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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 위에 MB, 교묘한 관치

강정원 회장 내정자 사퇴는 KT·포스코·한국거래소 사태의 ‘데자뷔’…
검찰·금감원 동원해 정부 의사 관철
등록 2010-01-14 15:50 수정 2020-05-03 04:25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1월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0년 범금융기관 신년인사에 참석해 이승우 예금보험공사 사장과 귀엣말을 나누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1월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0년 범금융기관 신년인사에 참석해 이승우 예금보험공사 사장과 귀엣말을 나누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현 정부는 민영화한 기업을 여전히 정부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2000년대인데, 여전히 1970년대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금융회사의 한 임원은 강정원 KB지주 회장 내정자 사퇴 파문을 본 뒤 이렇게 툭 던졌다.

사실 그랬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영화한 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일이 툭툭 터졌다. 그때마다 ‘정권 실세 개입설’이니 ‘관치 논란’이 불거졌다. KB지주 회장 사퇴 파문 역시, 처음 보는 장면이 익숙한 듯 보이는 ‘데자뷔’의 느낌이다.

선출된 사장이 마음에 안 들자 공기업 지정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2007년 말 남중수 KT 사장은 연임했다. 그해 11월 사장후보추천위원회가 꾸려졌고 12월 초 사추위에서 남 사장을 단독 후보로 추대했다. 당시 KT 안팎에선 대선 뒤 복잡하게 닥칠 정치 외풍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연임 절차를 서두른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고, KT의 이런 행보를 현 정권이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남 사장은 2008년 11월 구속됐고 곧바로 사퇴했다. 검찰이 공기업 비리를 수사한다며 난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불똥은 포스코로 떨어졌다. 지난해 1월 포스코 이사회에서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전격 사퇴를 선언했다. 검찰이 이 회장 집을 압수수색한다는 소문이 나돈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 뒤 우제창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박영준 국무조정실 국무차장이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정환 전 한국거래소 사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바로 뒤인 2008년 3월 공모 절차를 통해 선출됐다. 하지만 선출 과정에서 정권 쪽과의 친분 등으로 유력한 후보로 점쳐졌던 한 금융지주 회장이 후보 3배수에도 들지 못하고 탈락하자 ‘괘씸죄’설이 흘러나왔다. 이어 검찰의 압수수색과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됐다. 비리가 나오지 않자 정부는 지난해 1월 한국거래소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해버렸다. 공기업 민영화를 앞세운 정부가 거꾸로 사기업을 공기업화한 셈이다. 결국 이 전 이사장은 1년6개월을 버티다 지난해 10월 물러났다. 그는 고별사에서 “금융당국의 집요한 협박과 주변 압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2009년 마지막 날에도 이같은 관치의 망령이 금융가를 휩쓸었다.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인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지난해 12월31일 긴급 이사회에서 회장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곧바로 금융당국의 관치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12월16~23일 국민은행에 대해 사전검사를 벌였다. 통상적인 사전검사는 조사인력이 3~4명 수준이지만 국민은행에 투입된 인력은 그 3배가 넘었다. 종합검사를 앞둔 사전검사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조사 기간도 평소의 배인 일주일에 이르렀다. 관행과 달리 KB금융과 국민은행 주요 부서장의 컴퓨터도 10대 이상 압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 행장 운전사까지 조사했다.

정부 동의 없이 맡으려 한 ‘괘씸죄’

또 강 행장이 내정자가 되도록 추천한 사외이사의 비리 혐의 관련 정보도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금융계 안팎에선 보복성 검사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직접 강 행장에게 전화를 걸의 사퇴를 종용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런 관치 의혹이 불거지자 금융감독원은 1월4일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금감원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9명을 투입해 6일 동안 사전검사를 진행했다”면서 “이는 강 행장의 사퇴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감독당국은 운전기사를 면담 조사한 것에 대해서는 “국민은행이 다른 은행과 달리 행장 전용 차량 2대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이 중 1대는 사적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어 경비 집행 실태 등을 조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 위원장도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강 행장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다고 밝혔다.

강 행장이 정부에 미운털이 박힌 것은 정부 동의 없이 주인 없는 KB금융 CEO를 맡으려 했다는 괘씸죄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3일 KB금융 회장 면접을 앞두고 김병기 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사장급)과 이철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사장은 “회장 선출이 불공정하다”며 후보에서 전격 사퇴했다. 결국 강 행장은 단독으로 면접에 참여했고 차기 회장 후보에 추천됐다.

김병기 전 위원은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 자문위원 출신으로, 박원순 변호사 등 2명의 포스코 사외이사가 사퇴한 뒤 곧바로 그 빈자리를 채웠다. 김 전 위원은 2004년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장에서 퇴직하면서 바로 삼성에 취업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철휘 사장은 김백준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매제다. 이 사장은 노무현 정부 말에 캠코 사장에 임명됐다. 대부분의 정부 산하단체장이 정권이 바뀌면서 강제로 옷을 벗었지만, 이 사장은 살아남았다. 지난해 11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과 절친한 재무관료 출신 김병기씨와 청와대 김백준 총무비서관의 매제인 이철휘 캠코 사장이 KB지주 회장으로 내정됐다는 설이 돌고 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사퇴하자마자, 금융당국의 개입이 본격화됐다. 두 후보와 강 행장 모두 사퇴시켜 회장을 3월 정기 주총에서 선임하겠다는 것이 정부 고위층과 금융당국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 행장이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금융권에선 KB금융 회장에 누가 선임될지가 관심사다. 강 행장을 낙마시킨 만큼 친정권 인사들이나 관료 출신이 후보에 나설 가능성도 점쳐진다. 강 행장과 경합했던 김병기 전 위원과 이철휘 사장 이름이 다시 나온다.

금융권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는 3월 회장의 임기가 끝나는 라응찬 신한금융 회장의 연임 여부다. 라 회장은 2001년 이후 8년째 신한금융그룹을 이끌고 있다. 조흥은행과 LG카드 합병 등 굵직굵직한 인수·합병을 성공시킨데다 대주주 격인 재일동포 쪽 신임도 두터운 편이다. 하지만 정부가 CEO의 장기 집권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 데서 시작된 KB 사태처럼 신한금융도 불똥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주식 없이 경영권 행사, 재벌과 비슷”

현 정부는 민영화한 기업과 금융회사, 연구기관에 직간접적으로 친정부 성향 인사를 심어왔다. 검찰·금감원 등 권력을 동원해 압박하기 때문에 ‘MB식 관치’는 금융감독 당국이 노골적으로 나서던 과거보다 더욱 교묘해졌다는 얘기가 나돈다. 관치 논란은 고스란히 우리나라 대외 신인도 훼손과 기업의 이미지 손상으로 이어진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KB금융의 관치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부 당국은, 주식이 거의 없으면서 경영권은 맘대로 행사하는 재벌 총수의 행태를 빼닮았다. 정부의 관치가 계속된다면 실적보다 정권이나 정부에 기대는 CEO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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