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채워졌다. 여전히 “비통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번에는 광장을 비우자”(스포츠평론가 정윤수의 6월12일치 기고)며 월드컵을 보이콧하는 이도 있다. 몇몇은 ‘벌써 잊으셨나요’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대~한민국’이 울려퍼지는 광장 한켠에 섰다. 그럼에도 축제는 계속된다. 애타게 축제 분위기를 띄우려는 세력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진짜 월드컵을 즐기고 싶은 순수 팬심. 두 번째는 세월호와 문창극 참사를 빨리 월드컵으로 덮어버리고 싶은 ‘친박 팬심’. 마지막은 가라앉은 소비심리를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끌어올리고 싶은 ‘경제 대표팀’.
순수 팬심, 친박 팬심, 경제팀 속내한국 대 러시아전이 열린 지난 6월18일 새벽. 서울 광화문광장엔 ‘붉은 악마’의 빨간 티셔츠가 넘실댔고, 강남구 코엑스 앞에선 가수 싸이(PSY)와 함께 을 떼창했다. ‘경제 대표팀’ 선수인 기업들도 직접 나섰다. 강남 응원전 무대를 마련한 건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후원사인 현대자동차였다. CJ제일제당과 맥도널드, 코카콜라 등은 간편한 아침 식사와 음료수를 광장의 손님들에게 공짜로 대접했다. 효성·홈플러스·이랜드 같은 기업에선 임직원들을 새벽부터 불러모아 단체응원전을 펼쳤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 서울 광화문에 모인 응원 인파는 1만6천여 명에 불과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때 광화문과 영동대로에 각각 10만 명씩 모였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열기는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세월호의 영향이 가장 크다. 기업들은 적극적인 월드컵 마케팅에 나서길 주저했다. 월드컵 광고조차 “내전을 멈추게 해달라”는 축구선수의 실제 모습(현대차 ‘코트디부아르’편)을 담을 정도로 경건함을 추구했다.
아침 7시에 경기가 열린 까닭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월드컵 특수의 희비도 엇갈렸다. 올빼미족을 겨냥한 ‘치맥’(치킨과 맥주)이 이번엔 영 힘을 못 썼다. 제너시스BBQ의 지난 6월14~17일 매출은 월드컵 개막 1주 전보다 10%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 회사 관계자는 “2010년 월드컵 때는 밤 10시 이후에 주로 경기가 열려서 50~100%까지 매출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반면 응원전이 열린 광장 주변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은 반짝 특수를 누렸다. GS25는 광화문과 영동대로 인근 9개 점포의 6월18일 오전 0~10시 매출이 지난주 같은 시간대보다 8배 늘었고, CU도 광화문 인근 5개 점포의 매출이 전주보다 평균 12.4배 뛰었다. 또 사무실에서 러시아전을 함께 보고 난 직장인들이 조찬으로 햄버거를 대량 주문한 덕에, 도심 맥도널드 매장의 배달 주문이 오전 6~8시에 5배 남짓 늘었다고 한다.
포털업체들의 동영상 생중계 서비스도 ‘대박’이 났다. 출근 시간과 경기 시간이 겹치는 바람에, 텔레비전보다 ‘손안의 화면’으로 경기를 시청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네이버는 201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 생중계를 했는데, 러시아전 동시접속자 수가 이번에는 약 250만 명을 기록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동시접속자 수가 20만 명에 불과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류현진 선수 경기가 70만 명 정도로 동시접속자 수 최고였는데, 250만 명은 사상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동영상에 붙는 광고가 사전계약 방식이라, 세월호 때문에 광고가 많이 안 붙어서 이익이 커진 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다음 역시 한꺼번에 이용자가 몰리는 바람에 전반전이 끝난 뒤 잠시 접속 장애를 일으키긴 했지만, 동시접속자 수가 약 50만 명이었다.
경제성장 짐까지 짊어진 월드컵 대표팀러시아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자, 유통업계는 내심 한국팀의 예상 밖 선전을 기대하는 눈치다. 이마트는 러시아전에서 한국팀이 승리하면 진행할 예정이던 ‘월드컵 할인행사’를 무승부인데도 그대로 진행했다. 6월18일 하루 동안 한우 등심 등 250여 가지 품목의 가격을 30~50% 깎아주는 행사다. 이마트 관계자는 “보통 월드컵 기간에는 맥주나 치킨, 안주류 등 관련 제품 매출이 2배가량 오른다. 이번엔 가나와의 평가전 결과가 안 좋아서 기대 수준이 낮아졌는데, 러시아전이 비기면서 분위기가 살아날 조짐이 보인다”고 밝혔다.
그런데 진짜 월드컵 특수가 한국 경제를 벌떡 일어서게 할까? 2010년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팀이 월드컵 16강전에 진출하면 4900억원의 민간소비지출이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월드컵 16강 진출의 경제적 효과’)하는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2009년 하루 평균 민간소비지출액이 1조5800억원인데, 이 중에서 식료품과 주류, 음식·숙박, 통신업 등 응원과 관련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1%라고 가정해서 추산해낸 결과다.
‘경제 대표팀’의 감독이라 할 수 있는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월16일 이임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야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경제 회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는 소회를 밝히는 와중에 나온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 경제는 초여름에 한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다. 지난 1분기 수출은 1.5% 성장했지만, 민간소비는 고작 0.2% 성장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올해 4%대 성장도 불가능하다. 애가 마른 쪽은 기업보다 정부다.
하지만 월드컵이 결정적인 골을 터뜨려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벨기에와 알제리전 경기 시간 역시 각각 새벽 4시와 5시다. 술집에 모여앉아 ‘치맥’을 즐기며 경기를 관람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다. 박옥희 IBK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세월호 사고로 인해 내수가 부진한 가운데, 한국 경기 시간이 주중 새벽이라 월드컵이 내수 확대에 크게 기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한다.
경기회복 기대감의 결정적 부재게다가 월드컵 특수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실력도 없는 팀이 어쩌다 운 좋게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민간소비와 기업의 투자 등이 살아나야 한다. 국민이 닫힌 지갑을 열려면 경기가 회복될 것이란 기대감이 있어야 하는데, 결정적으로 그게 없다. 세계경제 전망도 밝지 않다. 미국은 최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0.7%포인트 하향 조정했고, 중국 역시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밑도는 상황이다. 새롭게 ‘경제 대표팀’을 이끌 최경환 신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가 택하려는 전략도 미덥지 못하다. 최 후보자는 “한겨울에 한여름 옷을 입고 있다”며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부동산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가계소득을 늘려 내수를 진작시키는 방식으로 경제의 기초체력을 키우기보다는, 경기부양을 서두르겠다는 것이다. 자칫 가계부채를 늘리는 ‘자살골’이 될 수도 있다. 자꾸 월드컵이 경제를 살릴 묘약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 떠는 게 불편한 이유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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