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자 흘러간 옛 노래가 다시 흘러나온다. 정치권과 정부에서 “경제활성화를 위해 기업 총수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투옥돼 있거나 집행유예 상태인 기업인들의 가석방·특별사면을 주장할 때 으레 나오던 논리가 반복되는 중이다.
군불은 정치권이 때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014년 12월24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가 이렇게 안 좋은 상황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일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기업인 가석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역시 이틀 뒤인 12월26일 “현실적 부분을 고려해서 매사 신중한 과정에서 무리 없이 해야 한다”며 “동의를 받는다면 어떠한 결정이든 간에 후유증 없고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의 일부 의원도 거드는 모양새다. 아예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기업인을 우대하는 것도 나쁘지만 불이익을 주는 것도 안 된다”며 “일반 범죄인들은 일정 기간 복역하면 다 가석방해준다”며 기업인 역차별 문제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경제활성화, 총수 사면의 오래된 논리
이미 정부 쪽에서는 가석방의 필요성을 청와대에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동안 기자간담회, 토론회 등에서 침체 국면인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인 가석방과 사면이 필요하다고 줄곧 강조해왔다. 경제단체들도 이같은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물론, 불과 1년 전 “기업(의 죄)과 기업인(의 죄)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던 대한상공회의소도 같은 대열에 서고 있다.
이들이 얘기하는 가석방 대상 기업인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등이다. 최 회장은 2013년 1월 계열사 자금 횡령 혐의로 법정 구속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1년11개월째 복역 중이며, 최 부회장은 2013년 9월 2심에서 3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밖에 기업어음 사기 발행 혐의로 구속된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도 대상이다. 이들은 가석방 대상 충족 요건인 형기의 3분의 1 이상을 살았다. 반면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등은 수감 기간이 짧은데다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사면 대상에는 오를 수 있지만 가석방은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항소심을 진행 중인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등도 간접적으로 영향받을 수 있다.
애초 이들에게 내려진 형량은 과거와는 달랐다. 수감생활을 하지 않는 이른바 ‘오너 형량’인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공식이 깨진 것이다. 최 회장은 징역 4년, 최 부회장은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재현 회장 역시 비록 2심에서 징역 3년으로 경감됐지만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재판에 큰 기대를 걸기보다 가석방이나 특별사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최근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불거진 재벌에 대한 비판 여론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한 10대 그룹 관계자는 “우리도 과거 총수 일가의 잘못으로 재벌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켜 크게 할 말은 없다”면서도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잘못으로 재벌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가석방이나 특별사면을 얘기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는 재벌 총수 일가가 범법행위로 형을 살고 있는 상황에서 혜택을 받기는 어려운 분위기라는 것이다.
“풀려났다고 투자 늘린 경우 없어”그럼에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가석방 여론에 기대를 거는 눈치다. 가석방 대상 그룹의 한 관계자는 “가석방이나 특별사면은 그때 상황이 모두 맞아야 가능한 것이라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최근 가석방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 관계자는 “가석방이 이뤄지고 풀려나온 총수가 경제 살리기에 나선다면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며 “이것이 가석방 대상이 되지 않은 다른 그룹 총수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기업은 2015년 설날, 박근혜 대통령 취임기념일 또는 3·1절에 맞춰 총수가 풀려나길 내심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가석방 필요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기업인들이 풀려난다고 해서 과연 투자가 늘고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과거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으로 나온 기업인들이 투자를 늘린 경우도 없다”며 “설사 기업이 투자 기회가 있으면 총수가 없더라도 늘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총수가 풀려났다고 투자를 한다면 그것은 투자의 합리성을 어겨 주주나 소비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어쨌든 공은 청와대로 넘어간 상황이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2014년 12월26일 경제인 가석방과 관련한 물음에 “법무부 장관의 고유 권한”이라며 선을 그었다. 사면은 대통령 권한이지만, 가석방은 법무부 장관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언뜻 법무부에 공을 넘기는 듯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법무부가 가석방을 하더라도 용인하겠다는 눈치다. 그동안 기업인 사면이나 가석방과 관련해서 청와대의 의중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2009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원포인트 사면’을 단행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세 번째 도전에 나서는 평창이 동계올림픽을 반드시 유치하기 위해서는 이 전 회장의 IOC 위원으로서의 활동이 꼭 필요하다는 체육계 전반, 강원도민, 경제계의 강력한 청원이 있어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가석방 대상에 올랐다가 제외된 경우도 청와대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해 노무현 정부 관련 기업인이 가석방 대상에 오른 적이 있다”며 “청와대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파악해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정치권과 경제계가 여론 조성을 위해 군불을 지펴도, 최종 결정은 청와대에 달린 셈이다.
재벌 특혜 준다는 비판 껴안을까하지만 이른바 ‘정윤회 문건 유출’ 파문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후반으로 취임 이후 최저를 기록한 처지에서 재벌에 특혜를 줬다는 비판이 일 수 있어 청와대로서도 선뜻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긴 힘든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사면권을 남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돈 있고 힘있으면 책임을 안 져도 되는 일이 만연한 풍토에서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해도 와닿지 않는다”며 사면권 사용에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낸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강조한 ‘경제민주화’를 찾기 힘든 현재 상황에서 재벌 총수의 가석방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이 쏠린다.
이정훈 경제부 기자 ljh9242@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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