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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제, 당황하셨쎄요?

대기업 공채에서 늘고 있는 역사 비중… 역사 지식·역사관 평가하기

위해서라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로 지원자 골라내려는 속내도 있어
등록 2014-05-09 11:53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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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역사를 묻고 있다.

SK그룹은 4월27일 대졸 신입사원을 뽑는 종합역량검사에서 지원자들에게 ‘세종대왕의 업적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SK는 올해 처음으로 공채시험에서 역사 문제 10문항을 포함시켰다. 이보다 앞서 치러진 삼성그룹의 직무적성검사(SSAT)에선 독립문을 보여주며 어느 단체와 관련 있는지 선택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삼성은 상식 과목에서 한두 문제에 불과했던 역사 문제가 올해 14문항까지 늘었다고 했다. 문제 하나하나에 민감한 취업준비생에겐 파격적인 변화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아닌 것은?

현대자동차그룹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현대차는 2013년 하반기 공채부터 역사에세이를 시험 과목에 넣었다. 단답식 문항이 아닌 논술형 평가를 도입한 것이다. 올해는 이를 더 발전시켰다. 지난해 역사에세이는 2문항을 제시한 뒤 30분 동안 각각 1천 자 내외로 쓰게 했지만, 올해는 3문항을 주고 그 가운데 2개를 골라 각각 700자 내외로 쓰게 했다. 분량은 줄었지만 시간(45분)을 이전보다 15분 늘려 지원자들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평가가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올해 4월 치러진 국내 4대 그룹의 상반기 공채에서 LG그룹을 뺀 3곳이 모두 역사 문제를 강화했다. LG 공채에선 인·적성검사에 상식 과목이 없다. 4대 그룹 외 GS그룹은 GS칼텍스 등 일부 계열사에서만 보던 한국사 시험을 올해 전 계열사 공채 과목으로 확대했다.

부쩍 늘어난 역사 문제. 국내 대기업은 왜 입사 지원자에게 역사를 묻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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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설명은 이렇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올 초 서류전형과 총장추천제 등을 도입할 때 SSAT도 역사 이해를 높이는 쪽으로 강화하겠다고 했다. 역사를 통해 미래 비전을 고민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그동안 소홀하지 않았나 했다”고 설명했다. 삼성 쪽은 또 역사 문항이 늘어나면 대학 등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고 했다. 현대차의 설명도 비슷하다. 현대차 홍보실 관계자는 “정몽구 회장이 자동차를 파는 건 그 나라의 문화를 같이 파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내 역사교육이 강화됐다. 채용 때도 지원자에게 일정 수준의 역사관을 요구하기로 했다”고 했다.

실제 현대차 역사에세이의 문제 수준은 높은 편이다. “세종대왕이 과거시험에 출제했던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구별법이라는 문제를 21세기 자신이 받는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석굴암, 불국사, 가야고분 등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 유산 두 개를 골라 설명하시오.” “이순신의 거북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정약용의 거중기 등 역사 속 인물의 발명품 중 자신이 생각하는 ‘공학도의 자질’과 연관 있는 발명품을 선택한 뒤 그 이유를 쓰시오.”

하일식 한국역사연구회장(연세대 사학과 교수)은 역사에세이 문항에 대해 “수준 높은 사고와 사회적(기업적) 가치관을 묻는 내용이라서 주목할 만하다. 채점하기엔 좀 까다롭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현대차가 (다른 기업보다) 앞서나간다는 느낌이 든다”고 평했다.

기업의 속내는 사실 표면적인 설명보다 복잡하다. 구직자의 역사관이 갑자기 중요해졌다기보다 “역사 문항을 늘려 지원자들이 미리 준비하지 못한 시험을 보게 하려는 이유가 크다”고 또 다른 삼성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말한다. 변별력을 강화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스펙 초월 채용의 풍선 효과”

최근 대기업 취업 경향을 보면, 지원자 대부분 기업별 인·적성검사 대비 문제집을 미리 풀어보고 공채시험을 본다. 마치 대학 수학능력시험처럼 기출문제를 샅샅이 분석한다. 시중엔 SSAT 등 기업 인·적성검사 기출문제집이 나와 있고 인터넷 강의 등 사교육 시장도 커졌다. 기업은 자신이 뽑는 지원자가 진짜 능력이 있어서 좋은 점수를 받는지, 아니면 시험 유형을 ‘달달’ 외워와 좋은 점수를 받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SSAT를 보고 난 뒤 인터넷 취업카페 등에 올린 지원자들의 후기를 보면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문제집으로 공부했는데 갑자기 유형이 바뀌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문제 느낌이 기존 SSAT랑 완전히 달랐다.” 올해 SSAT를 본 엄아무개씨는 “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문제도 나왔는데, 세계사는 범위가 방대하니까 어느 정도 지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현대차의 역사에세이도 변별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올해 현대차 공채에 응시한 한 지원자는 인터넷 취업카페에 “역사에세이 외에는 기존에 볼 수 있었던 유형들이었다”고 평했다.

인사 채용 전문가는 이를 두고 “정부가 추진한 이른바 스펙 초월 채용의 풍선 효과”라고 진단한다. 이병철 시너지컨설팅 대표컨설턴트는 “채용할 때 학교, 전공, 영어 성적 등을 보지 말라고 하니 지원자를 골라내는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각 기업별로 필기시험이 부활하는 추세다. 전과 같이 필기시험을 볼 순 없으니 역사 등 장치를 강화한 것”이라고 했다.

삼성은 특히 전형 과정이 간소화되면서 입사 지원자가 폭증한 상태다. 삼성은 2012년 하반기 공채부터 지원서에 자기소개를 쓰지 않도록 했다. 이름·주소·전화번호·출신학교·학점 등은 써넣지만 자기소개서를 평가하는 서류전형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어학연수 여부와 자격증 등 이른바 ‘스펙’보다 SSAT 점수가 높을수록 채용에 유리하다고 알려진 것도 취업 희망자를 더 몰리게 만들었다. SSAT 응시자는 지난해 상반기 8만 명에서 올 상반기엔 1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 채용’을 내세우다 시험관리 비용 증가와 과다한 사회적 관심 등 부작용에 직면한 셈이다. 총장추천제를 도입하다 ‘대학을 서열화한다’는 논란에 휩싸여 취소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기업이 대학생 등 취업준비생에게 역사 공부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하일식 교수는 “전반적으로 사회가 보수화되는 추세 속에서 기업이 (보수화에) 앞장을 서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기업 면접장에서 취직하려는 사람에게 대뜸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이다”라고 했다. 현재 진행 중인 대기업 공채의 역사 문항은 문제가 없으나, 이런 흐름이 확대되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친기업적·보수적 역사관 확대 우려

실제 경제단체들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중·고등학교 교과서 등에 친기업적인 색깔을 넣으려는 시도를 꾸준히 한 바 있다. 2011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교과서에서 기업 및 기업인과 관련한 공정한 서술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교육부 등에 전달했다. 당시 교과서 6종 모두 전태일 분신 사건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병철 삼성 회장이나 정주영 현대 회장을 소개한 교과서는 1종에 불과하다고 예를 들기도 했다.

2013년엔 박근혜 대통령이 “국사를 편파적으로 가르치면 학생들에게 해를 줄 수 있다”고 말하자, 정부가 역사교육 강화를 위해 2017년 수능부터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당시 정부 입맛에 맞는 역사교육만 강화한다는 비판도 많았다. 기업의 역사 문항 강화를 계속 주시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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