 남쪽이 다가서자, 뒤돌아 뛰어가는 모양새다.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1월5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1월5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미국은 남북관계 개선 원해

남과 북이 엇박자를 내고 있는 새, 미국의 잰걸음을 놀리고 있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김 위원장 사망 이후 처음으로 한·중·일 순방길에 나섰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1월4일 방한한 캠벨 차관보는 이튿날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인 임성남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과 만난 뒤 약식 기자회견을 열어 남북 대화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했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며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고,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리해보자. 남쪽은 조심스레 대화를 모색하는 듯하다. 김 위원장 사망 직전 북쪽과 우라늄 농축 중단과 24만t 영양지원(식량원조)에 사실상 합의한 미국은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가려는 모양새다. 북쪽은 ‘정중동’이다. 한-미가 북쪽을 바라보는데, 북쪽은 그 시선을 피해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한반도 정세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남·북·미의 셈법에 따라 갈릴 것이다.

남쪽이 달라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김창수 사단법인 통일맞이 기획위원은 “정부 처지에선 북-미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자 ‘통미봉남’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라며 “남북관계 단절이 지속되면, 대중국 협력채널마저 끊어질 수 있다는 점도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최근 보이고 있는 ‘변화’는 기실 정책적 필요성에 따른 방어적 움직임이란 얘기다.

미국의 ‘변심’을 이해하려면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1월 초 미-중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을 면담한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불쑥 이런 얘기를 했다. “북한은 향후 5년 안에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다.”

같은 달 중순 이어진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도 비슷한 발언을 내놨다. 당시 의 보도(1월20일치)를 보면, 오바마 대통령은 후 주석과의 만찬회견에서 △우라늄 농축 활동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등 북한의 ‘3대 위협’에 대해 집중 거론했다. 전략적 판단에 따라 대북 ‘인내’로 일관해온 미국이 이후 ‘(관리를 위한) 개입’으로 돌아선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역시 ‘전략적 판단’에 따른 행보였던 게다.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은 이렇게 진단했다.

“북-미는 이미 ‘춤’을 추고 있는 상황이다. ‘주고받기’의 원칙에는 이미 합의를 했고, 다만 서로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을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김 위원장 사후 미국 쪽에서 ‘공은 북쪽에 있다’고 강조하는 것도, 방침을 정해 통보를 해달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이 과정이 무리 없이 마무리되면, 고위급 접촉을 통해 생각보다 이른 시일 안에 6자회담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우리가 열어야 할 ‘기회의 창’

이 전 차관의 분석을 받아들인다면, 방한한 캠벨 차관보가 ‘남북 대화’를 강조하고 나선 이유도 짐작이 가능하다. 일종의 ‘학습효과’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조문 파동 등을 겪으며 남북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지만, 북-미는 이내 접촉을 재개했다. 석 달여 만인 그해 10월 북-미가 1차 북핵 위기를 마무리짓는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끌어냈을 때, 남쪽은 회담장 밖을 서성거리며 ‘귀동냥’을 해야 했다. ‘통미봉남’은 우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남북 대화의 진전 없이, 북-미 대화가 순조롭기는 어려워 보인다.

북쪽은 김정은 부위원장으로 공식적인 권력 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 불러온 불안정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외관계 개선을 서두르기보다,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힘을 쏟을 가능성이 높은 게 현실이다. 남쪽을 향해 연일 독설을 퍼붓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결국 ‘공’은 남쪽에 있는 것”이라며 “머뭇거리는 북쪽을 향해 인도 지원 문제를 포함해 좀더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기회의 창’은 기실 우리 스스로 열고 들어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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