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권 LG패션 팀장은 ‘019-3××-××××’ 번호를 쓴다. 그동안 휴대전화 단말기는 몇 번 바꿨다. 실수로 떨어뜨려 깨지거나 배터리가 고장나 못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기를 바꿀 때마다 가게 주인들은 보조금을 받아 ‘010’으로 옮겨가라고 유혹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019’를 고수하고 있다. 김 팀장은 “LG에 대한 로열티 때문이기도 하죠. LG에서 처음 선보인 번호가 019였으니까요. 휴대전화기도 LG전자 제품이죠”라고 말했다.
휴대전화를 쓰는 사람 10명 가운데 7명이 010 번호를 쓴다. 나머지 3명은 김 팀장처럼 다른 번호를 쓴다. 이들은 자신의 번호가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래서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에는 ‘010 번호통합 반대’ 카페까지 등장해 조직적인 반대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다.
010 번호는 2004년에 나왔다. 정부가 이동전화 번호 통합에 나서면서 도입됐다. 010은 과거 각 이동통신사마다 달랐던 011·016·017·018·019를 통합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든 번호다. 기존 세 자리 국번(011-200-××××)도 네 자리(010-5200-××××)로 바뀌었다.
옛 정보통신부는 번호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010을 도입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정통부는 010으로 100% 통일되면 010을 꾹꾹 누르지 않아도 되는 편리성을 그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011을 쓰는 독과점 기업인 SK텔레콤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란 뒷말도 낳았다.
정통부는 번호 통합을 위해 010 번호를 사용하지 않는 2세대(2G·음성통화) 가입자가 3세대(3G·영상통화)에 가입하려면, 기존에 사용하던 번호 대신 010 번호를 받도록 했다. 또 이용자의 불편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가입자의 010 비율이 80% 이상 될 때 전문기관의 연구 등을 통해 번호 통합을 마칠 계획임을 직·간접적으로 밝혀왔다.
4월 말 현재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4600만 명이다. 이 가운데 010을 쓰는 사람은 전체의 72% 이상인 3350만 명가량 된다. 010 가입자는 지난해 3월만 해도 2618만 명에 그쳤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KTF가 3G 서비스인 ‘쇼’를 치고 나왔고, 한발 뒤졌던 SK텔레콤이 ‘~하면 되고’송을 들고 나와 3G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2G를 버리고 3G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010 가입자는 한 달에 50만 명꼴로 늘었다. 올 들어서도 한 달에 90만 명 안팎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처럼 간다면 010 사용자 비율은 연말께 80%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010 통합을 보는 이동통신사들의 시각도 제각각이다. KTF와 LG텔레콤은 찬성이지만 SK텔레콤은 시큰둥하다. KTF 가입자의 010 번호 비율은 이미 80%(표 참조)를 넘겼고, LG텔레콤은 598만 명(77.86%), SK텔레콤은 1550만 명(67.60%)이다. SK텔레콤은 기존 번호 프리미엄을 되도록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한다. 010이 나오기 전까지 SK텔레콤은 ‘우수한 통화 품질은 곧 011’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쏟아왔다. 그래서 SK텔레콤은 강제적인 010 번호 통합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SK텔레콤 가입자의 20% 이상이 여전히 011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진 SK텔레콤 매니저는 “정든 번호가 편한 장기 가입 고객이나 전국을 누비는 영업사원들은 여전히 011 번호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반면 010 가입자 비율이 가장 높은 KTF는 010으로의 통합에 적극적이다. 진병권 KTF 홍보과장은 “대세는 010이다. 사용자들의 편리성이 높아진다. 인터넷 회원에 가입할 때도 가장 먼저 나와 있는 전화번호가 010이다. 앞으로 010을 쓰면 더욱 편리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단 010으로 통합하면 청와대도 따라 바꿔야 한다. 청와대 직원들이 쓰는 휴대전화 번호는 ‘017’이다. 청와대는 지난 1998년 12월부터 017 번호를 써왔다. 별도의 국번호(7××)도 있다. ‘017-7××-××××’로 시작되는 번호는 청와대 사람들의 휴대전화다. 옛 청와대 직원은 “급히 호출할 때 필요하다며 청와대 직원에게 017 번호의 휴대전화가 지급됐다. 휴대전화 액정화면에 017 번호가 찍히면 윗사람이 부르는 경우가 많아 긴장되곤 했다. 청와대를 떠나면 017 번호를 반납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017 번호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017은 SK텔레콤에 인수당한 옛 신세기통신의 고유번호였다. 신세기통신은 SK텔레콤과 합병 전 청와대와 군부대, 경찰청 등의 고객을 유치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들였다. 인지도 등에서 상당한 효과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군인이나 경찰 가운데 017 번호 사용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칼자루는 옛 정통부 업무를 물려받은 방송통신위원회가 갖고 있다. 현재 방통위는 ‘신중 모드’다. 기존 번호 사용자들의 반발 때문이다. 방통위가 강제 통합에 나설 경우, ‘1000’ ‘1004’ 등 이른바 ‘골드 번호’를 갖고 있거나 번호 변경으로 업무에 지장을 받는 가입자들이 반발하는 등 부작용은 불가피하다. 010을 이용하지 않는 1260만여 명의 사용자들 중 상당수는 통합에 반대하고 있다. 음성통화로 버티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번호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방통위 “통합 구체적 계획 없다”일부 사람들은 전화번호가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전화번호는 사유재산처럼 보이지만 국가에서 일정한 대역의 전화번호를 받아쓰는 임시 이용권 개념이다. 법적으로 반대할 명분은 약한 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휴대전화 번호가 자기 정체성과 관련돼 있다는 의미에서 인격권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번호를 통합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따라 그동안 3200만 명이 010으로 바꿨다. 번호 통합을 미룰 경우 불편을 감수하고 번호를 변경한 수많은 이용자들만 손해를 본다는 반론도 나온다.
박준선 방통위 통신자원정책과장은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이 국회에서 답변하는 과정에서 010 번호 사용자가 80~90%가 되면 통합을 논의하겠다고 답한 것일 뿐이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80%를 밝힌 적은 없다”고 말했다. 박 과장은 “올 연말께 010 통합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정해진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덧붙였다.
글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사진 정용일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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