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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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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

한상률 귀국 뒤 시작된 수사 20일째…

부조리 있으나 엮어낼 ‘한 방’ 없다는 검찰 뒤로 스멀대는 ‘정권 비호설’
등록 2011-03-23 17:15 수정 2020-05-03 04:26

지난 2월24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출발한 비행기를 타고 그날 새벽 5시26분 인천국제공항에 내렸다. ‘입국시 통보 조처’에 따라 법무부는 한 전 청장 고발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에 한 전 청장의 귀국을 알렸다. 그날 오전 서울중앙지검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지난 2월28일 오후 검찰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한겨레 신소영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지난 2월28일 오후 검찰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한겨레 신소영

형사처벌 어렵다고 판단한 검찰

한 전 청장의 귀국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 흩어져 있던 기자들이 서울중앙지검으로 모여들었다. 검찰에 비공식 브리핑을 요구했고, 서울중앙지검 고위 관계자가 기자들을 맞이했다. 그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한상률이… 무슨 비리덩어리요? 그래서 탈탈 털어야 하나?”

한 전 청장을 향한 박약한 수사 의지를 드러낸 건가, 아니면 언론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을까. 검찰은 2년간 손 놓고 있던 ‘한상률 의혹’ 수사를 그렇게 시작했다. 숱한 의혹을 안고 돌아온 한 전 청장을 두고 누구는 ‘비밀의 귀환’이라 했고, 누구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거라고 했다. 그러나 수사 착수 20일이 지났어도, 한 전 청장 자택 압수수색 과정에서 의문의 그림 10여 점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 밝혀진 새로운 사실이 없다.

민주당이 한 전 청장을 고발한 혐의는 크게 세 가지다. 그가 차장 시절이던 2007년 초,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최욱경 화백의 그림 을 선물하면서 경쟁자를 찍어내달라고 청탁했다는 게 ‘그림 로비’ 의혹이다. ‘골프 로비’ 의혹은, 한 전 청장이 2008년 12월25일 경북 경주에서 국회의원, 지역 기업인, 이명박 대통령의 동서 등과 골프를 치거나 식사를 하면서 국세청장 연임 또는 국토해양부 장관으로의 영전을 부탁했다는 내용이다. 한 전 청장은 또 ‘박연차 게이트’ 수사의 단초가 된 태광실업 특별 세무조사를 지시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골프 로비나 태광실업 표적 세무조사는 처벌까지 가기에는 입증이 어렵다는 게 검찰 내부의 중론이다. 골프와 식사 과정에서 어떤 청탁이 있었는지 관련자들이 입을 맞추면 사실확인은 어렵다. 또 서울지방국세청이 관할도 아닌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한 것도 업무 절차상 이례적인 일은 아니어서 이 부분을 직권남용으로 처벌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지언정, 형사처벌까지 가기에는 무리라는 얘기다.

‘말 맞추면 승산 있다’ 자신하고 들어왔나

세 가지 고발 건 중에서 그나마 꼬리가 길어 밟힌 사안이 ‘그림 로비’ 의혹이다. 한상률 전 청장이 차장 시절이던 2007년 초, 1급 인사를 앞두고 전군표 국세청장 부부에게 을 주면서 “경쟁자인 김아무개 지방국세청장을 밀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내용이다. 2009년 1월 전군표 전 청장의 부인 이아무개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밝혔는데, 당시 이씨는 한 전 청장이 “(경쟁자가) 종교재단에 거액 헌금을 했다는데 그 부분을 캐면 되지 않겠느냐”며 구체적인 ‘축출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폭탄 발언’은 당시 뇌물죄로 수감돼 있는 전 전 청장을 보호해주지 않는 한상률 당시 청장에 대한 서운함의 발로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유야 어찌됐든 ‘골프 로비’에 ‘그림 로비’ 의혹 보도로 연타를 맞은 한 전 청장은 사의를 표명했고 청와대는 진상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 전 청장이 ‘찍어내달라’고 했던 김아무개 지방국세청장은 2007년 4월 사퇴했다. 그는 한 전 청장과 행정고시 21회 동기로, 차기 국세청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특히 대구 출신인 그는 한나라당으로의 정권 교체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점엔, 충남 출신인 한 전 청장보다 차기 청장에 한발 더 다가서 있었다. 그러나 김 지방국세청장은 혹독한 내부 감찰을 받은 뒤 퇴임식도 열지 않은 채 쫓기듯 국세청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전군표 전 청장 부인이 폭로한 한 전 청장의 ‘청탁 내용’과 맞아떨어진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지난 3월7일 오전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한상률 전 국세청장 등 피고발 사건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한겨레 탁기영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지난 3월7일 오전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한상률 전 국세청장 등 피고발 사건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한겨레 탁기영

그러나 전군표 전 청장은 부인의 인터뷰 뒤 한 전 청장이 사퇴하는 등 ‘후폭풍’이 일자 입장을 싹 바꿨다. “청탁은 없었고 그림은 대가성이 없는 순수한 선물”이라고 해명한 것이다. 전 전 청장 부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2007년 11월 뇌물 혐의로 구속된 전 전 청장에게는 뇌물 혐의가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다. 지난해 9월 가석방된 전 전 청장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도 ‘단순 선물’이라는 진술을 그대로 유지했다. 수수자와 공여자가 대가성을 모두 부인하는 뇌물 사건을 검찰이 입증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상률 수사는 “답답한 사건”이라며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 검사가 많다. 조각조각 부조리한 정황은 있지만 확실하게 옭아맬 수 있는 ‘한 방’이 없다는 얘기다. 한 전 청장이 이런 상황을 다 간파하고 돌아온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지방검찰청의 한 중견 검사는 “한 전 청장이 2년 동안이나 도피성 유학을 다녀왔다는 점에서는 냄새가 폴폴 난다”면서도 “사건화가 가능한 부분이 ‘그림 로비’ 하나뿐인데, 이건 전군표 전 청장 쪽하고만 말을 맞추면 자기 선에서 방어가 가능하다는 심산이 섰으니 들어온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중요한 건 수사팀의 의지

한 전 청장이 ‘무혐의’를 확신하고 귀국했다면, 이는 오래전부터 제기된 정권 차원의 비호설과도 연결지을 수 있다. 2009년 1월 한 전 청장은 ‘그림 로비’ 의혹으로 사퇴하고 검찰 수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두 달 뒤 유유히 미국으로 떠났다. “진상 조사 뒤 검찰에 수사 의뢰하겠다”는 청와대와, “의뢰가 들어오면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어정쩡한 태도 덕이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일찌감치 ‘정권의 한상률 비호설’이 나왔다. 한 전 청장은 또 참여정부 시절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장과 차장 등 요직을 거치면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와 가족의 재산 내역을 조사하는 등 현 정권 핵심부의 ‘뒷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 교체 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한 전 청장에게 ‘MB 파일’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고, 한 전 청장은 오히려 이 사실을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에게 알려 이 대통령이 정 의원에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질책했다는 일화도 잘 알려진 얘기다. 한 전 청장이 가진 ‘내밀한 정보’가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검찰의 한 간부검사는 “어려운 사건이지만 이번에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두고두고 검찰에 부담이 되는 사건이 될 것”이라며 “외압이 있든 없든 중요한 건 수사팀의 수사 의지”라고 말했다.

김태규 기자 한겨레 법조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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