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물결에 휩쓸려 1980년대를 살아간 두 명의 청년이 있다. 두 사람은 ‘예민한 소수’였다. 지금은 중년의 학자가 됐다. 주체사상과 북한을 연구하고 있다. 한 사람은 주체사상에 대한 미련을 접었고, 또 한 사람은 주체사상에서 새로운 자양분을 구하고 있다. 주체사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황장엽이 죽고, 주체사상의 ‘수령론’에 입각한 북한의 3대 세습이 진행되는 2010년 10월, 그들에게 물었다. 그 시절 당신에게 주체사상은 무엇이었나. 오늘 우리에게 주체사상은 무엇인가. 편집자
서울 삼청동 언덕에 가을 햇볕이 내린다. 볕은 김근식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의 연구실에도 들이친다. 책장에는 남북관계 서적이 가득하다. 가장 후미진 구석, 볕이 들지 않는 책장 한켠에 20여 년 묵은 책들이 있다. …. 1980년대 중·후반에 출간된 책이다. 그 시절 ‘민족해방파(NL)’가 읽던 책이다.
“이젠 영 안 보는 것들만 모아뒀죠. 그 책도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도 갖고 있는지 묻자, 김 교수는 책장 구석을 한동안 뒤졌다. 끝내 찾지 못했다. 그의 삶에 남겨진 주체사상의 흔적은 딱 그만큼이다. 아련하고 흐릿하다.
강력한 매력, 품성론그는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다녀왔다. 구학련은 주사파 지하조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학생 김근식은 서울대 강의실에서 구학련에 가입했다. 1986년 3월의 일이다. 그는 대학 4학년이었다. NL 계열 학생운동가를 망라하는 조직이라기에 선뜻 가입했다. 100여 명이 강의실에서 혈서를 썼다.
그는 자민투 산하 조통위원장도 맡았다. 구학련이 주사파의 비밀모임이라면, 자민투는 주사파의 대중조직이었다. “원래 이름은 굉장히 길어요.” 자민투는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의 준말이다. 조통위는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위원회’의 준말이다. 이루고 싶은 일이 많았으므로 내걸고 싶은 이름도 길어졌다. 그 이름을 되뇌며 김 교수는 웃었다. “진짜 옛날 일이네요.”
비밀모임도 많았다. 학교 안에 ‘패밀리’라고 부르는 운동권 그룹 대여섯 개가 있었다. 나중에는 ‘셀’이라 부르는 소모임으로 분화했다. 공개 활동이 불가능했으므로, 그들은 몰래 모여 의논했다. 캠퍼스에는 평상복을 입은 경찰이 언제나 있었다. 학내 시위를 해도 곧바로 경찰이 잡아갔다. 잡히면 곧장 감옥에 갔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비밀스러운 지하모임은 학생들의 방패였다.
운동 이념도 비밀스럽게 번졌다. 학생 김근식은 학내 수많은 ‘셀’의 하나를 이끌고 있었다. ‘셀’은 함께 모여 공부했다. 자본주의 비판이론과 다른 나라의 혁명사를 읽었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일본어판을 구해 읽었다. 유럽 학자들이 쓴 정치경제학 해설서도 읽었다. 러시아·중국·쿠바 혁명사도 읽었다. 군사정권이 지배하는 한국 현실을 비판하는 이론이라면 무엇이든 공부했다. 군사정권은 소련·중국·북한에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다. 그것이 표지석이었다. 군사정권이 한사코 덮으려는 이론에 군사정권을 기어코 뒤엎을 무기가 있다고 학생들은 생각했다. 그 시절,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전두환의 반대말이었다.
학생 김근식은 ‘팸플릿’도 읽었다. 한국의 정세를 분석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 논구하는 문서였다. 타자기로 치고 등사기로 찍어내 조잡했지만, 하숙방에 ‘셀’ 구성원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문건을 파고들었다. 누가 썼는지, 출처가 어딘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런 것은 물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불문율이었다. 주사파 관련 문건도 그때 읽었다. 김영환이 썼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당시 서울대 공법학과 학생 김영환은 가장 먼저 주체사상을 알렸고, 이후 가장 먼저 전향했다. 지금은 뉴라이트를 이끌고 있다.
김영환은 서울 청계천에서 구한 단파 라디오로 북한 방송을 듣고 1985년 가을부터 몇 건의 팸플릿을 만들어 학내 운동권에 배포했다. “한국 사회의 기본 모순은 한국 민중과 미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이며, 한국의 민주주의 혁명을 이룬 뒤 남북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는 게 한국 운동세력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남한에서 주사파의 지향을 처음으로 정돈해 천명한 것이다.
