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한 기운을 덜어낸 바람은 가을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계절은 우리에게 서늘한 바람을 준 대신 길게 내리쬐던 햇살을 거둬갔다. 9월27일 오후 6시 무렵, 인터넷서점 알라딘과 , 웅진지식하우스가 함께 주최한 ‘ 저자와의 만남’이 열린 김대중도서관은 그래서 이른 저녁부터 총총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청년 시절에 읽었던 고전들을 다시 꺼내 읽고 쓴 독후감을 모은 책이다. 오래됐지만 앞으로도 계속 읽힐 “아름답고 위험하며 위대한” 책들 중 14권을 추려 감상과 생각을 썼다. 문장 사이에는 청춘의 유시민과 지금 50대가 된 현재의 유시민이 번갈아 가며 얼굴을 내민다. 어떤 문장에서는 피 끓는 청년이 울렁이고 어떤 맥락에서는 현실 정치에 뛰어든 유시민이 있다. 30년 세월이 흘러서도 피 끓는 그때와 같을 수 있겠느냐는 회한과 여전히 심장 뛰던 그 시절의 감정을 잊지 않고 붙들려는 근력이 오묘하게 뒤섞여 있다.
강연회에는 독자 120여 명이 참석했다. 대부분 ‘청춘’들이었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어야 할 이 세대는 왜 50대의 지나간 청춘을 궁금해하며 이 자리에 모였을까? 깊이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1시간 여의 강연을 통해 오고 간 질문과 대답으로 미뤄보자면 그들은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고 끈끈하게 살았던, 취업 스터디 대신 고전을 읽고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었던 ‘과거의 청춘’에 어떤 부러움과 로망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유시민 전 장관은 청춘의 유시민과 현재의 유시민으로 그들을 조금 다독이고 조금 위로하며 조금 다그치기도 했다.
강연회에 앞서 독자 3명과 함께 ‘독자 인터뷰’를 가졌다.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독자와 유시민 전 장관은 책에 실린 고전 14권을 두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고민을 건넸다. 피 끓는 청춘들은 자꾸만 ‘혁명’을 궁금해했고 전복을 꿈꿀 수 없느냐 물었다. 현재가 힘겹기 때문이리라. 이들의 질문과 유 전 장관의 대답을 정리해서 담는다. 질문은 무거운 것부터 시작해 조금씩 무게를 덜어내며 나아갔다.
한상희(20대·대학생):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 관련해서 쓴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을 보면, 의 여러 내용에 비판과 칭송을 하면서도 인간 역사의 과정을 계급과 계급 사이의 투쟁이라는 보는 점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는 듯했다.
유시민: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사회를 재조직하려는 세계의 노력은 실패했다.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거대한 이상주의 운동이었는데, 소련과 동유럽 등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국가가 들어섰다가 반세기 만에 소멸돼버렸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마르크스가 만든 역사 이론이 전적으로 오류였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지금까지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라는 말에 동의한다. 국가론과 관련해서 “국가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를 착취하려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국가가 지배 도구로 기능하는 것을 넘어 다른 좋은 도구로 쓰일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정지혜(28·간호사):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체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유시민: 쿠바 등 예외적인 국가가 있긴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힘들다고 본다. 그저 현실에서,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가치를 실질적인 상태로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두식(26·대학생): 헨리 조지의 을 읽고 쓴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인상 깊게 읽었다. 재화를 공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혹은 앞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유시민: 지구의 일부분을 어떻게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지지해줄 수 있는 철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역사적 과정 속에서 토지의 사유가 생겼다. 힘센 사람이 먼저 차지하면 그만인 방식이었다. 이것이 지속돼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사회를, 언론과 지식사회를 지배하게 됐다. 재화를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헨리 조지도 같은 주장을 한다. 토지를 임차하려는 경쟁 때문에 모든 기술 발전과 생산력 진보의 혜택이 토지 소유자의 손에 집중된다. 인간 생활의 중심지인 땅을 가진 사람이 모든 열매를 독식하고 노동자는 빈곤의 덫에 붙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역사의 시간 안에서 토지 소유제가 철폐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적이지만…. (이를 두고 그는 에서 “진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실현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 혁명을 꿈꿔도 되나요한상희: E. H. 카의 를 읽고 쓴 ‘역사의 진보를 믿어도 될까’에서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나.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민중에 의한 혁명 중 완전히 성공한 것은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 말이 관념적으로만 이해될 뿐 잘 와닿지가 않는다.
