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석의 강연은 독자가 딴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상대방의 정신을 쏙 빼놓는 달변이었던 것도,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딱 하고 싶은 말만 하니 힘주어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1시간30분 정도가 될 거라고 듣고 갔던 강연회는 20여 분 만에 끝났다.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게 영 갑갑하다는 게 그의 이유다.
강연의 요지이자 대부분인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주제어는 ‘웃음’이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하류 인생들이 끊임없이 자학·위악 개그를 하며 “별 사건도 없이 농담 따먹기”하는 이유는 “웃음이 현실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슬퍼서 더 웃는 이들의 웃음을 체념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고 폭력적인 해석이라고 말했다. 웃음을 포기나 체념으로 대체하지 말고 웃음 위에 다른 것을 더 얹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짧은 강연이 끝나고 출판사의 제안으로 만화 낭독회가 이어졌다. ‘경상도 남자’인 최규석은 아주 쑥스러워했지만 독자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또 읽는다. 한 컷 낭독이 끝날 때마다 자꾸 하나만 더 읽어달라고 말하는 독자 앞에서 그는 인물에 따라 목소리를 달리하며 성실하게 만화를 ‘낭독’했다.
최규석의 목소리에서 다시 지면으로 한 장면을 옮긴다. 사발면으로 끼니를 때우려던 주인공 원빈과 은수. 정수기 온수가 떨어져 그나마도 생라면으로 먹게 됐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반찬처럼 늘어놓은 대화다.
“한겨울에 보일러 기름 넣을 돈이 없는 거야. 끓인 물 페트병에 넣어서 끌어안고 자봤냐? 아침에 그 물로 샤워도 한다.” “한 달 동안 초코파이만 먹어봤어요?” “참치캔 헹군 물에 라면 스프 넣고 끓여 먹어봤냐.” “그거면 석 달은 먹죠” “40평 아파트에서 등교했다가 월세방으로 하교해봤어요? 인생이 자이로드롭입니다.” “너 엄청 잘살았구나? 난 모태 빈곤이야. 어디서 깝쳐?”
듣다 보면 소화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가난 자학 개그는 생라면으로 차린 그들만의 식탁을 가득 채운다. 이런 식의 대화 혹은 상황이 책 전체를 지배한다. 그런데 ‘찌질’해서 더 가련한 이들의 서사는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진 않는다. 그저 다음 장의 이야기를 재촉하는 힘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은 “독자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울분을 토하거나 위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슬픔과 웃음이 아리송하게 교차하며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강연이 끝난 뒤 애매한 이 슬픔에 대해 독자 3명과 함께 좀더 이야기를 나눠봤다.
김지호(20대·직장인): 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가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나.
최규석: 모두 불쌍하다. 누가 더 불쌍하고 덜 불쌍하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김지호: 강연회 때 낭독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서로 누가 더 가난하냐, 누가 더 힘드냐를 말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최규석:누가 더 못났냐, 로 경쟁하는, 아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언어 습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그러면서 불만을 해소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가난함이 자기들 세계에서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얼마나 힘겨운 일을 견뎌왔느냐에 대한. 가만히 있으면 힘드니까 자기 스스로를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그 상황을 견디고자 한다. 작품에 쓰인 “돈도 재능이다”라는 대사도 실제 아이들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이승훈(24·학생):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가늠이 잘 안 됐다.
최규석:인정한다. 내용을 보고 제목을 보면 이해할 수 있긴 한데. 아직 만화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니 학생들이 책상 위에 당당하게 놓아둘 수 있게 하려는 전략도 조금 숨어 있다. 이전 작품 제목도 아니었나. 누가 봐서 그 책을 만화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웃음)
이승훈: 제목과 작품 속 아이들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
최규석:이번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은 울기에 좀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슬픈지 모를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 이걸 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거다. 그런데 독자가 보기엔 애매한 상황이 아니다. 울어야 한다. 하지만 만화 속 아이들은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데 익숙하다.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른다. 그리면서 생각했다. 청소년들이 화를 낼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겠다고. 나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국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이 되려면 굳이 따로 학원에 다니지 않고서도 도전할 수 있다. 그런데 미술은? 전공하려면 거의 필수적으로 학원에 다녀야 한다. 대학에서 학원에 안 다니고도 창의적으로 그리는 학생을 뽑으려고 입시 전형을 새로 만드는 등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 학원은 대학보다 더 빨리 시험 전형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혼자서 그리는 아이들은 따라갈 수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 돈이 있어야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생긴다는 것,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평범한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그림을 전공하고 싶은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생각한다. 어릴 땐 나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난다.
끔찍한 이야기가 왜 파급력이 없을까
이비함(30·직장인): 책이 재미있다. 그런데 왜 재미있는지 설명하기엔 이상하게 좀 애매하다. ‘세상이란 이렇게 생긴 거야’ 하고 보여주기만 하고 이야기를 끝내기 때문일까. 과 같은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안은 없다.
최규석: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다음 작품에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이번 작품에서는 상황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잘 모른다. 자기 세대보다는 나아졌겠지, 하는 안도만 하고 있다. 내가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 많이 일어났다. 책에서 지현이가 학원 선생님이 만들어준 포트폴리오로 대학에 합격하는 것처럼 미대생들이 아르바이트로 학생들 포트폴리오를 대신 그려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차를 바꾸거나 등록금을 내기도 하고. 만화에서 종화가 입시가 끝난 뒤 외제차를 산 것처럼.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가 왜 파급력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 책은 그런 고민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비함: ‘기죽은 애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본인의 ‘기죽음’은 숨기고 있는 듯하다.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규석: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많이 없는 것 같다. 운이 좋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일까? (웃음)
김지호: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이런저런 곡절에서 기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신기하다.
최규석:나는 조금 느린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낙천적인 성격 덕분도 있겠지. 압박감도 덜 받는 편이고.
이승훈: 자신의 만화가 다른 장르로 옮겨가 새로 쓰이는 것에 대한 욕심은 없는가.
최규석:내 작품이 다른 장르로 번역되기는 좀 힘들 것 같다. 이유는 대부분의 작품이 분량이 적고, 내용으로 봐도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옮기는 거니까. 굳이 영화화하자면 독립영화가 가장 잘 맞지 않을까. 그런데 대부분의 독립영화 감독은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니 내 작품은 만화로서만 숨 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의 윤성호 감독이 내 작품 중 하나를 독립 장편영화로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긴 했다.
이비함: 만화로 볼 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내용이 우울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가라앉는다. (웃음)
김지호: 맞다. 왜 자꾸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힘든 사람만 그리는지.
살 만한 세상, 익숙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최규석: 어릴 때부터 주변에 힘든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이랑 친했다는 것이 한 이유다. 또 하나의 이유는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선량한 시민에게서 세금을 걷어가고, 땅 장사를 부르는 악독한 정책을 만들어 양극화를 심화하는 것이 자꾸만 눈에 비치니까.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 산다고 말은 하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고민은 하면서 살아가나.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정의, 민주주의 등의 가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그 가치들을 제대로 알고 실현한다면 좀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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