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해안을 따라 빙 둘러 걸을 수 있는 좁은 길, 제주에서는 그곳을 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올레’라 한다. 올레는 거리길에서 대문까지,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도말이다. 좁고 작아 눈에 띄지 않는 길들을 끊어진 실을 연결해 기다랗게 이어내듯 꼬불꼬불 연결한 이가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이다. 그는 (북하우스 펴냄)으로 제주의 길에 대해 말한다. 에는 제주올레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올레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어낸 길이 길어지면서 이야기 개수도 늘어났을 터다. 최근에 낸 두 번째 책에서 그는 좀더 구체화된 ‘올레 스피릿(정신)’에 대해 말한다. 올레를 어떻게 즐겨야 할지, ‘올레스러움’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올레가 제주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는지 등을 말한다.
과 알라딘, 출판사 북하우스가 함께 주최한 의 저자 강연회가 지난 10월18일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열렸다. 강연회가 열리기 전 제주에 남다른 애정을 품은 두 명의 독자와 함께 서명숙 이사장을 먼저 만나봤다.
죽은 길·숨은 길을 살려내는 손길2007년 처음 제주 올레길을 걸은 신수진(40·회사원)씨는 이제는 석 달에 한 번씩은 제주도에 가야 속이 편하다. 그를 두고 서 이사장은 ‘올레 얼리어답터’라고 말했다. 문지영(43)씨는 아직 “올레길은 맛만 본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주도를 좋아해 이주를 고민하고 있을 정도다. 서 이사장과 두 명의 독자는 제주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만으로도 그들의 ‘스피릿’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세 사람의 눈이 같은 빛으로 반짝거렸다.
제주가 고향임에도 서 이사장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제주가 아닌 뭍에서 보냈다. 대학 시절부터 20여 년간 언론사 생활을 할 때까지 그는 도시의 빠른 논리에 따라 머리와 몸을 움직이는 이였다. 기자 생활이 체질이라 생각하며 부지런히 현장을 누볐다. 편집장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불같이 성을 내기도 다반사. 그러나 열정은 때때로 혹사가 됐다. 육체적·정신적 체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운동에 도전했다. 헬스·요가·단학원 등에 차례차례 등록하지만 결석을 반복하며 유령회원으로 떠돌았다. 운동은 체질이 아닌 모양이라고 포기할 무렵 가장 쉬운 걷기에 도전해본다. 혼자 ‘꼬닥꼬닥’(제주말로 ‘느릿느릿하다’는 뜻) 걸어보니 이보다 쉽고 좋은 운동이 어디 있나 싶었단다. 그리고 아무런 대책 없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2006년 9월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몸과 마음에 휴식을 준 다음 돌아와서는 무얼 해야지 하는 식의 흔한 다짐도 없었다. 좋은 잡지, 훌륭한 매체에 대한 욕심도 그 무렵엔 훌훌 털어버렸다. 그저 스스로가 편안해지는 시간에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지는 800㎞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할 일을 만들어버렸다. 좋은 길 위에서 누렸던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길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와 생각을 나누며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서 전세계 도보여행자들이 사랑할 만한 트레킹 루트를 만들어보자고 약속했다.
귀국 뒤 고향 제주에 간 그는 제주도의 숨은 길들을 찾기 시작했다. 탐사는 발견으로 이어지고 발견은 길을 잇는 행위로 이어졌다. 자동차가 접근할 수 없는 작은 길은 대신 사람이 걷게 하고, 아무도 찾지 않아 죽은 길은 살아 있는 다른 길과 연결해 생명을 불어넣었다. 느리게 걷는 길, 제주의 아름다운 땅과 그에 맞닿은 바다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 그렇게 꼬닥꼬닥 바닷가를 따라 둥글게 이어졌다.
‘길 만드는 이’ 서 이사장은 이야기 또한 꼬닥꼬닥 이어내는 힘이 있었다. 제주올레가 어떻게 출발했는지부터 시작해 이야기는 산자락처럼 넓게 펼쳐졌다. 아련한 추억은 때때로 고단한 기억이기도 했고 다시 초심을 다잡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길에서 느낀 감정들은 제주를 사랑하는 두 명의 독자와 공유했다.
제주올레는 길에서 얻은 행복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개인의 작은 소망에서 비롯됐다. 제주를 넘어 다른 땅에서 여러 아류가 생길 정도로 선풍을 일으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사단법인 제주올레로 이름이 많이 알려지고 스태프도 생겼지만, 처음에는 서 이사장 혼자 탐사대원이자 사무직원으로 모든 역할을 해야 했다. 사무실은 집이었다. “그때는 굉장히 많은 걸 했다. 많은 것이라기보다는 닥치는 대로 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웃음)
그러다 자원봉사자가 들어오고 직원도 생겼다. 비정형적으로 하던 일들을 분업화하고, 더듬더듬 혼자 하던 탐사는 탐사대가 도맡아 한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올레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였지만 여전히 살림은 박하다. 뜻과 다르게 올레를 관광지로 취급하면서 이런저런 불만과 요구사항이 생기고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서 이사장은 어느새 다시, 잡지 데스킹을 보듯 탐사대가 찾아놓은 길을 확인만 하는 관리자가 돼 있더란다. 의무감은 커지고 성취감은 줄었다.