아직 ‘주사파’라는 명칭이 생기기 전이었다. 김영환의 팸플릿은 또 하나의 ‘이론적 무기’로 이해됐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 정서가 번지고 있었다. 복잡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미 제국주의를 타도 대상으로 규정한 문서는 강력한 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전략·전술을 정리한 문건보다 더 휘발성 강한 것이 있었다. ‘품성론’이었다. 1986년 초에 배포된 은 품성론을 담은 팸플릿이었다.
“서랍 속 이데올로기” vs “한국적 미래가 있다”“솔직, 소박, 겸손, 성실, 용감한 품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소박한 품성이란 사치나 허영, 공명심에 빠져 있지 않은 품성을 말한다. …겸손한 품성이란 거만하지 않은 품성을 말한다. …성실한 품성은 나태, 방탕하지 않은 품성을 말한다. …품성은 사상과 밀접히 관련돼 있으며 한 사람의 사상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에서)
1985년 이후 학생운동권 내부에 ‘사투’(사상투쟁)가 진행됐다. 혁명 이론을 둘러싸고 관념적 개념으로 말꼬리를 잡고 싸웠다. 팸플릿으로 서로 비방하고 분열했다. 학생 김근식은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싶었다. “바로 그때, ‘품성론’이 등장한 거죠.” 관념이 아니라 품성과 실천으로 운동해야 한다는 주장에 김근식은 빠져들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쩌둥의 저작과 달리 우리 말로 쉽게 설명된 그 언어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주체사상의 전모를 접한 것은 감옥에 다녀온 뒤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1988년 무렵, 국내에서 출간된 를 읽었다. 조야한 팸플릿이 아니라 체계적인 서적을 통해 주체사상을 처음 접한 것이다. “그런데 조금 짜증이 나더라고요. 글은 무지 긴데 앞에 나온 이야기를 계속 중언부언하고….” 그가 벽을 느낀 대목은 ‘수령론’이었다. 이해하고 수용하기에 힘이 들었다. ‘현명한 개인의 지배’라는 플라톤식 철인통치는 정치학의 오랜 화두다. 수령론 역시 그런 맥락의 논리일 수 있다. 다만 인류 역사의 수천 년 동안 그런 철인정치가 성공한 예가 없다. “심지어 (수령론을 내세우는) 김일성의 내면을 이해해보려고도 했지만” 학생 김근식은 주체사상의 핵심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김근식 교수는 남북관계 전문가다.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다. 그는 주체사상을 “서랍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북한 사람들조차 그 사상을 내면화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김 교수 역시 주체사상 관련 서적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민족문제 등에 주목한 ‘NL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념으로서의 주체사상은 그 생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방인혁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주체사상의 ‘한국적 미래’가 있다고 본다. 원래 그는 주사파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진짜 주체사상’을 공부했었다. 1986년 말, 북한에서 출간한 10권을 구해 읽었다. 장식 없는 회색 표지에 북한 특유의 글씨체로 제목을 적은 신국판 크기의 책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들여온 것 같긴 한데, 그게 누군지 확인해볼 시절은 아니었으니….”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게 첫 느낌이었다. 다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문제의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몇 명이 모여 비밀 세미나를 했지만, “너무 재미가 없고 굳이 함께 읽어야 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아서” 결국 혼자 독파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형과 주체사상1978년 서강대에 입학한 그는 1980년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전두환 집권 직후 내려진 계엄령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 유신 정권 말기, 그리고 전두환 정권 초기의 학생운동은 “반유신, 그리고 민주주의”면 충분했다. 그래도 감옥에 가서는 그람시·루카치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의 책을 읽었다. 읽을수록 몸이 달았다. “이게 우리 방식은 아닌데” 싶었다. 러시아와 유럽의 혁명 이론은 너무 멀리 있었다. 훗날 그가 주체사상에 호감을 느꼈던 이유다.
감옥에서 나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호헌철폐국민운동본부(국본)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마르크스를 모르는 NL, 주체사상을 모르는 민중민주파(PD) 모두 경계했다. 그들의 논쟁과도 거리를 뒀다. “양쪽 다 불만이었어요. 저는 어느 쪽에도 섞이지 못했죠.
그는 소수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주도한 이론 논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시절, 이론 논쟁이 치열하고 광범위했던 것 같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당면한 반독재 투쟁에 나서기도 바빴다”는 것이다. 그 역시 논쟁에 가담하기엔 너무 바빴다. 국본에서 일하던 1987년, 그는 사무실에서 전국 시위 상황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 정작 그는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다. 연세대 이한열 열사 노제에 가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집회 참여였다. 격동의 순간에도 누군가는 실무를 챙겨야 했다. 그는 운동단체의 실무자였다.