유시민: 민중에 의해 완전한 형태로 성공한 혁명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패한 혁명들도 좋은 ‘부작용’을 많이 남겨놓는다. 예컨대 불과 50여 년 사이에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졌다. 사고와 제도의 개혁, 사회를 재조직해내는 인간의 능력이 가속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게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자신을 이해하는 능력이 많이 확대된 것이다. 불과 100년 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축복을 지금은 받고 있지 않나.
정지혜: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는 혁명이란 필요 없는 것인가.
유시민: 폭력을 통한, 전복을 지향하는 혁명을 말하는 것이라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다. 혁명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혁명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드는데, 나는 다음 세 가지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현재 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층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어야 하며, 셋째 이를 바로잡기 위해 폭력적 혁명이 아닌 모든 수단이 먼저 행사돼야 한다는 것.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혁명 말고도 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전복적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지혜: 그렇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은? 이것은 혁명이 아니었나.
유시민: 정치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학적 수사로서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폭력마저 인정하고 포함하는 혁명이 아니지만, 그만큼 세상을 흔들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사건이기 때문에 그의 당선에 ‘혁명’이란 단어를 붙이지 않았을까.
한상희: 가 정치철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긴 세월에 걸쳐 고전으로 인정받아온 사회과학서, 역사서, 문학작품을 통해 (위정자로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흔히 위정자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렇다면 위정자에게 자신만의 철학·세계관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없을까.
유시민: 위정자에게 정치철학이나 세계관이 없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위정자 한 사람을 놓고 보면 뚜렷한 세계관이나 정치관을 가지고들 있다. 그것이 없어 보이는 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정자가 자신이 가진 정치적 기준이나 세계관을 국민에게 강요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를 강요할 경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전, 가만히 있어도 울림이 떠오르는 책”
김두식: 굉장히 많은 책을 읽었을 텐데, 책에 실린 고전의 선별 기준은 무엇인가.
유시민: 나에게 울림이 있었던 책, 그냥 가만히 있어도 떠오르는 책, 그 울림을 지금까지도 기억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 그 기준이다. 더불어 이번 책을 쓰는 작업에 주어진 제한된 시간 안에 확인을 하면서 울림을 환기할 수 있어야 했는데, 이 점도 기준이 됐다.
한상희: 여러 고전을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소개했다. 원전을 읽지 않고 이 책을 먼저 읽는 독자들은 책에 소개된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선입견을 가지는 식의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유시민: 그런 위험을 인정한다. 책을 쓰는 사람에게 책을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듯, 독자에게도 책을 마음대로 읽을 권리가 있다. 책을 쓴 사람의 시대적 환경과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 독자가 책이란 매체를 통해 만난다. 그러다 보니 원전을 쓴 필자와 독자가 완벽한 소통을 할 수 없을뿐더러 를 쓴 나와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완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한편 고전은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삶의 근본적 문제를 다룬 책.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문명이 시작한 이래로 바뀐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이 가치 있을까, 진짜 사랑이란 무엇일까, 정치란 뭐냐, 국가란 뭐냐, 누가 지도자가 되어야 하느냐 등의 문제. 그러니까 개인의 삶, 공동체 삶의 근본 문제는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 문제에 대한 고민과 자기가 발견한 답을 담은 책이 고전이다. 세월의 흐름, 사람들의 의식 변화를 다 견디고서도 무언가를 발견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 책이 고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보려는 사람이라면 고전에 손을 대게 된다. 내 책은 위험성은 있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한 다이제스트라고 생각한다. 물론 책에 제시한 작품들을 자기 것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원텍스트를 읽는 것이겠지만.
김두식: 책을 많이 쓰고, 쓰는 책도 잘 팔린다. 책을 쓰면서 무언가를 바라거나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나. 그리고 정치인의 저술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시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을 때 책을 쓴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것은 곧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이런저런 책을 쓰는 것 같다. 정치인이 책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정치인이 직접 미디어를 통해 국민과 소통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나도 직접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고 지식을 나누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책을 쓴다. 그리고 사실 나는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저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책을 쓰는 이유도 있다. 내 생은 내가 책임지기 위해서. (웃음)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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