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벌인, 아들을 위한 싸움?’
금호아시아나그룹 ‘형제의 난’은 2세인 아버지들이 벌였지만, 결국 아들을 위한 싸움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 때문에 재계 안팎에선 박삼구 명예회장과 박찬구 석유화학 부문 회장의 ‘형제의 난’이 금호그룹 3세 경영권을 둘러싼 불씨로 번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8월1일 박철완 아시아나항공 전략팀 부장이 그룹 전략경영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룹 핵심부서에 영입된 것이다. 박철완 부장은 금호아시아나 창업주 박인천 회장의 둘째 아들인 고 박정구 회장의 장남이다. 박삼구 명예회장의 장남 박세창 상무는 이미 전략경영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박세창 상무는 1975년생으로, 휘문고와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박철완 부장은 1978년생으로, 경문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MBA 과정을 마쳤다. 금호그룹 쪽은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기 위해 그룹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부서로 옮긴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박철완-박세창-박준경의 행보하지만 금호그룹 안팎에선 다른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박삼구 명예회장이 ‘박삼구 회장 단일 체제 유지’와 ‘경영권 승계’를 위한 포석을 놓았다는 분석이다. 박철완 부장은 경영권 향방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 그는 금호석유화학 지분 11.76%를 갖고 있다. 그가 박 명예회장 쪽을 지원한다면 함께 그룹의 실질적인 지주회사인 금호석유화학의 지분 23.52%를 보유하게 돼, 18.47%를 보유한 박찬구 전 화학부문 회장 부자를 압도할 수 있다.
금호석유화학 이사회에서 해임된 박찬구 전 회장이 지분 경쟁을 벌일 경우에도 박철완 부장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박 전 회장도 이 부분에 주목해 박 상무와 박 부장을 분리 대응하고 있다. 박찬구 전 회장은 해임 일주일 만인 8월3일 ‘금호그룹 임직원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을 시사했다. 이 글에는 형인 박삼구 명예회장 일가의 불법성 등 민감한 내용도 담겨 있다. 박찬구 전 회장은 “유동성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조속히 매각하자고 주장했지만 박 명예회장은 계열사 간 내부거래 및 그룹 자산 매각 등으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비난했다. 박 전 회장은 이 과정에서 금호렌터카 170억원과 금호개발상사 150억원 등 340억원의 계열사 불법거래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면서도 동일 거래를 했던 박철완 부장은 언급하지 않았다.
박세창 상무가 고속 승진을 하는데, 박찬구 회장의 아들인 박준경 금호타이어 회계팀 부장은 부장직에 머물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다고 한다. 박준경 부장은 박철완 부장과 동갑내기로, 고려대 환경생태공학과를 졸업해 지난 2007년부터 금호타이어에서 일하고 있다.
형제끼리 돌아가며 경영을 맡는 ‘형제 경영’의 전통이 있지만, 박찬구 전 회장은 박삼구 명예회장에게서 다음 경영권을 넘겨받기가 불투명하다고 본 것 같다. 박삼구 명예회장 역시 동생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경우, 아들인 박세창 상무의 그룹 경영권 승계가 어려워진다. 박찬구 전 회장의 다음 차례는 고 박정구 회장의 아들인 박철완 부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 박찬구 전 회장이 아들 박준경 금호타이어 부장에게 물려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박삼구 명예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작고한 두 분 형님과 후임 논의가 있었는데, 나의 유고 때는 내부 경영인 또는 외부의 덕망 있는 인사가 이끌어가기로 합의했고, 그 유지를 받든 것”이라고 말했다. 즉 오래 전부터 장남·차남·3남이 4남과 5남을 회장직에서 배제하기로 뜻을 모았다는 의미다. 물론 5남인 박종구 아주대 부총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은 일찌감치 경영에 뜻을 두지 않고 관료로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대우건설이 계열 분리 구도 흔들어하지만 박삼구 명예회장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금호그룹은 박성용(1남·작고) 박정구(2남·작고), 박삼구(3남), 박찬구(4남) 등 4형제가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똑같이 갖고 있었다. 4남을 회장직에서 배제하기로 했다면, 5남 박종구 부총장처럼 처음부터 지분을 나누지 않았어야 맞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건설 문제로 경영권 승계와 계열 분리가 여의치 않게 되자, 박찬구 전 회장이 금호석유화학 부문만을 따로 떼어 독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박삼구 명예회장에게 역공을 당했다는 분석이다.
사실 금호그룹이 무리하게 대우건설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형제의 난’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몇 년 전까지 그룹 안에서는 계열이 분리될 경우 그 구도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즉 박철완 부장이 금호산업·타이어·고속을 맡고, 박세창 상무가 아시아나 항공, 박준경 부장이 석유화학을 맡는 구도로 짜였다. 그런데 금호가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이 구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금호는 2006년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기존의 금호석유화학 단일 지주회사 체제에서 금호산업·금호석유화학이라는 두 축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금호산업이 인수한 대우건설의 덩치가 너무 커서 금호산업이 법적인 지주회사가 됐다. 대우건설 주가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박삼구 회장이 아시아나항공·대우건설·대한통운 등 굵직한 계열사를 거느린 금호산업 회장을 맡고, 동생인 박찬구 회장은 비교적 덩치가 작은 석유화학 부문을 맡으면 된다.
하지만 대우건설 주가가 떨어지면서 박삼구 명예회장은 계열 분리를 ‘없었던 것’으로 했다. 박찬구 회장 쪽은 무리한 외형 확대가 문제였는데 책임을 떠넘겼다고 반발했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박삼구 명예회장이 한진그룹을 랭킹(자산순위)에서 잡으려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금호의 주력인 아시아나를 키웠으면 대한항공에 대적할 만큼 성장시킬 수 있었으나, 한진을 이기겠다며 아시아나를 키우기보다 그룹을 키워 결국 형제의 난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박삼구 명예회장은 그룹 회장직을 내놓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은 5대 계열사(금호산업·금호석유화학·대한통운·대우건설·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선 박삼구 명예회장이 3세 경영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박찬구 전 회장 쪽도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다고 하면서 법적 실체가 없는 상징적 직위에 불과한 그룹 회장직에서만 물러났다. 주요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은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은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에 불과하다”며 경영일선에서 실질적으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박삼구 명예회장 퇴진 약속 이행이 관건이에 대해 금호그룹은 “박삼구 명예회장이 재무구조 개선 약정의 체결 당사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대표이사직을 유지하는 것인 만큼 구조조정 작업이 완료되면 현직에서 모두 물러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금호그룹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뜻밖의 말을 했다. 이 인사는 “사실 박삼구 명예회장이 형들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박찬구 전 회장을 많이 챙겼다. 예를 들어 그룹 행사가 끝나면 박삼구 명예회장이 직접 박찬구 전 회장 등을 두드리며 ‘수고 많이 했다’고 할 정도였다. 박삼구 명예회장은 형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깍듯하게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우건설을 인수한 뒤 몇 년 만에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500년 영속 기업’을 내세운 금호그룹이 그 약속을 앞으로 지킬지 관심이 쏠린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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