1987년 6월이 끝나자, 그는 수배자 신세가 됐다. ‘서울1로 9318’ 르망 승용차가 그의 집에, 사무실에 수시로 출몰했다. 그가 전세를 살던 집 주인까지 당국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 그는 5년 동안 도망다녔다. 출판사 일을 하며 혼자 생계를 꾸리는 아내를 1년에 한두 번 만났다. 모든 일이 끝나고 감옥에서 나왔을 때, 초등학생 딸은 중학생이 돼 있었다.
2001년 공부를 다시 시작한 ‘만학도’ 방인혁은 이후 석·박사까지 마쳤다. 주체사상을 연구했다. 운동 실무를 챙기느라 미처 궁구하지 못한 질문을 마무리짓고 싶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국적 마르크스주의’와 결판내고 싶었다. 그것은 금기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라면 모를까, 주체사상을 공부해서 한국에서 밥벌이하긴 쉽지 않죠.” 지난해 4월, 박사논문을 책으로 냈다. (소나무)은 주체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를 700여 쪽에 걸쳐 다룬 책이다. 이와 비교할 만한 책이 아직 없다. 그는 지금 주체사상의 현대적·한국적 복원을 꿈꾸는 거의 유일한 학자다.
그가 보기에 지난 150여 년에 걸쳐 ‘다양한 변형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했다. 사르트르는 ‘주체’를 강조했고, 알튀세르는 ‘구조’를 강조했다. 서구 잣대로 보자면, 주체사상은 주어진 구조가 아니라 이를 헤쳐나가는 주체를 강조한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상황에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변형해 적용했다. 서구 잣대로 보자면, 주체사상 역시 북한의 상황에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한 결과다.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푸는 것은 지금도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한 사상적 토대가 필요하다. 북한에서 형성된 주체사상이 한국적 상황에 걸맞은 비판 담론을 만드는 중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방 교수의 학문적 화두다.
“주체사상 잣대로” 본 북한 3대 권력승계
다만 방 교수 역시 ‘수령론’에 회의적이다. “독재이론이자 체제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수령론 때문에 주체사상이 (그람시·알튀세르의 이론과 달리) 보편적 사상으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체사상의 잣대로” 북한의 3대 권력 승계를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주체사상에서 수령이란 헤겔의 ‘절대정신’과 비슷한 개념이다. 개인이나 직책이 아니라 시대를 이끄는 비전과 리더십의 표현이다. 김정일만 해도 30여 년에 걸쳐 당·사상·경제·군대를 이끄는 리더십을 구축했지만, 김정은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비전과 능력을 드러내 입증하지 못한 리더는 ‘절대정신’의 지위에 올라서는 안 된다.
주체사상의 미래에 대한 입장은 조금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주체사상의 변질’에 주목하고 있다. 김근식 교수는 “한국 주사파가 열광했던 북한은 ‘1960년대까지의 북한’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건설을 시작하고, 중-소 분쟁 과정에서 자주노선을 지키면서, 1960년대의 북한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방인혁 교수는 “1960년대 ‘천리마운동’의 성과를 이념으로 만든 것이 주체사상”이라고 말한다. ‘천리마운동’은 생산력 증대를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가장 큰 걸림돌이 관료주의였는데, 이를 해결하려고 김일성이 현지에 내려가 한 달씩 머물며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초기 주체사상’에는 건강함이 있었다.
그러나 “실천에 교범이 되는 원칙 마련에 만족하지 않고, 종교와 다름없는 ‘순수 이데올로기’로 주체사상을 형성한 순간”부터(김근식 교수), “천리마운동의 성과를 귀납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교조적 원칙으로 내건 순간”부터(방인혁 교수), 주체사상은 체제 이데올로기가 됐다.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에 섞여든 것은 북한의 주체사상이 아니다. 현학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믿음, 계급 문제만큼 민족 문제도 중요하다는 믿음, 사회를 바꾸는 운동 역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믿음 등이 학생 김근식을 주사파 활동가로, 학자 방인혁을 주체사상 연구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이 주체사상을 뒤집어보는 이유가 됐다.
방 교수는 북한의 3대 권력 승계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를 남한에 적용할 때 주체사상이 중요한 참조가 될 수 있지만, 수령론 등 경전처럼 변질된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지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북한 주민들이 주체사상으로 무장됐다고 보는 이도 있는데, 국가가 붕괴하면 그 주민들은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얼마든지 집어던진다”고 말했다. 주체사상에 마음을 열었던 한국의 ‘예민한 소수’조차 회의하고 비관한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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