올레에 관심이 모이면서 올레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겠다는 기업들의 유혹도 있었을 터다. 이에 대해 문지영씨가 묻자 그는 “처음 출발 지점에서 이탈하거나 어긋난 적은 없다. 공익적인 일, 사람들의 행복권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사무국 전체가 지원을 받는 게 어쩌면 마땅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뭔가를 받는다는 건 간섭받거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시작한 일인 만큼 재정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제주올레는 후원 기업의 도움과 분기별 살림살이 내역을 홈페이지에 일일이 공개한다.
좋은 길을 만드는 조건에 대한 질문에는 ‘노력’과 ‘시간’이라고 답한다. “길을 만드는 데는 돈보다 사람들의 땀방울과 시간이 더 많이 요구된다. 돈을 들여 공사를 잘한다고 해서 예쁘고 좋은 길이 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예쁜 길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걷는 길이 많이 사라져 길을 찾아내기도 어렵고, 그런 길을 찾아놓으면 사유지라서 주인을 설득하기도 힘들다. 이렇게, 사람이 하는 노력의 결실이 좋은 길”이라고 한다.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은 특종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종은 몇 달 뒤면 뒤집힐 수도 있지만 길은 변하는 게 아니니 더 매력적이다. “끊어진 길을 이어주고, 가시덤불로 막힌 길은 좀 끊어 뚫어주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고, 난구간인 곳은 조금씩 손으로 공사를 해주는” 과정은 이제 기자가 아닌 ‘길을 내는 이’인 그에게 특종보다도 소중하다.
제주올레는 11월9일부터 13일까지 닷새 동안 제주올레 1·2·3·4·5코스에서 트레킹 페스티벌을 연다. ‘2010 제주올레 걷기 축제’다. 총 92km의 올레를 하루에 한 코스씩 나눠 걷는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잔뜩 모아 실컷 걷고 축제에 앞서 7~9일에는 ‘2010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를 열어 세계 유명 트레일의 현황과 경험을 공유하는 장을 마련한다. 그는 “우리나라는 어느새 고요한 해 뜨는 나라에서 24시간 잠들지 않는 나라가 됐다. 소음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이 한시름 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차가 다니지 않는 흙길을 걷다 보면 소음 속에는 평화가 없다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라며 초대의 말을 전했다.
앞으로 그의 목표는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올레를 가꿔가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길을 내줬으니 그 길 또한 마을 사람들의 것, 따라서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가꿔가야 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11월에 여는 축제가 그 시작일지 모르겠다. 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제주의 싱싱한 먹을거리와 다채로운 음식을 준비했다.
다른 목표는 해안선을 따라 제주를 한 바퀴 도는 올레길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제 4분의 3 정도까지 길을 이었다. 길의 탐색과 연결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서 이사장은 제주도를 여행하는 이들이 특정 관광지에만 머물지 않고 제주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길 바란다. 그래서 흩어진 길이 아닌 이어진 길인 올레는 한시적인 여행이 아닌 지속적인 여행을 부른다. 코스를 다 밟아보지 못한 이들은 다음 코스가 궁금해 혹은 그곳에서 맛본 음식, 만난 사람들이 그리워 제주를 또 찾을 수 있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맛본 정겨운 국수 한 그릇은 대한민국 곳곳에 깃대를 꽂고 성업하는 프랜차이즈의 정돈된 음식보다 힘이 셀 수 있다는 것이다.
서 이사장은 “길 하나가 마을을, 사람들을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제주도의 작은 마을 사람들은 개발을 기다리며 살았다. 관광은 개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 이가 많았다. 케이블카, 영리병원, 카지노 같은 게 들어서야 지역이 발전한다고 보았다. ‘보전적 에코 관광’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역 사이에 개발 유치 경쟁이 벌어지고 너무나 많은 공사가 이뤄지는 것을 보고 서 이사장은 악순환의 고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낸 길이기도 하다. 서 이사장은 100m의 길을 내면서도 풀과 나무에게 “고맙다,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발 논리에 그런 감정의 여지는 없다.
놀멍 쉬멍 걸으멍‘놀멍 쉬멍’ 사람들이 걸으며 그 중간에 만나는 작은 마을에 들러 음식도 먹고 쉬기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간다. 육지의 이야기를 섬사람들에게 전하고 섬사람들은 작은 마을의 소소한 정을 타지인에게 묻혀준다. 그래서 제주를 찾는 이들은 자꾸만 올레를 찾는다. 자연에서 나는 소리 말고는 귀를 자극하는 것이 없으며 북적이지 않는 그 길 위에서 위안을 얻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제주의 마을 사람들은 이제 개발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마을이 올레길에 맞닿길 바란다. 땅을 파헤치지 않고도 마을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길, 올레는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새 생명을 불어넣을 길을 찾아 꼬닥꼬닥 이어지고 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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